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련하게 펼쳐지는 시와 사람의 추억
고(故) 심호택 시인의 1주기에 맞추어 유고시집 『원수리 시편』이 출간되었다. 1991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빈자의 개」 등 8편을 발표하면서 마흔이 훨씬 넘은 늦은 나이에 등단한 심호택 시인은 첫시집 『하늘밥도둑』을 통해 질박하고 생명감 넘치는 대지적 상상력과 잃어버린 공동체의 유기적 삶을 환기하는 시편들로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원광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작품활동을 병행한 시인은 『최대의 풍경』 『미주리의 봄』 『자몽의 추억』 등의 시집을 펴냈으며, 다섯번째 시집을 준비하던 지난 2010년 1월 30일 새벽, 동료 교수의 상가에 문상을 다녀오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이번 유고시집 『원수리 시편』은 그가 준비하던 다섯번째 시집 원고에 미발표 유고를 더하여 한 권으로 묶은 것이다. 평소 시인과 절친했던 박경원 시인이 유고를 모으고 시집의 발문을 썼다.
그는 따뜻하고 맑은 눈길을 지닌 시인이었다. 사소한 경험이나 오래된 기억의 편린도 그의 섬세한 눈길이 닿으면 애틋하고 아련한 서정으로 되살아났으며, 그의 소박하며 잔잔한 어법은 한편으로 오늘의 메마른 현실을 환기하여 정겨우면서도 쓸쓸한 감흥을 일으켰다. 유년의 기억을 통해 5,60년대 농촌사회의 삶을 빼어나게 형상화한 첫시집 『하늘밥도둑』 이래 그가 펼쳐 보인 시세계를 많은 사람들이 각별하게 여겨온 것은 그러한 이유이다.
무엇보다 그의 시가 감동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의 시에는 어디에나 있는 보편적인 사람살이의 깊은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일상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갖가지 삶의 장면들을, 주변의 자연과 사물들을 늘 따뜻한 애정과 환한 웃음으로 감싸안았고, 그들을 자신의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 그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그럼으로써 그의 시는 삶과 사람과 시가 다르지 않은 따뜻한 한 세계를 이루어내었다.
그리고 그 세계의 밑바탕에는 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 마을의 사람들과 자연을 둘러싼 포근한 기억이 깔려 있다. 그의 시의 출발이 곧 그 시절의 아련한 추억을 시로 길어올리는 데서부터였으며, 그래서 그의 시에서는 늘 유년의 기억이 변치 않는 중심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후로 세 권의 시집을 거치면서, 시인은 이제 몸소 삶을 통해 자신의 시의 원천으로 귀향하고자 마음먹기에 이르렀던 듯 보인다. 2003년부터 그는 익산 원수리에 터를 잡고 지내면서 봄부터 겨울까지 시골에서의 한 해 동안의 생활을 시로 갈무리했는데, 시집 1부에 묶인 시편들이 그것이다.
시집 첫머리에 실린 시에서, 할머니에 얽힌 유년의 추억을 아련하게 환기한 새는 금세 멀리 사라지면서 ‘까마종이 두 알’ 같은 ‘글썽한 눈매’를 남긴다. 그곳이 그의 시가 다시 시작하는 지점인 셈이다. 고향이 아니면서 한편으로 또다른 고향인 그 시골 마을에는 여전히 따뜻하고 건강한 사람들의 인정과 구수한 해학이 살아 있다. 시인이 자신을 형님이라 부른다고 감격해 늘 자랑해 마지않는 나이 든 농부가 있고(「선생의 형님」), “적선하는 셈 치고/아자씨들 얼른 가셔야/아줌니들 세상 편해진다고” 입만 열면 주워섬기는 아낙이 있으며(「염불소리」), 경운기 사고로 병원에 입원하고도 여유작작한 영감이 있는 곳이다(「즐거운 입원」). 어쩌다 집에 흘러든 고양이를 먹이고 돌보며(「또다른 식구」) 밤새 먹을 것을 찾아 눈 쌓인 마당을 쏘다닌 쥐의 발자국을 내다보는(「밤손님」) 시인의 눈길 역시 한없이 선량하다. 꾸밈없는 듯 쉽고 편안하게 읽히면서도 생생한 비유와 재치를 품은 언어는 한층 농익은 화법을 느끼게 한다.
분망한 도시를 버리고 농촌에서 새로운 한 시절을 거치며 이제 ‘김장’과 ‘수도펌프’가 환기하는 생활의 세계에 안착한 시인은 이어지는 시편들에서 의식적으로 유년기의 기억을 다시 불러내 자신의 시작점으로 돌아가려는 지향을 분명히 드러낸다. 시인이 의도했던바 첫시집의 속편격이 되었을 3부의 시편들은 그러나 안타깝게도 온전한 한 권의 시집으로 엮이지 못하고 미완으로 남았다. 20년 가까운 시간을 사이에 두고 다시 되새기는 어린 시절의 기억이 오늘의 달라진 세월과 달라진 생활 속에서 얼마나 더 풍성하고 절실한 의미를 새길지 미처 온전히 확인할 길 없게 된 점은 『하늘밥도둑』의 세계를 뜻깊게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큰 아쉬움이다. 그가 남긴 시편들 속에서 더 순정하고 더 간절하게 빛나는 풍경들은 그래서 더 오랜 여운을 남기며 그를 기억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