이 책이 처음 출간된 지 28년, 번역한 지 30년 만에 책을 다시 펴낸다. 책을 다시 들추니 처음 번역하던 엄혹한 시절의 감회가 절로 떠오른다. 1980년 5월의 광주, 차마 어떻게 그 시절의 참혹한 역사적 비극을 다시 떠올리고 싶겠는가. 5월 18일에서 27일까지, 나는 고등학교 교사의 신분으로 비극의 현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대한민국 국군이 계엄군이라며 중무장한 상태에서 무차별로 양민을 학살하던 현장이 광주의 금남로와 충장로 거리였다. 시민군의 힘에 밀려 시내에서 퇴각했던 계엄군, 그들은 다시 27일 새벽 시민들을 학살하고 시민군을 제압한 뒤, 광주시를 장악하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5・18광주민주화운동은 큰 비극으로 끝났고, 검거 선풍이 불어닥쳤다.
죽지 못한 사람의 부끄러움에 마음이 매우 편치 못하던 그날, 5월 27일 이후 나는 저승사자들에 에워싸이고 사신(死神)의 그림자에 휩싸여 고행의 터널, 죽음의 동굴 속에 깊이 잠기고 말았다. 점심 무렵 나를 체포하러 온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어떻게 상황을 반전시킬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야말로 속수무책 그대로였다. 점심 뒤에 찾아온 선배이자 동료 교사였던 분의 강권에 따라 일단 집에서 몸을 피하기로 하고, 그 동료 교사의 집으로 옮겨가면서부터 나의 도피생활은 시작되었다.
5월 27일 오후부터 검거되는 그해 12월 크리스마스 무렵까지 만 7개월 동안, 검거하는 군경에는 1계급 특진에 몇백만원의 현상금을 준다고 기재된 포스터가 내 사진과 함께 전국의 곳곳에 게시되어 있었다. 눈을 똑바로 뜨고 누구를 볼 수도 없고, 조바심과 무서움증에 걸려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지닐 수도 없던 시절이었다. 광주에서 동가식서가숙하다가 6월 초에야 서울로 잠입할 수 있었다. 서울에 오니 TV에서 수배자로 내 사진이 계속 방영되었고, 계엄당국은 검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6월 하순쯤 서울에서도 있지 못하고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으로 내려가 지인의 협조로 하숙방을 구해서 방안에 웅크리고 앉아 근심걱정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내 손에는 책이 한권 있었다. 서울서 떠나면서 친구 임형택 교수에게서 빌려온 다산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영인본(경인문화사 1970) 전6권 중의 제1권 『시문집(詩文集)』이었다. 한시도 떠나지 않는 불안・초조・근심・걱정을 잊으려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조금씩 마음이 가라앉았고, 쏠쏠한 재미에 맛이 들면서 죽음의 공포나 사신의 어른거림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간접적으로 흘러들어오는 바깥소식은 예사롭지 않았다. 내가 광주항쟁의 주모자로 꼽혀 내란의 수괴로 시나리오가 작성되었고 잡히면 죽음밖에 없으니, 꼭꼭 숨어서 절대로 잡히지 말라는 소식만 들려왔다. 다산의 『시문집』은 그런 암담한 소식에도 무서움 증세를 약화시켜주었다. 잠자리에만 누우면 저승사자들이 으르렁대곤 했는데 밤새 책을 읽다보면 새벽이 오고, 그러는 사이 잠깐씩 꼽사리 잠을 자면서 또 깨어나면 책을 읽고 있었다.
1801년 40세의 다산은 신유옥사(辛酉獄事)를 당해 감옥에 갇히고, 국청이 열려 국문을 받는 최악의 순간이 있었다. 함께 갇혔던 친형 정약종, 자형 이승훈, 선배 이가환, 권철신 등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겨우 목숨을 유지한 다산과 중형 정약전은 먼먼 귀양살이를 떠나야 했다. 18년간의 처참한 귀양살이에도 전혀 좌절하지 않고, 오히려 겨를을 얻었다고 기뻐하면서 500권이 넘는 저술을 남긴 다산, 그를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학문적 대업을 이룩한 다산이 내 앞에 나타나고, 그가 신산한 세월에 썼던 글들을 읽으면서, 나도 좌절의 늪에서 다시 일어날 방법을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압제와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의 참혹한 삶을 읊은 그의 시를 읽으면서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 그래서 우선 그런 시를 한문에서 한글로 번역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조선시대 농민들의 모습은 그 무렵 우리 국민들의 모습과 아주 많이 닮아 있었다. 부실한 자전 한권이 있을 뿐 난해한 한문을 번역할 도구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시간을 깨는 데 있어서나 마음의 위로를 받는 데 있어 다산시 번역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이때 옮긴 150여수가 『애절양(哀絶陽)』(시인사 1983)이라는 다산의 시선집이다.
시집을 읽고 넘기니, 다산의 산문세계가 전개되었다. 「정헌 이가환 묘지명」은 바로 다산이 가장 따르며 존경했던 대선배 이가환의 억울한 죽음을 그의 일대기인 묘지명이라는 형식으로 폭로한 글이었다. 신유옥사와 광주학살이 오버랩되었고, 권력 유지와 집권 연장을 위해 반대파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과정을 읽어가면서 죽음의 공포도, 사신의 위협에서도 모두 벗어나 의분(義憤) 속에서 번역에 열중할 수 있었다. 성호 이익의 직계 제자로 성호의 학통을 이어갈 대학자였던 권철신이나 성호의 종손(從孫) 이가환이 처절하게 목이 베이는 비극, 죽은 뒤에 시신까지 저자의 구경거리가 되는 처참한 사실을 읽으면서 광주항쟁의 비참함을 견주어보기도 했다.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인 정치의 패악상에 치를 떨면서 한편으로 목을 죄던 위협감을 다소간 떨치기도 했다. 복암 이기양, 매장 오석충 등 사화(士禍)를 당한 다산 선배들의 서러운 인생에 조의를 표하면서 나의 아픈 마음을 달래었다.
번역을 얼추 마친 1980년 12월 크리스마스 무렵, 나는 온양에서 검거되었다. 이미 내란죄의 고등군재가 끝난 때였고 나를 수괴로 한 시나리오는 무효화되어 나는 중벌을 선고받지는 않았고, 2년여 옥살이 끝에 1982년 3월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출소하였다. 출소 뒤 무서운 5공 독재정권 아래서 온갖 감시를 받으면서 온양 시절의 노트를 찾아내 다시 번역작업을 마무리했다. 그랬더니 출판사 창비(당시는 창작과비평사)에서 그것을 ‘창비신서’로 출판하자고 하였다. 82년 3월에서 83년 4월까지 1년여 동안 가필하고 손을 보아 원고를 보냈다. 그때는 말 몇마디만 잘못해도 저자는 구속되고 출판사는 인가가 취소되는 무서운 시절이었다. 초판본 해제(개정증보판 「해설」)에 번역을 하게 된 경위나 그 어렵고 무섭던 시절의 고통은 한마디도 못하고, “타의에 의한 겨를을 얻었”느니 “역자의 어떤 괴로움을 달래느라 이룩된 작업”이었다는 등의 이야기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은 그래서였다. 행여라도 이 원고가 출판이 안 되거나 출판사가 불행을 당할 것을 막기 위해서는 미리 굽히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
던, 안타깝기 그지없던 시절이다.
실은 이 책의 출간에도 비화가 있다. 이 책의 초판 출간일자는 1985년 12월 5일로 되어 있으나 실제 책이 나온 것은 12월 15일이다. 출판사 창비는 그 열흘 사이 등록취소를 당했다. 그 경위는 이렇다. 1983년 4월에 창비로 송고한 뒤 이러구러 세월이 흘러 1985년 겨울, 출간이 코앞이었다. 그런데 책이 인쇄를 마칠 무렵인 85년 12월 10일, 창비는 불온서적을 많이 간행한다는 구실로 출판사 등록취소를 당하고 말았다. 독재정권의 마수는 그렇게 악독했다. 등록취소된 출판사가 책을 낼 수는 없으니, 인쇄중이던 책은 판권의 출간일자를 12월 5일자로 고쳤고, 책은 12월 15일 출간되었다. 산모는 죽고 아이만 태어난 셈이다. 그 기구한 운명의 책이 바로 ‘창비신서’ 70번으로 나온 『다산산문선』이다.
그때는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시인사 1979)라는 다산의 서간문 번역서 한권이 나의 유일한 역서였다. 명색이 다산을 연구한다면서 그냥 죽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뭔가 작은 업적이라도 있어야 내 아이들에게도 덜 부끄러우리라는 생각에, 당시 아무도 번역을 손대지 않은 다산의 「자찬묘지명」을 위시해 많은 산문을 번역해 역서를 한권 남기고자 시작한 작업인데, 오히려 위로를 받고 마음의 안정까지 얻었으니 얼마나 잘 생각한 일인가. 지금이야 『다산시문집』 전체가 번역되어 나와 있지만, 그 시절에는 「자찬묘지명」의 번역만으로도 상당히 기념비적인 책이었다.
다산의 「자찬묘지명」 광중본(무덤 속에 넣을 간략한 일대기)과 집중본(문집에 실을 자세한 일대기) 두 글은 다산 자신이 자신의 일생과 학문적 업적, 자신의 사상과 철학을 설명한 가장 중요한 다산 연구자료이다. 240여권의 경학 연구서를 통해 중세의 성리학적 관념의 유학세계를 ‘민중적 경학’(정인보)이라는 실학적 경학체계로 다시 정리하여 관념의 세계에서 실행・실천의 경험적 세계로 바꾼 위대한 학문적 업적을 저자 자신이 소상하게 설명해놓았다. 이른바 일표이서一表二書라는 경세학에 관한 저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의 집필 과정과 목적까지 소상하게 밝힌 글이 「자찬묘지명」 집중본이다. 한문 해독에 약한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그런 글을 번역해주지 않고서야 어떻게 다산을 알릴 수 있겠는가. 나는 고등학교 교사로서 청소년을 상대하기도 해서 죽기 전에 그들에게 읽을 책을 한권 선사해야겠다는 꿈이 있었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와 『다산산문선』은 사실 그런 목적의식에서 나온 번역서이다.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가 아직도 읽히고, 다산 연구자들이 『다산산문선』을 많이 참고한 사실로 보면, 그런 대로 나의 꿈은 상당히 실현된 셈이라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이전 번역문은 다소 서툴고 오역도 많았다. 그때의 사정이 그러했을 뿐만 아니라, 그 시절 나의 한문 실력도 매우 미숙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제 많은 부분을 가필하고, 가족관계 글로 다산의 부친에 관한 글인 「선인유사(先人遺事)」와 큰형수에 대한 글인 「맏형수 공인 이씨 묘지명(丘嫂李氏墓誌銘)」 두편을 이번에 추가해서 넣었다.
1부에서 6부까지로 꾸민 이 책은 부마다 앞에 「읽기 전에」라는 해설을 실었다. 82~83년의 1년과 감옥에서 나온 직후, 아무런 할 일이 없던 때여서 꼼꼼하고 착실하게 살펴서 그래도 큰 잘못 없는 해설을 달 수 있었다. 지금도 더 보탤 말이 없어 문장만 손보아 다시 내놓기로 했다. 아직도 다산 고경(古經)에 대한 학설을 알지 못하는 부분이 많지만, 어쨌든 이 한권의 책이 번역되던 그 아픔을 기념하기 위해서라도 책을 다시 간행하는 뜻을 헤아려주기 바라마지 않는다. 흥미 본위도 아닌 이런 난해한 책을 이해타산을 넘어 출간해주는 창비에 감사하고 출판작업에 애써준 많은 분들에게 고마운 뜻을 전한다.
번역을 마치고 30년이 지난 2013년 삼복 절서에 다산연구소에서
박석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