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

행복

책 소개

1990년 『빨치산의 딸』(전3권)을 펴내며 문단 안팎의 화제를 모았던 정지아가 오랜 침묵을 깨고 첫 소설집 『행복』을 묶어냈다. 정지아는 1965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그녀의 부모님은 1940년대 후반 활동을 시작한 빨치산이었고 한국사의 비극 속에서 부모의 삶은 자식에게도 깊은 그늘을 드리웠다. 정지아는 ‘노동해방문학’ 활동으로 몇년간 수배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부모님의 이야기를 소설화한 『빨치산의 딸』을 출간한 직후 판금조치를 당했다.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가 당선되고 1998년까지 단편 두편을 더 발표했으나 이후 5년여 동안 창작활동을 하지 않고 침묵하던 정지아는 작년부터 활발히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오래 무르익은 작품들이 알찬 결실을 거두어 작년에 발표된 중편「행복」은 작가 출판사에서 실시한 설문(소설가, 평론가, 편집자 들에게 2003년 문예지에 발표된 작품 가운데 가장 좋은 소설을 선정해달라는 조사)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로부터 최고의 작품으로 추천받기도 했다. 이번 작품집에는 신춘문예 당선작을 비롯해 최근 발표한 작품들까지 총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표제작 「행복」은 빨치산 출신 부모 밑에서 성장한 한 여성의 교직생활 경험과 가족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성격의 작품이다. 사립학교 교사인 ‘나’에게는 오십년 동안 지난 세월에 붙박여 있는, 한때 빨치산이었던 부모가 있다. ‘나’는 부모의 척박한 삶의 그늘 아래 행복할 겨를 없이 자라야 했고 그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지극히 평범한 남편에게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막연한 이질감을 느끼며 살아간다. 소설은 난생 처음 남편과 ‘나’, 늙은 부모가 함께 떠난 나들이길을 따라가고 있다. 목적지는 어머니의 어릴 적 고향인 운포. 멀리 떠난 여행이 처음이기도 하고 부모와 단란한 추억을 나눠본 기억도 없어 ‘나’에게 이번 여행은 서먹하고 낯설고 당혹스럽다. 하지만 당혹감의 끝에서 ‘나’는 역사와 그 “품안에서 허덕였던” 개인의 삶에 대한 소박한 긍정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는 “비정한 괴물” 같아 보이는 역사 속에서 멈추지 않고 나아갈 수밖에 없는 개인의 삶에 대한 작가의 성찰이 담긴 것이라 볼 수 있겠다.

 

「미스터 존」의 주인공 ‘나’는 외부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영국의 외딴 지방에서 자신을 고립시킨다. 자기와 마찬가지로 고독한 하숙집 주인 존의 시선을 외면하는 ‘나’는 자폐의 바깥쪽으로 걸어나오는 데 대한 두려움과 자기를 지워버리고 익명으로 남고 싶은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 속에는 한때 품었던 변혁에의 열정을 잃고 정보기관에 자수해 반성문을 쓰고 나온 자신에 대한 치욕이 숨어 있다. 문학평론가 김영찬은 자폐의 벽 뒤에 숨으려는 이런 인물들의 마음에는 “상처받지 않으려는 자기방어, 자기를 속이며 세상과 타협할 수 없는 비순응의 몸짓, 좌절된 정치적 꿈에 대한 저린 상실감, 희망 없는 현재의 삶에 대한 낯선 두려움, 그래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 앞에서 갖게 되는 잔혹한 슬픔” 등이 있다고 지적했다. 인물들의 이러한 심리를 이야기 속에서 촘촘하게 엮어가는 작가의 솜씨가 인상적이다.

 

「사춘기」는 떠나간 사랑의 기억을 이야기한다. 「사춘기」의 ‘나’는 열정이 선천적으로 결여된 듯한 무심한 인물이다. ‘나’는 한때 깊이 사랑했던 ‘당신’과 깊이 맺어질 수는 없으리라는 예감에 못 이겨 스스로 이별을 결심하고 결국 자기처럼 “마음이라 이름붙일 뭔가가 결여된” 남자를 선택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첫번째 결혼에서 실패한 아버지의 삶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리스 광장」의 주인공은 주부이다. 어느날 ‘나’는 옛 애인의 전화를 받고 그와 만나기로 하고 약속장소를 향하지만 마치 미로에 빠져버린 듯 헤매다가 발길을 돌려 집에 돌아오고 만다. 인생은 그냥 견디는 것일 뿐이라는 일상의 질서에 의문을 품고 이를 벗어나려던 마음은 사람들이 가득한 시청역 지하도에서 어이없이 수그러진다. 하지만 작품 말미에 이르러 일상의 미로를 벗어나 제대로 생을 대면하고 싶다는 주인공의 욕망은 더욱 강렬하게 되살아난다.

 

신춘문예 당선작 「고욤나무」의 주인공은 좁은 약국 안에 갇혀 매일 무언가를 강박적으로 닦고 있는 약사이다. 그는 결벽증적 성격 탓에 늘 깨끗한 옷을 입고 손님을 맞으며 약사로서 자신의 처방에 마음 졸인다. 바깥과 단절하고 자기만의 견고한 세계를 고수해야 한다는 강박에 싸인 그가 자기와 딴판으로 술과 피로에 절어 “매일매일의 찌꺼기”를 묻히고 사는 305호 남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되는 과정이 펼쳐진다.

 

「승리의 날개」에서 고독하게 살아가던 ‘나’는 아름다운 케이크 만들기에 몰두하는 빵집 여자를 만난다. 가게를 정리하고 ‘승리의 날개’라는 목 없는 나이키상을 보기 위해 빠리로 떠난 빵집 여자로부터 예쁜 케이크를 선물받고 ‘나’는 지난날을 반추할 기회를 갖는다. 「승리의 날개」는 불행한 마음의 근원을 집요하게 파고들면서 ‘나’와는 다른 것을 받아들이며 변화하는 과정을 차분하게 보여준다. 오랜 자폐적 삶의 벽을 넘어서 적응하지 못하던 세상을 향해 한걸음 다가가려는 순간을 담고 있는 점에서 이 작품은 다른 작품들과 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밖에도 독특한 매력을 발하는 여성수난사 「들녜기」, 만년 대학강사인 주인공의 시선으로 아버지 세대의 갈등과 오늘날의 생활의 비애를 풀어간 「민들레 화분」 등도 사람들의 희망과 보잘것없는 현실을 다른 각도에서 대비시킨 흥미로운 작품들이다.

 

 

 

문학평론가 김사인은 정지아 소설의 미덕에 대해 “삶의 배후에 깃든 삭막함과 외로움을 향해 정지아의 감각은 섬세하게 열린다. 그와 더불어 정지아의 묵묵한 문장들은 결코 호들갑 떠는 법 없이 그것들을 균형잡힌 한편의 소설로 거두어들인다”라고 평한다. 작가는 무거운 주제의식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개인 속에 각인된 역사의 모순을 탐구하며 정교하게 이야기를 엮어가고 있다. 개인의 상처와 고통을 감싸안는 정지아의 첫 소설집은 묵직한 문학적 감동이 날로 귀해져가는 요즘 세태에 독자들에게 특별한 기쁨이 될 것이다.

목차

행복
미스터 존
사춘기
그리스 광장
들녜기
승리의 날개
민들레 화분
고욤나무

해설_김영찬
작가의 말

수상정보
저자 소개
  • 정지아

    1965년 전남 구례에서 태어났고,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을 펴내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가 당선되었다.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르뽀집 『벼랑 위의 꿈들』 등을 펴냈으며, 단편 「풍경」으로 2006년 제7회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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