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한 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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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진솔한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생생한 입담으로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이웃들에게 따뜻한 관심을 표현해온 중견작가 공선옥이 5년 만에 신작소설집을 출간했다. 공선옥 소설의 활력은 여전히 놀라운 바 있다. 이번 소설집에서 공선옥은 낯익지만 일관된 주제의식을 견지하며 냉엄한 현실을 능청스럽게 비꼬는 서사 전략을 생동감있고 활달한 입담으로 담아냈다. 작가는 그간 공선옥 작품을 수식하던 ‘모성’의 이미지를 넘어서 우리 시대 사람들 누구나 받게 마련인 상처를 솔직하게 인정하면서 그 상처에서 비롯된 삶의 의지를 타인과의 연대의식으로 확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표제작인 「명랑한 밤길」은 2006년 ‘작가가 선정한 올해의 소설’에서 최우수작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명랑한 밤길」에서 스물한살 간호조무사인 주인공은 치매에 걸린 홀어머니를 모시고 산다. 우연히 응급환자로 병원을 찾은 남자에 이끌려 잠시 꿈같은 연애를 경험하지만, 끝내 버림받는다. 외국가수 이름을 줄줄 외우고, 밤마다 감미로운 음악을 선사해주던 남자는 주인공에게 낭만적인 연애의 궁극이자, 희망도 가망도 없는 앞날을 밝혀줄 존재였다. 그러나 텃밭에서 키운 무공해채소를 받아먹던 남자는 끝내 그녀를 마다하며 철저하게 등을 돌린다.
「도넛과 토마토」에서 이혼하고 야쿠르트를 배달하며 생계를 꾸리던 문희는 살뜰한 신혼을 꿈꾸며 다른 무엇보다 그저 ‘장롱’ 하나만 갖기를 바랐고, 「아무도 모르는 가을」의 인자는 산골로 들어오는 대신 남편과 꽃과 나무를 기르며 사는 삶을 꿈꿨을 뿐이다.

 

 

 

문희가 그때, 맹수가 물어뜯는 것만 같은 궁핍 속에서 꾸었던 꿈은 엉뚱하게도 포마이카 장롱이었다. 큰 것도 필요없었다. 그냥 옷장 한칸, 이불장 한칸이면 되었다. 그걸 놓고 살면 문희는 아주아주 행복할 것 같았다. 젊다기보다 아직 어린 문희는 갓 태어난 아기를 업고 살림살이라고는 옷을 넣어둔 사과궤짝 하나 덩그마니 놓여 있는 셋집 문간방을 나섰다. […] 포마이카 장롱으로 촉발된 문희의 가난하지만 행복한 꿈은 그러나 부엌 없는 셋방 문을 여는 순간 사라져버렸다. 포마이카 장롱과 에나멜 문갑과 모란꽃 이불과 매화꽃 그리고 개다리소반에서 책을 읽는 남편은 백열등 불빛 아래 온데간데없었다. ―「도넛과 토마토」

 

 

 

“여보, 저기 꽃 좀 봐라.” / 남편이 산벚꽃으로 훤한 산을 가리켰다. / “꽃만 피면 뭐 해. 돈이 있어야지.”

[…]인자는 돈 벌어서 남편이랑 아기랑 다른 무엇도 아닌 꽃과 나무를 기르며 살고 싶었다.

“야, 그래도 꽃이라도 피니 얼마나 좋냐.” / “맞는 말입니다요.”

택시기사가 맞장구쳤다. 하기야 돈 없는 사람들 사는 세상에 꽃이라도 안 피어나면 돈 없는 사람들은 아마 세상 재미없어 만날 죽고 싶은 맘만 들어갈지도 몰랐다. ―「아무도 모르는 가을」

 

 

 

‘포마이카 장롱’으로 표상되는 문희의 행복한 결혼은 남편의 부도와 이혼으로 산산이 깨지고, 인자는 갑작스런 홍수로 졸지에 남편을 잃는다. 공선옥 소설의 인물들은 단 하나의 소박한 희망조차 쉽게 허락받지 못한다. 낭만적이거나 꿈같지 않을지언정 평범한 연애와 결혼도 공선옥 소설의 여주인공들에게는 결코 만만치 않다.

 

그러나 문희는 배달중에 점심을 먹곤 하던 공원 한귀퉁이에서 누군가 심어놓은 토마토 묘목을 발견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노숙인 신세가 된 공원 사람들 중 누군가가 꺼져가는 불씨를 당기듯 심은 묘목을 보며 문희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키우는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아무도 모르는 가을」에서도 남편을 잃고 셋집에서도 쫓겨나 끝도 없는 절망에 빠졌던 인자에게 가을과 함께 새로운 인연을 암시하는 결말을 보인다.

 

어느 것 하나 손닿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그녀들에게는 홀어머니를 모시고, 아비 없는 아이들을 키우며 생계를 꾸려나가는 일, 다시 말해 일상을 살아가는 일이 더 급선무가 된다.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낭만적인 연애와 결혼은 깨지지만 그녀들은 남은 삶을 살아가는 데에 있어서는 적극적인 생활인의 자세를 되찾는다. 그렇다고 그녀들이 여성해방주의자의 모습으로 전위에 나서는 것도 아니다. 그녀들은 ‘소외된 자-소외를 이겨내는 자’의 관념적 초상이 아니라 우리 옆의 평범한 여성들이며, 그래서 어쩔 수 없는 질곡에 사로잡힌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존재들이다.

 

 

 

공선옥 소설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상처입은 존재들이지만, 자신들의 아픔을 드러내놓고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힘을 얻고 희망을 찾는다. 공선옥의 인물들은 자신의 상처를 부끄러워하지도 감추려 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서 힘을 찾고 그런 상처를 공유하며 연민하며 서로의 손을 잡는다. 「꽃 진 자리」의 주인공은 이혼녀로 친정부모와 딸을 부양하는 선생이다. 그녀는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비슷한 처지의 남자선생에게 연민을 넘어서는 감정을 느낀 나머지 몰래 그의 집에 숨어들기까지 한다. 「79년의 아이」에서는 혼전임신으로 낳은 아이를 버렸다는 아내의 고백에 놀라 남편이 떠나버린다. 딸과 남은 엄마는 자신이 저지른 ‘죄’(달리 말하면 ‘상처’)를 인정하며 서로의 손을 잡기 시작한다.

 

 

 

“내가 죄인이니까.” / “엄마가 무슨 죄졌어?” / “애 낳은 죄.” / “애 낳는 게 죄야?” / “결혼하지 않고 애 낳는 게 죄야.” / “애는 결혼해서만 낳아야 해?” / “그렇대.” / “엄만 결혼하지 않고 애 낳았어?” / “응.” / “그앤 어딨어?” / “몰라.” / “그애 있으면 좋겠다.” / “그앤 그애가 아니라 니 오빠야.” / “엄마, 또 오빠 한명 낳아주세요.” ―「79년의 아이」

 

 

 

공선옥의 주인들에게 상처와 아픔은 결코 부끄러운 치부가 아니라 살아가는 힘이고, 상처를 딛고 일어선 자기연민의 근원이며 비슷한 처지의 타인과 연결시켜주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그 상처를 밝히고 위로하는 작가의 시선 또한 주인공들의 태도와 닮아 담담하고 오히려 활달하기까지 하다.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삶을 긍정적으로 포용하는 자세는 공선옥 소설의 개성을 한층 돋보이게 만들어주고 있다.

 

 

 

공선옥 소설이 응시하는 낭만적 연애의 상실은 전략적이고 매혹적인 서사의 산물이다. 소설이 보여주듯이 제도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여성들의 현실은 타자들의 삶을 들여다보게 하는 소중한 매개체가 된다. 소설 인물들은 사랑의 환상이 사라진 냉엄한 현실을 날카롭게 자각하면서도 그 속에서 삶을 지속하는 근본적 활기와 낙천성을 잊지 않는다. 유머러스하고도 생생한 화법으로 전달되는 이들의 이야기는 “낯익고 낯익어서 슬픈 풍경” 속에 숨은 삶의 비의를 새롭게 건져올리게 한다. 마르지 않는 체험의 샘에서 흘러나오는 이 활달한 입담의 세계는 공선옥 소설의 고유한 개성과 상상력이 무엇인지 뚜렷하게 보여준다. ―백지연(문학평론가)

목차

꽃 진 자리
영희는 언제 우는가
도넛과 토마토
아무도 모르는 가을
명랑한 밤길
빗속에서
언덕 너머 눈구름
비오는 달밤
79년의 아이
지독한 우정
폐경 전야
별이 총총한 언덕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 지면

수상정보
  • 2009년 제24회 만해문학상
저자 소개
  • 공선옥

    1963년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다. 1991년 『창작과비평』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피어라 수선화』 『내 생의 알리바이』 『멋진 한세상』 『명랑한 밤길』 『나는 죽지 않겠다』, 장편소설 『유랑가족』 『내가 가장 예뻤을 때』 『영란』 『꽃 같은 시절』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등이 있다. 만해문학상, 신동엽문학상, 오늘의젊은예술가상, 올해의예술상, 요산김정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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