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라단 가는 길

책 소개

「장마」의 작가 윤흥길(尹興吉)이 여섯번째 창작집 『소라단 가는 길』을 펴냈다. 작년에 회갑을 맞은 작가는 최근 16년 만에 창작집을 펴내고 다시 이번 연작소설집을 발표해 이순(耳順) 이후 무섭게 타오르는 창작열을 보여주고 있다.

 

윤흥길은 두말이 필요없는 한국 최고의 리얼리스트 중 한명이다. 윤흥길은 「장마」「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등에서 뛰어난 심리묘사와 캐릭터 설정으로 황석영과 함께 전후 한국문학의 대표적인 소설가로 평가받아왔다. 특히『소라단 가는 길』은 윤흥길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성과로 인정받고 있는 「장마」와 한짝을 이루는 연작소설로, 어린아이의 시점으로 전쟁의 인간성 파괴를 참신하게 그려내고 있어 주목된다.

 

 

 

『소라단 가는 길』은 이야기 돌리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환갑을 목전에 둔 초등학교 동기들이 고향에 모여 각자 겪은 전쟁의 체험을 아잇적 시점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비친 전쟁은 흔히 묘사되듯 끔찍하다거나 참혹하지만은 않다. 이 소설들에서 묘사되는 전쟁은 아이들이 “호젓헌 구석에서 즐긴”전쟁이며 그리하여 순진무구한 동심과 “발랑 까진 악동세계”가 공존하는 전쟁이다. 그리하여 전쟁소설이라는 외형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이야기보다는 익살 넘치고 눈물겨운 일화들로 가득 차 있다.

 

「농림핵교 방죽」은 그 발랑 까진 악동들의 세계를 가장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전쟁은 어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두의 심성을 피폐하게 만든다. 전장의 피냄새는 후방에까지 전염돼 아이들을 싸움질로 내몬다. 주인공 김지겸은 공부깨나 한다는 모범생이지만 결국 싸움질에 휘말려 갓 부임한 선생님에게 야단을 맞는다. 그후에도 이런저런 싸움질은 끊이질 않고 아이들은 방죽으로 떠밀려온 혼혈아의 시체에 돌을 던지기까지 한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쫓아내고 혼혈아의 시체를 방죽에서 안고 나오면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는다. 이렇듯 이 소설은 전쟁통에 황폐해진 사람들의 심성을 아이들의 관점에서 고발하면서 그것을 통해 전쟁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눈물과 각성을 끄집어낸다.

 

「묘지 근처」는 「장마」와 가장 유사한 구조를 가진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국군으로 전쟁에 나간 삼촌을 둔 화자 유만재는 「장마」에서 삼촌과 외삼촌 모두를 전쟁통에 잃어버리는 동만이를 떠올리게 한다. 유만재의 할머니는 전쟁에서 아들이 돌아오기 전까지는 죽기를 거부한다. 결국 삼촌은 상이군인이 돼 돌아오지만 할머니는 그의 귀환을 보지 못한 채 죽음을 맞고 만다. 이 소설에서 해토머리(봄)가 오기 전까지 죽지 않겠다는, 그래서 자신의 장례 때문에 가족들을 고생시키지 않겠다는 할머니의 말은 어쩌면 핑곗거리에 불과할 것이다. 이 말은 자식의 죽음을 연기해보고자 하는 할머니의 주술 같은 것이며, 그 주술은 「장마」에서 할머니의 집으로 기어들어와 자식의 환생을 암시했던 ‘구렁이’와 같은 것이다.

 

『소라단 가는 길』에는 이처럼 전쟁 상황을 고발한 소설들이 많지만, 전쟁을 혐오한 나머지 그것을 관념적으로 거부하는 경향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이 연작소설은 전쟁을 현실로 끌어안으며 그 피폐한 정황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끈질긴 인간 본성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전쟁중에 끔찍한 가족의 죽음을 보고 장님이 된 소녀가 화자인 나(최건호)의 도움으로 예배당의 종을 치고 소원을 빌 수 있게 됐다는 아름다운 이야기(「종탑 아래에서」), 나(이진원)를 귀여워해준 부잣집 누나를 좋아한 나머지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지만 ‘인민 세상’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그 초상화를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개비네 집」), 쓰리꾼 ‘역사’가 철인동 사창가에서 쫓겨온 창녀와 나눈 애틋한 사랑 이야기(「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전쟁고아 박충서가 누이가 가수가 됐는 줄 알고 상경했다가 실망을 안고 돌아오는 이야기(「소라단 가는 길」) 등은 전쟁 세대들만이 간직했던 소중한 기억들을 복원시키면서 읽는 이의 마음을 삶의 의지와 감동으로 가득 차게 해준다.

 

그 외에도 이념 때문에 상처받는 동심의 세계(「큰남바우 철둑」)라든가 전쟁통에 바보가 된 인간들의 슬픈 군상(「안압방 아자씨」), 전쟁에 동원되고 이용되는 사람들의 모습(「아이젠하워에게 보내는 멧돼지」) 등은 전쟁을 직접 체험해보지 못한 전후 세대들에게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이 연작소설에 쓰인 무수한 우리 말과 사투리들은 언어의 박람회장을 연상시키면서 말 공부의 소중한 자료로 이바지하고 있다.

 

평론가 정호웅(鄭毫雄)은 이 연작소설을 연민과 성장의 소설로 정의하면서 이 소설이 “전쟁에서 희생된 영혼들의 원한을 푸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의 원한으로 인해 생겨난 우주의 아픔, 부조화까지 바로잡는 힘”을 가졌다고 평가했다.

 

 

 

저자 윤흥길은 1942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고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한국문학작가상, 현대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21세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소설집으로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무지개는 언제 뜨는가』 『장마』 『꿈꾸는 자의 나성』 『낙원? 천사?』, 장편소설로 『묵시의 바다』 『에미』 『완장』 『낫』 『빛 가운데로 걸어가면』 등이 있다. 현재 한서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있다.

목차

귀향길
묘지 근처
농림핵교 방죽
큰남바우 철둑
안압방 아자씨
아이젠하워에게 보내는 멧돼지
개비네 집
소라단 가는 길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
종탑 아래에서
상경길

해설| 정호웅
작가의 말

수상정보
  • 2004년 제12회 대산문학상
저자 소개
  • 윤흥길

    1942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원광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회색 면류관의 계절」이 당선되어 등단한 뒤 유년기에 겪은 전쟁의 상처와 분단의 고통, 가난한 서민들의 생활 현실을 섬세한 필치로 묘사해왔다. 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된 우리 이웃들의 힘겨운 삶을 따뜻하게 형상화한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6•25로 빚어진 한 가정의 비극을 통해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화해를 그린 […]

0 reviews
리뷰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