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

책 소개

“나도 지구에서 할 만큼 했다

사람이 뭘 꼭 하자고 세상에 온 건 아니다”

무심한 듯 다정하게 세상을 그려낸 깊고 정갈한 화폭

 

1976년 『심상』으로 등단한 이후 농경적 세계관과 리얼리즘 정신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다져온 이상국 시인의 신작 시집 『저물어도 돌아갈 줄 모르는 사람』이 출간되었다. 부드러운 서정과 정갈한 언어로 우리 시의 한 진경을 보여주었던 『달은 아직 그 달이다』(창비 2016)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여덟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삶의 근원적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적 성찰과 불교적 사유가 웅숭깊은 전통적 서정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기승전결이 단정한 선비의 한시를 읽는 것 같”고 때로는 “견결한 정신주의자의 면모가 엿보이”(안도현, 추천사)는 시편들이 한폭 한폭 고아한 기품이 서린 수묵담채화로 가슴에 묵직하게 와닿는다. “우리가 미처 모르는 명징한 언어”를 만날 수 있고 “영원히 그리운 것을 눈앞에 불러와 마음의 평온을 얻게”(정철훈, 발문) 해주는 따뜻한 시집이다.

 

재바른 것을 멀리하고 허투루 붓을 놀리지 않으며

올해도 낡고 오래된 시 공장을 돌린다

 

이상국의 시에는 빛바랜 풍경들이 어른거린다. 시인은 과거의 기억들을 불러와 쓸쓸히 사라져가는 것들을 되살려낸다. 아스라이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시인은 “시장 골목 뒤켠”의 헌책방에서 “낡고 먼 세계문학들”이 “나를 기다리고는 했”던 고향을 그리며 “쌀독 군데군데 강낭콩을 묻어/쌀의 안부를 표시해”(「그리운 강낭콩」)두곤 하던 어머니와 “가을이 오면//물꼬에 쭈그리고 앉아/밤을 새우던 아버지”(「논물」)를 그리워한다. “면(面)이 텅 빈 저녁으로/태평양이 문지방까지 차오르던 농협 숙직실에서/짜장면에 배갈을 마시던”(「물치」) 지난날의 추억에 젖기도 한다.

자연친화적인 이상국의 시는 일견 한가롭고 태평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음풍영월의 풍경 속에 마냥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매일 일곱명 정도가 산업재해”로 “떨어져 죽고 깔려 죽고 불타 죽고 끼여 죽고 치여 죽고 부딪혀 죽고 터져 죽는”(「……라고 한다」) 비참한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한다. 세상은 “비부(鄙夫)들이 판을 치”(「동갑(同甲)의 노래」)고 제 잇속만을 챙기는 “장사꾼들 세상”(「복날 생각 혹은 다리 밑」)이 되었다. 그럼에도 시인은 “어떻든 세상은 정상이다”(「천장지구(天長地久)」)라고 말하는데, 불완전하고 모순투성이인 세상을 ‘정상’이라고 뒤집어 말함으로써 부조리한 세상의 실체를 오히려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는 “인생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세상은 정의로운 것도 아니”며 “인생은 악착같이 사는 것처럼 보여도/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것”(「할리우드 영화광」)이라는 통찰력과 맞닿아 있다.

 

한편 이번 시집에는 이전 시집들과는 다른 면이 눈에 띈다. 우선, 예전의 시와는 대조적으로 거의 모든 시에 마침표가 찍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시력 46년에 이른 시인이 오랜 습관을 묻어두고 무언가 시적 갱신을 꾀하고 있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또 하나, “뿔은 힘이 세다”(「뿔」), “가을은 사심이 없다”(「논물」), “나의 등은 나의 오래된 배후다”(「배후에 대하여」), “몸은 짐승이다”(「무제시초(無題詩抄)」), “시인들의 말은 뱀 같다”(「꿈의 해석」) 등 이상국 시인만의 발화가 두드러진다는 점이다. 발문을 쓴 정철훈 시인은 이러한 문장들이 “변화의 세월을 다 견딘 뒤의 선언적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시력 46년의 세월 동안 시인은 한결같은 시심을 간직한 채 “재바른 것을 멀리하고 허투루 붓을 놀리지 않으며”(안도현, 추천사) 묵묵히 시의 길을 걸어왔다. 시인은 “사람이 뭘 꼭 하자고 세상에 온 건 아니다”(「우환에게」)라고 말한다. 하지만 언제나 새로운 길을 열어왔던 시인은 “아직 정처가 없는”(「꿈의 해석」) 영혼을 달래가며 “올해도 낡고 오래된 시 공장을 돌”(「공장」)릴 것이다. “아직 오지 않은 나라와 안 살아본 생”(「늙은 처사의 노래」)이 있고, “나를 위해 아직 불지 않은 바람”(「우환에게」)도 있으니. 평생을 “말 따라 노래 따라” “바람처럼 낙타처럼” 세속의 공간을 떠돌며 “가내수공업인 시 공방(詩工房)의 주인”(「시 아저씨」)으로 살아온 그이야말로 천생의 시인일 테니. 그러니 “나는 시인이 아닌 이상국을 상상할 수 없고 이상국만큼 자신에게 딱 맞는 시의 옷을 입고 있는 시인을 알지 못한다”(발문)는 정철훈 시인의 말이 충분히 공감이 자아낸다.

추천사
  • 한양에서 동으로 사백리를 가면 속초가 있는데, 동해안의 물결이 발끝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백두대간이 북에서 남으로 치달리는 게 훤히 보이는 고을이다. 여기에 한 화공(畵工)이 산다. 일찍이 고아한 수묵담채에 남다른 내공이 있는 그를 화백(畵伯)으로 부르는 이도 있으나 그는 한사코 가내수공업으로 시를 생산하는 공방(工房)의 주인으로 산다 한다. 놀라운 것은 그가 붓을 들어 화폭을 채우면 그게 마치 문장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다저녁때 오는 눈을 그리면 운이 느껴지고, 늙은 보살이 혼자 저녁 자시는 걸 그리면 행과 연이 보이고, 동해북부선 철도를 그리면 그림 안에 세계가 떡하니 들어찬다. 이 신통한 기술은 오래전부터 그가 재바른 것을 멀리하고 허투루 붓을 놀리지 않으며 살아온 탓이다. 그의 화폭을 들여다보면 기승전결이 단정한 선비의 한시를 읽는 것 같다. 때로는 견결한 정신주의자의 면모가 엿보이기도 한다. 한가롭고 태평한 듯 보이지만 그의 심 사는 편치 않다. 배배 꼬인 현실이 슬프고 제 잇속을 챙기는 장사꾼이 싫은 것이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해 질 녘의 어스름한 허무와 벗들과 돼지껍데기 안주로 떠들며 소주를 마시는 일과 눈먼 멸치를 넣고 끓인 근댓국이다. 이즈음 서울과 일인칭에 시달리는 젊은 화공들은 닿지 못할 진창을 그는 진경으로 환원한다. “면(面)이 텅 빈 저녁으로/태평양이 문지방까지 차오르던 농협 숙직실에서/짜장면에 배갈을 마시던 물치.”(「물치」)라는 구절을 읽다가 먹먹해졌다면, 그리하여 물치항으로 당장 떠나고 싶다면 그에게 근접했다는 뜻이다. “아직 오지 않은 나라와 안 살아본 생”(「늙은 처사의 노래」)이 쉽게 오지 않는다는 걸 넌지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그에게.
    -안도현 시인

목차

1

누군가 있는 것 같다

오래된 일

밤길

유월의 이승

도반(道伴)

논물

누이 생각

오빠 생각

시 아저씨

배후에 대하여

나를 위한 변명

끝과 시작

 

2

북천에 두고 온 가을

심심하니까

장맛비가 내리던 저녁

물치

7번 국도

동해북부선

아름다운 풍속은 쉽게 없어지지 않는다

복날 생각 혹은 다리 밑

그리운 강낭콩

망연(茫然)

겨울 아야진

저녁 월리

다저녁때 내리는 눈

 

3

쓸데없는 하루

마스크와 보낸 한 철

역병이 도는 여름

하늘

귀를 위한 노래

부적의 노래

오늘 하루

마당의 풀을 뽑다

노변잡담

반지의 전설

동갑(同甲)의 노래

늙은 처사의 노래

신과 싸울 수는 없잖아

……라고 한다

임피리얼 팰리스 호텔 저녁 여섯시

할리우드 영화광

공장

천장지구(天長地久)

 

4

우환에게

개싸움

한동안 우울했네

아프리카 형수

수건에 대하여

노지백우(露地白牛)

무제시초(無題詩抄)

중생에 대하여

어느 청소 노동자에 대한 생각

국수 법문

미황사 생각

서천(西天)

별 이야기

누비옷을 입은 시인

꿈의 해석

 

발문|정철훈

시인의 말

수상정보
  • 제1회 백석문학상
  • 제9회 민족예술상
  • 제24회 정지용문학상
  • 제2회 박재삼문학상
  • 제19회 현대불교문학상
저자 소개
  • 이상국

    1946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났다. 1976년 『심상』에 「겨울 추상화」 등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동해별곡』 『내일로 가는 소』 『우리는 읍으로 간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뿔을 적시며』 『달은 아직 그 달이다』, 시선집 『국수가 먹고 싶다』, 문학자전 『국수』, 동시집 『땅콩은 방이 두 개다』 등이 있다. 백석문학상, 민족예술상, 정지용문학상, 박재삼문학상, 강원문화예술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어쩌다보니 생이 바람 든 무처럼 허술해지고 가까스로 시만 남았다. 서로 무능하고 미안한 일이다. 그래도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나라가 있고 그곳에서 나를 만나려고 줄을 서 기다리고 있는 말들을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시는 나에게 사물의 배후나 삶의 은밀한 거처가 되어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나는 늘 길 위에 있거나 말 속에 말을 숨길 줄 모른다. 그러다보니 나 자신도 가리기가 쉽지 않다. 여기저기 나무도 심고 집을 늘리고 싶다.
 

2021년 3월
미시령 아래서
이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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