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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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제각각인 서로의 빛깔을 가끔 확인하면서

우리, 이 걷기를 포기하진 말자

 

읽는 이의 가슴을 지그시 누르는 다정한 언어

가지런하게 나와 세계를 연결하는 징검다리 같은 시

 

 

세상을 응시하는 예민한 감각과 탁월한 시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단정한 시 세계를 펼쳐온 정다연 시인의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2015년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선보인 소시집 『내가 내 심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현대문학 2019) 이후 2년 만에 펴낸 이 시집에서 시인은 “정돈된 아름다운 언어들”(조대한, 해설)로 세계에 만연한 폭력과 거기에 굴하지 않는 연대의 마음을 펼쳐낸다. 미래를 낙관하지도, 그렇다고 현재에 좌절하지도 않는 이 시들은 “읽는 이의 가슴 복판을 지그시”(박연준, 추천사) 누르며 공공연한 차별과 편견을 함께 이겨내는 걸음에 독자를 동참시킨다.

정다연 시인은 뉴스나 전시회, 길을 가다 만난 사람, 공간을 함께 사용하는 동물과 식물 등 일상적인 소재를 통해 통념을 깨고 무심히 해오던 행동들을 되돌아보게 한다. 시인이 특별한 애착을 느낀다고 밝힌(아래 인터뷰 참조) 「에코백」은 대표적인 예다. 공정무역으로 유통된 커피를 마시고 “최저가 에코백”을 덤으로 받은 화자는 최소한을 최선이라고 여기는 세태가 과연 정의로운지 되묻는다. 그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어 서울 한복판에서 불합리한 구조조정에 항의하며 칼을 휘두른 어떤 사람에게까지 가닿는다. 나의 작은 깨달음으로 남의 우위에 서기보다는 그 깨달음을 통해 세계의 부조리를 새롭게 돌아보는 것은 이 시집의 미덕이다. 그래서인지 시인은 공공연한 차별과 부조리를 말하면서도 가르치거나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감각적인 이미지와 냉정하면서도 섬세한 언어들은 병든 사회의 환부를 날카롭게 찌르지만 다른 존재를 훼손하는 법이 없다.

 

춥고 낯선 세계,
당신의 비명을 외면하지 않는 시
“맑게 퍼지는 주문 같은 정다연의 목소리”

 

이 시집에는 손쉬운 위로 또한 없다. “힘을 빼 그러지 않으면 더 아파” 같은 충고는 “쉴 틈 없이 때리는//다정한 말”일 뿐임을 알기 때문이다(「크럭스」). 정다연 시의 “비밀”은 “거리 조율”에 있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추천사), 함께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는 메시지가 시집 이곳저곳에서 발견된다. “나의 너무 많은 최선이 식물을 괴롭히지 않도록//거리를 둔다”(「셰플레라」)라거나 “아주 커다란 침대를 사자. 서로의 윤곽이 마음껏 흘러갈 수 있도록”(「가정」) 같은 구절은 그래서 더 깊은 뜻을 담고 있다. 시인은 “네 곁에 다가갈수록” “널 다치게” 할지도 모르는 잠재적 가능성을 알고 있다(「익스트림 클로즈업」). 이는 무언가를 피사체로 두고 언어를 세공하는 시인이 지녀야 할 윤리와도 통하는 바가 있다.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를 읽다보면 어느새 타인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밥과 약을 잘 챙겨 먹고”(「흑백필름」) 스스로의 일상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가능할 때 비참한 삶의 벼랑 끝에서 무수히 쏟아지는 “당신의 비명”(시인의 말)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시집을 “읽으면, 마지막 장에서 열 개, 스무개, 서른개의 발자국이 종이 바깥까지 계속 이어져 펼쳐지는 장관을 볼 수 있다.”(추천사) 세상의 편견과 부조리에 저항하는 따뜻한 방법을 독자들이 나눠 가지게 되기 때문인데, 이것이 바로 ‘서로에게 기대서 끝까지’ 갈 수 있는 힘이다. 혼자의 삶을 우리의 삶으로 묶어내는 정다연 시의 무궁무진한 가능성도 이 힘 안에 숨어 있다.

 

추천사
  • 누군가를 알고 싶다면 그가 ‘비밀을 보여주는 방식’을 주목해야 한다. 정다연 시의 비밀은 제목과 시 사이의 ‘거리 조율’에 있다. 그는 이 거리를 자유로이 조율한다. 이때 시의 음색이 탄생하고, 언어가 지나다닐 징검다리가 놓인다. 중요한 건 보이는 것들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것,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그가 계속해서 가고 있다는 믿음”(「커트 피스」)이다. 화자들은 미리 기뻐하거나 미리 슬퍼하는 법 없이 ‘적당한 때’를 기다려 방 안에서 홀로 피고 진다. 언어는 섣부름이 없다. 명확하고 단정하며 날카롭다. 읽는 이의 가슴 복판을 지그시 누른다.
    정다연은 “시가 눈에 보인다면 나는 그것을 바라보는 데 전부를 쓸” 사람, 그리하여 “시가 눈에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셰플레라」), 보이지 않는 걸 하염없이 바라보아 고단해진 사람처럼 보인다. 그의 시엔 이런 게 들어 있다. 혼자 자라는 어두운 열매, 빛 없는 눈부심, 땅 없는 광야, 고요한 광활함. “빛과 바람을 주세요/나는 내 방을 뒤덮는 이 어둠보다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어요”(「분갈이」). 맑게 퍼지는 주문. 농담 속 진담. 진담 속 농담.
    이 시집을 읽는 일은 “불타는 연필을 지켜보는”(같은 시) 일, “가두어놓을 수 없는 바람”(「호명되지 않는 기쁨」)에 기대어 잠시 날아보는 일, “울 마음이 없어서//웃는 사람”(「지금은 상영할 수 없습니다」)을 생각하는 일이다. 제대로 읽으면, 마지막 장에서 열개, 스무개, 서른개의 발자국이 종이 바깥까지 이어져 펼쳐지는 장관을 볼 수 있다(「우리 걷기를 포기하진 말자」). 그 발자국을 따라, 같이 가고 싶다. 계속. 계속. 걷고 싶어진다.

    박연준 시인

목차

제1부 깜빡 졸았다 세상의 중심을 향해
홀리데이
에코백
전쟁과 테러
새비징
크럭스
층간소음
이사
표백
동락
국경일

제2부 지금은 상영할 수 없습니다
커트 피스
무기력
빌딩
전환
지금은 상영할 수 없습니다
세번 울어라
어항
유기
셰플레라

제3부 양 눈에 가득 담긴 구름의 방식으로
あなたが日本人だったらもっとよかったのに
러프 컷
버닝
알전구
여자는 시베리아허스키를 키울 수 없다
성지순례
제라늄
사랑의 모양
네가 둥근 잔에 입술을 댈 때
가정
여진(餘震)

제4부 눈물이 무한대로 가득 차서 우리는 부력으로 떠오를 수 있다
유리로 만든 관
큰 새장
흑백필름
어머니가 어렸을 적에
분갈이
얼음
사람들
흙먼지
월화수목금토일
천사가 지나가는 동안
익스트림 클로즈업
호명되지 않는 기쁨
우리 걷기를 포기하진 말자

해설|조대한
시인의 말

수상정보
저자 소개
  • 정다연

    2015년 『현대문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내가 내 심장을 느끼게 될지도 모르니까』가 있다.

잿더미 속에서 한쪽 눈을 뜬다
따뜻하다

나는 처음으로 스스로 태어나라고
나의 잠의 껍질을 지키며 깨부수지 않는 자가 있다는 걸 믿을 수 있다

허공에서 또다른 눈을 뜬다
아래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작아서

문을 열고 길을 나서는 당신을
바라보는 금 간 담벼락이
언제나 먼저 당신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 거기에 서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지만

당신은 모르는 당신의 긴 그림자가 가끔은 담벼락에 먼저 닿기도 한다는 걸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눈을 뜬다 당신의 신발 밑에서
당신의 비명이 잠든 화병의 고요함 속에서
잔디처럼

언제까지고 자랄 수 있을 것 같다

수많은 눈을 뜰 수 있을 것 같다 나에게 그만큼의 눈이 있다는 걸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눈을 뜬다 여기서라면
아침보다 먼저

내가 아닌 다른 마음을 향해 편지를 쓰는 손이 있다는 걸 믿을 수 있다

2021년 가을
정다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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