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로자를 위하여

책 소개

1967년 『창작과비평』에 「투계」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한 중견작가 송영의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작가 송영은 1940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나 1963년 한국외국어대학 독일어과를 졸업했다. 1974년 창작집 『선생과 황태자』를 출간했고 이후 『지붕 위의 사진사』 『비탈길 저 끝방』, 장편 『또 하나의 도시』 『금지된 시간』 등 다수의 책을 펴냈으며 「친구」 「보행규칙 위반자」 등으로 1987년 제32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삶의 밑바닥을 꿰뚫는 안광을 번뜩이며 진솔한 체험, 세련된 묘사, 예리한 관찰력이 빛나는 작품들을 발표하여 한국 단편문학사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온 송영은 계간 『창작과비평』이 처음 배출한 작가이기도 하다. 이번 『발로자를 위하여』에 실린 작품들은 담박한 언어로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사람들의 범속한 삶의 진실을 인물들의 섬세한 심리적 움직임들과 함께 관통하는 매서운 직관을 보여준다.

 

이 소설집은 1995년부터 2003년까지 8년여간의 작품활동 성과를 담고 있으며 아홉편의 소설들로 구성되어 있다. “조금도 들떠 있는 곳이 없”는 침착한 화법을 보여주는 송영의 소설은 호흡이 차분하며 목소리가 낮고 단조로운 데 반해, 그 안에 담긴 삶의 세부적 진실들은 작가의 치밀하고 섬세한 시선을 통해 한껏 생동하고 있다.

 

 

 

표제작「발로자를 위하여」는 ‘발로자’라는 러시아 청년의 얘기를 빌려 전환기의 혼란상황에 처한 러시아 젊은이들의 모습을 침착하게 그려내고 있다. 화자가 본 러시아 사람들은 선량하고 소박한 ‘인간의 얼굴’을 한 사람들이었고 가난하고 불안정한 사회 속에서 흔들리면서도 자신들의 문화에 자긍심을 지닌 사람들이었다. 현실에서 객기를 부리거나 처한 어려움을 회피하지 않고 자기의 초라한 삶을 완강하게 사랑하는 인물 발로자, 그 실제 인물은 『당신들의 대한민국』『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를 쓴 ‘박노자’라고 한다. 작가의 말에서 송영은 발로자와의 “국적과 나이 차이를 뛰어넘은 이 우정은 내게 아주 소중하고 신선한 경험이었고 지금은 멋진 기억이 되었다”라고 밝히고 있다. 러시아의 현실적 상황과 인간의 선의를 과장 없이 그려낸 이 작품의 일독을 권한다.

 

 

 

작품집의 말미에 실린 「모슬 기행」은 십여년 전의 이라크 여행을 다루고 있다. 화자와 일행들은 이라크 여행중 ‘로라’라는 아름다운 여인을 만난다. 일행 가운데 화가 ‘김정’은 엉뚱한 언행으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이채로운 인물이다. 그는 이라크와 로라의 매력에 깊게 끌려서 이라크에 귀화하겠다는 꿈까지 품게 된다. 송영은「모슬 기행」(1995년 1월 발표당시 원제 「로라」)을 쓸 당시 덧붙은 ‘글쓴이의 말’에서

 

“바그다드 일간지 ‘알 줌부리아’ 신문기자가 작가의 일행더러 바그다드에 온 목적을 물었을 때 나는 입장이 난처했다. 싸담 후쎄인의 항미성전(抗美聖戰)을 격려하러 왔다고 말할 처지도 아니고 그냥 놀러 왔다고 할 수도 없었다. (…) 이라크의 매력에 관해 말한다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처음에는 긴 여행의 한 통과의례로 이라크를 거쳐갈 생각이었는데 이 나라를 떠날 때쯤 시간이 너무 모자라 무척 아쉬웠다. 이라크 국토 전체가 인류문명의 거대한 박물관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역사도, 축적된 문명의 배경도 없는 미국 같은 신흥 강국이 이 인류문명의 보고에 대해 미사일을 발사하고 마구 폭탄을 터뜨렸다는 것은 그 정치적 당위성이야 어떻든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와 회교의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후쎄인이 정당하다고 편들고 싶지는 않지만 이라크 경제의 목줄을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지고 있는 미국의 태도 역시 어쩐지 수상쩍고 불공평한 것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라크 현지에서 엉뚱하게 미국이란 공룡의 힘을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가 떠난 뒤 현지사정은 훨씬 악화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의약품 부족과 우유 등 생필품 부족으로 노인들과 아이들이 죽어간다는 보도도 있었다. 국제정치의 냉혹성을 다시 느낀다. 바그다드 항로가 다시 열리고 경제봉쇄가 풀려 이 나라의 순박한 사람들이 고통받지 않는 날이 빨리 와주기를 기원한다”라고 밝혔다. 이번 작품집의 작가의 말에서도 “문명의 진보와 선행에 관한 인간의 의지는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 것 같다”며 작금의 상황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중편「모슬 기행」의 행간에 담겨 있는 이라크의 아름다운 문화유산과 개성 있는 이라크 사람들의 생동하는 모습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참혹한 전쟁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은 가슴아픈 일일 것이다.

 

 

 

「천사는 어디 있나?」「성자의 그늘」「자비와 동정」「신뢰받는 인간」「고려인 니나」등의 작품에서 작가는 다양한 인간들의 평범한 삶 속에 감춰진 결정적 단면들을 침착하게 보여주고 있다. 어느 한군데 치우침 없이 깊이 갈무려진 호흡과 더욱 그윽해진 섬세한 문장으로 어우러진 송영의 단편들은 잔잔하고 차분한 문학적 감동이 날로 귀해져가는 요즘 세태에 소설의 묘미를 즐길 줄 아는 독자들에게 큰 기쁨이 될 것이다.

목차

발로자를 위하여
두 사람
천사는 어디 있나?
태어난 곳
신뢰받는 인간
자비와 동정
성자의 그늘
고려인 니나
모슬 기행
해설 / 채호석
작가의 말

수상정보
저자 소개
  • 송영

    宋榮. 1940년 전남 영광에서 태어나 한국외국어대 독일어과를 졸업했다. 1967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단편 「투계(鬪鷄)」를 발표하며 등단한 이후, 폐쇄된 공간에 갇힌 인물들의 삶과 의식에 대한 빈틈없는 묘사로 주목받았다. 작가의 체험이 녹아들어 있는 중편소설 「선생과 황태자」는 세계의 거대한 벽에 부딪혀 좌절한 인간의 내면을 섬세하게 그린 대표작이며, 그 밖에 「중앙선 기차」 「님께서 오시는 날」 「계절」 등이 있다. 음악산문집『무언의 로망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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