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

책 소개

엉망진창 아름다운 세계를 기어이 사랑하는 일

 

생의 찢긴 자리를 깁는 담담한 명랑의 목소리

일상의 한가운데서 결핍과 슬픔을 그러안는 시편들

 

 

2004년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독창적인 시세계를 탄탄히 다져온 이근화 시인의 신작 『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가 창비시선으로 출간되었다. 2018년 오장환문학상 수상작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창비 2016)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다섯번째 시집이다. “세상의 거창한 이야기에는 담기지 않는 사소한 이야기, 큰 목소리 사이에서는 들을 수 없는 작은 인간들의 목소리, 관습화된 사고방식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대안적 사유, 상투적인 감각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이상한 느낌 같은 것”(김영희, 해설)이 잔잔히 스며들어 있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세상의 변화를 바라보는 섬세한 감각과 예지력으로 삶과 죽음, 존재의 의미를 짚어본다. “비닐봉지처럼 찢긴 검은 세계에 입술을 주고, 눈동자를 주고, 호흡을 나누는”(이기성, 추천사) 온화한 사랑의 시편들이 다정다감한 언어와 나직한 목소리에 실려 가슴 깊숙이 파고든다.

이근화의 시는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을 소재로 하여 삶의 단면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세상의 중심”에 오롯이 서서 “구멍 난 내일”과 “헌신짝 같은 어제”(「세상의 중심에 서서」)를 차분히 끌어안으며 “안도의 한숨”보다는 “불안의 냄새”(「블랙」)가 시시때때로 피어오르는 오늘을 짐짓 무심한 듯 살아가는 시인은 “이곳은 어디인가, 나는 누구인가, 지금은 언제인가”(「약속」)를 끊임없이 되묻는다. “헛것과 망상과 우울”(「보도블록 위에 떨어진 크래커 두조각」)의 시간을 꿋꿋이 견디어내고 “잿빛 세상을 다독”(「별이 우리의 가슴을 흐른다면」)이면서 지리멸렬하게 어긋난 생활 속에서 “뿌리처럼 굳건”(「오두막에서」)한 사랑을 키워나간다. “내가 없는 나의 목소리”(「악수」)와 어둠 속 저편에서 “마른하늘에 무지개를 띄우는 사람들의 목소리”(「물고기의 귀」)에 귀를 기울이며 부조리한 삶의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충실하게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러나 삶은 언제나 “계속 제자리”(「물고기의 귀」)인 채 덧없이 우울하게 흘러간다. 인생의 진실이 무엇인지 곰곰 생각해보아도 세상은 “아직 다 보지도 못”한 “어려운 참고서”(「노력하는 삶」) 같기만 해서, “진지하고 솔직하기를 바랐지만 얼렁뚱땅 두루뭉술 흘러간”(「약 15도」) 지난 세월을 돌이켜볼 때 “잘 살기란 온전하기란/불가능한 거”(「빈 화분에 물 주기」)라는 회의에 젖어들기 쉽다. 하지만 “어떤 기다림 위에 명랑할 것, 지치지 말 것”(「물방울처럼」)이라는 주문은 낡고 지루하고 “우습게 반복”되는 삶의 무료함 속에서도 “긍정을 연습”(「약 15도」)한다. 그렇게 “다정함을 복구하는 일”(「슬로우 슬로우 퀵 퀵」)에 애쓰면서 “전면적으로 다시 살아보자”(「전면주차」)고 ‘노력하는 삶’이 있기에, “흐린 눈과 거짓 입술”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벗어나 비로소 세상과 소통하는 창을 열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보고 싶은 것”(「소파 아래 귤 하나」)을 보게 되는 것일지 모른다.

잿빛으로 물든 현실을 향한 응시는 또다른 세계를 꿈꾸는 일이다. 이는 “예측할 수 없는 사고”와 “가까운 불행이”(「XY쿠키」) 가득한 세상에서 “슬픔으로 바닥을 기어본 적” 있고 “더이상 일어날 무릎이 없는”(「망치론」)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모색하는 일이기도 하다. 시인은 “친구가 없고 이웃이 없”(「춤추는 눈사람」)는 외로움을 통과하는 이웃에게 “괜찮다고 말해줄 사람”(「약속」)이 기꺼이 되어준다. “용서도 위로도 필요 없는/기쁨도 슬픔도 쓸모없는/텅 빈 몸”(「가능한 모든 사람들」)으로 “돋아날 것 없는 희망에 베이는 날들”(「물방울처럼」)을 위태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불안한 삶을 쓰다듬고 안아주며 “격렬히 우리가 되고 싶어서”(「우리는 영원히」) “마음속에 우글거리는 사랑”(「오두막에서」)을 나눈다. 그리고 “내 것이 아닌 것들을 공들여 호흡”하고 “아침에는 명상을, 낮에는 독서를, 저녁에는 산책을”(시인의 말) 즐기면서 다른 미래를 찾아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러”(「화이트」) 한걸음 한걸음 나아간다. 그 길목 언저리에서 ‘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가 선명한 빛을 띠며 서서히 떠오를 것이다.

추천사
  • 시집을 펼치니 산 자와 죽은 자와 아이들과 노인과 춤추는 눈사람과 귀가 접힌 고양이가 둘러앉아서 팥죽을 먹고 있어요. 아아, 팥죽이라니. 검고 붉고 뜨거운 그것 말인가요? 희고 둥근 새알심이 외롭게 박혀 있는, 어쩐지 목이 멜 것 같은. 이런 음식은 무섭지 않냐고 물으면 그들은 귀신 같은 얼굴을 들고 대답할 거예요. 이것은 ‘희망에 베이는’ 사람들이 삼키는 말이잖아요. 아프고 쓰리고 캄캄한 마음이잖아요. 참, 그렇군요. 이근화의 시에는 팥죽처럼 진하고 뜨거운 것이 많이 있군요. 허물어진 입과 개 없는 집과 낭자한 비린내와 잿빛 눈송이와 가난한 발과 까마귀와…… 이 핏물 흘리는 것들의 다정함을 복구하느라 그녀는 분주하군요. 비닐봉지처럼 찢긴 검은 세계에 입술을 주고, 눈동자를 주고, 호흡을 나누는 일. 그건 컴컴하고 냄새가 나는, 그러나 이 ‘엉망진창 아름다운’ 세계를 기어이 사랑하는 일. 그러니 오늘 당신이 귀신처럼 외롭다면, 그녀의 곁에 앉아 검붉은 팥죽 같은 시를 떠먹기로 해요. 그건 어쩐지 무용하고 슬프고 아득한 일 같지만. 불현듯 터져 나오는 뜨거운 웃음은 덤으로.
    이기성 시인

목차

악수

우리는 영원히

과도

화이트

블랙

산갈치

별이 우리의 가슴을 흐른다면

바다의 책

좋은 이웃들

세상의 중심에 서서

약 15도

집 없는 개 개 없는 집

산 새 죽은 새

XY쿠키

로라

너는 너의 삶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아는 사람

허공에 매달린 사람

머리통 위에 손을 얹고 가만히

건전한 시민으로서 골목길에 애완견의 배

설물을 방치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문에 기

대지 않으며 소방도로에 주정차하지 않고

대피로에 사유물을 적치하지 않으며 야간

에 피아노를 두들기지 않고

귀가 접힌 고양이처럼

반바지 속에서 꿈틀거리는 용들

물방울처럼

슬로우 슬로우 퀵 퀵

전면주차

빈 화분에 물 주기

바나나

1918년

춤추는 눈사람

양말이 꽃처럼

가능한 모든 사람들

약속

소파 아래 귤 하나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귀신들은 즐겁다

세개의 돌

노력하는 삶

뜨거운 팥죽을 먹으며

보도블록 위에 떨어진 크래커 두조각

우리는 왜 썰매를 끄는가

나가는 날

약속

새벽까지 희미하게

개꿈

오두막에서

망치론

나는 약해

척추압박골절

물고기의 귀

낮잠 방해하기

 

해설|김영희

시인의 말

수상정보
저자 소개
  • 이근화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나 2004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칸트의 동물원』 『우리들의 진화』『차가운 잠』 『내가 무엇을 쓴다 해도』, 동시집 『안녕, 외계인』 『콧속의 작은 동물원』, 산문집 『쓰면서 이야기 하는 사람』 『고독할 권리』 『아주 작은 인간들이 말할 때』등이 있다. 김준성문학상, 현대문학상, 오장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예전에는 시를 쓰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다. 쓰고 또 쓰고 싶었다. 요즘에는 딱히 그렇지는 않다. 더 재미있는 일이 생긴 것은 아니다. 시와 나 사이를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고 해야 하나. 그렇다고 해도 별로 두렵지는 않다. 여전히 시를 쓰면서 나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별 볼 일 없는 내가 무용한 것에 매달리며 보내는 이 시간들에 큰 의미를 둘 생각이 없고, 그렇다고 절망할 이유도 없다.
별 이유 없이 자다가도 넘어지는 나는 거칠고 딱딱한 책 정도에 비유하면 적당하지만 나는 나 자신을 요약정리 할 수가 없다. 그저 마음속에 나무 한그루를 그려본다. 숲이라면 좋겠지만 그렇게 현명했다면 일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가끔은 먼 곳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쓴다. 내 것이 아닌 것들을 공들여 호흡해보는 어리석음 같은 게 거기에는 있다.
편집부에서 시집 제목으로 ‘검고 매끄러운 가능성’을 뽑아주었는데 무척 마음에 들었다. 작품을 묶을 당시에 내가생각했던 제목은 ‘뜨거운 입김으로 구성된 미래’였다. 쉼표와 마침표를 조정한 뒤에 두 제목이 함께 시집을 호흡하다가 출간되었다.
헌 옷 가게에서 스팽글이 주렁주렁 달린 옷을 하나 샀는데 그걸 입고 갈 데가 없다. 그냥 걸어두고 가끔 쳐다본다. 이 시집도 그렇게 될 것 같다. 나쁘지 않다. 아니, 감사한 일이다. 죽지 않고 서서히 늙어가는 일. 우연이라고 여기면 너무 냉담한 것 같고, 기적이라고 호들갑을 떨면 우스울 것 같다. 그 언저리에서 아침에는 명상을, 낮에는 독서를, 저녁에는 산책을. 순서는 바뀌어도 좋다.

2021년 여름
이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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