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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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결핍의 세기에 울려퍼지는 연민의 기척

 

 

독특한 작품세계와 걸쭉한 입담으로 시와 소설을 넘나들며 활발한 창작활동을 해오고 있는 이대흠의 네번째 시집 『귀가 서럽다』가 출간되었다. 북에 백석이 있다면 남에는 이대흠이 있다는 찬사(고은, 추천사)를 받을 만큼 이번 시집은 정서의 안주처를 상실한 채 부유하는 이 시대의 모든 이들에게 커다란 감동과 희망을 선사한다.

「물속의 불」, ‘지나 공주’ 연작과 같은 실험적 서사시를 전면에 내세웠던 전작들과는 달리 이번 시집은 개인의 미시적 경험과 그에 따르는 소박한 서정성이 주를 이룬다. 그러나 이대흠의 시는 파편화된 인간을 첨예하게 해부하는 ‘개인적’ 서정과 궤를 달리한다. 그의 경험과 서정성은 보편적 현실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삶에 대한 희망과 따스함을 발견하는 것은 이대흠 시의 여전한 출발점이자 목표점이다.

 

 

삶은 빨래 너는데 // 치아 고른 당신의 미소 같은 // 햇살 오셨다 // 감잎처럼 순한 귀를 가진 // 당신 생각에 // 내 마음에 // 연둣물이 들었다 // 대숲과 솔숲은 // 막 빚은 공기를 듬뿍 주시고 // 찻잎 같은 새소리를 // 덤으로 주셨다 // 찻물이 붕어 눈알처럼 // 씌룽씌룽 끓고 // 당신이 가져다준 // 황차도 익었다 (「행복」 전문)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따스한 삶을 위해 이대흠이 천착하는 가치는 바로 향토적 정서이다. 가난하지만 서로 참견하고 손잡아주고, 살을 부대끼며 함께 살아갔던 고향에서의 삶이야말로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만이 가로놓여 있는 이 시대가 되새겨야 할 가치라는 사실을 그는 시집 곳곳에서 역설한다. 그러면서도 그의 시는 고향이나 향토 하면 흔히 떠올리는 회고적, 복고적 영역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층위를 지닌다.

우선 시집에는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어린 나를 등에 업어 다리를 건네준 ‘양산 이숙’이 있고, 예순 넘어 한글을 배운 ‘수문댁’이 있다. 남편 몰래 보리쌀을 놓고 가던 ‘물마장골 아짐’이나, 말뚝도 “땅을 달래감서 박아야” 한다는 ‘황영감’ 또한 금방이라도 시 속에서 뚜벅뚜벅 걸어나올 듯하다.

이렇듯 인물들에 완벽한 생동감을 구현하는 도구는 바로 사투리이다. 그의 시어에는 남도의 사투리가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마치 귓가에서 울리듯 생생히 되살아난다. 이는 시인 자신이 전남 장흥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 사투리가 지닌 애잔한 정서를 극대화하는 상황을 절묘하게 포착한 데서 가능해진 결과이다.

 

 

기사 양반! 저짝으로 조깐 돌아서 갑시다 / 어칳게 그런다요 뻐스가 머 택신지 아요? / 아따 늙은이가 물팍이 애링께 그라제 / 쓰잘데기 읎는 소리 하지 마시오 / 저번챀에 기사는 돌아가듬마는… / 그 기사가 미쳤능갑소 // 노인네가 갈수록 눈이 어둡당께 / 저번챀에도 / 내가 모셔다드렸는디 (「아름다운 위반」 전문)

 

 

이러한 향토의 서정이 수렴되는 또 하나의 표상은 다름아닌 ‘어머니’이다. “이 시집을 나의 어머니이자 우리의 어머니에게 바친다”는 「시인의 말」에서 드러나듯, 그에게 고향의 풍경, 인간미 가득한 삶을 오롯이 표상하는 존재가 어머니인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의미에 부합하듯 어머니를 다룬 시편들에는 절창으로 빛나는 장면들이 많이 엿보인다.

 

 

그럴 때면 나는 / 편지에는 계절 인사가 있어야 한다고 우겨댔는데 / 그러면 어머니는, // 속닥새가 우는 걸 봉께 밤이 짚었구나 / 샐팍에 있는 수국이 허뿍 펴부렀다 / 이러다가, // 그 까튼 거 물라고 쓴다냐 / 기냥 몸이나 안 아픈지 으짠지 고것이 더 중하제 / 느그는 성이 짠하도 안하냐? / 뙤약벹에서 내 자석이 피땀 흘려 번 돈을 / 호박씨 까묵대끼 톡톡 끼리고 있짱께 중치가 멕힐락 함마이잉 / 이참 월급도 다 써불고 / 느그 성 나오먼 통장이나 한나 줘사 쓸 것인디 / 에미 에비 있능 것이 도와주지도 못함서 / 하면서 이내 눈물 글썽이셨는데, // 이쯤 되면 나는 어머니가 했던 말을 마음대로 버무려 편지를 썼는데, (「오래된 편지」 부분)

 

 

시인이 어머니라는 존재와 그 삶을 상징화하는 단어는 ‘바닥’이다. “바다와 뻘을 바닥이라고 하는” 강진의 “바닥에서 태어난 어머니”는 “시집올 때 끄집고 온”, “당겨도 당겨도 무거워지기만 한 노동의 진창”(「바닥」)인 그 바닥에서 평생을 살고 자식들을 키워냈다. 하여 어머니의 바닥은 누추하고 절망적인 밑바닥이 아니라 꽃을 틔워내고 봄을 부르는 생명의 공간이다.

 

 

오랜만에 찾아간 외가 마을 바닥 / 뻘밭에 꼼지락거리는 것은 죄다 / 어머니 전기문의 활자들 아니겠는가 / 저 낮은 곳에서 온갖 것 다 받아들였으니 / 어찌 바닷물이 짜지 않을 수 있겠는가 // 봄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서 시작된다 (「바닥」 부분)
이상하게도 내 집에서는 죽어가던 풀 나무 들이 / 어머니의 손에 닿으면 금방 싱싱해졌다 / (…) / 어머니의 손에 무어 특별한 게 있을까 / 그 검고 갈라진 손을 오랫동안 살펴보았는데 / (…) / 어머니의 손에는 내 손에 없는 귀가 수백 개 / 수천 개 열려 있는 것이었다 (「어머니의 손바닥엔 천 개의 귀가 있다」 부분)

 

 

바닥은 인간 정서와 무의식의 깊은 심연, 소외된 이들의 가장 낮은 삶, 죽음의 자리 등 다양한 뜻을 함의한다. 시인이 사투리와 어머니의 삶을 노래하는 이유를 해명할 단서가 여기에 있다. 그는 이러한 제재를 비단 구수한 향토성을 구현하는 데 적합한 소재로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 느끼는 결핍과 외로움의 근원을 추적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주목하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시에서 메말라버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느끼는 근원적 고독을 엿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데, “변방적 삶”, “객지의 외로움”(엄경희, 해설「천 개의 검은 귀」)에서 파생하는 이러한 결핍과 고독은 하릴없는 그리움과 서러움을 야기한다.

 

 

강물은 이미 지나온 곳으로 가지 않나니 / 또 한 해가 갈 것 같은 시월쯤이면 / 문득 나는 눈시울이 붉어지네 / (…) / 국화꽃 그림자가 창에 어리고 / 향기는 번져 노을이 스네 / 꽃 같은 잎 같은 뿌리 같은 / 인연들을 생각하거니 // 귀가 서럽네 (「귀가 서럽다」 부분)

 

 

그리하여 결핍과 외로움으로 점철된 ‘귀가 서러운’ 시대와, 그럼에도 “서로의 아픈 데를 어루만져주며” “나란히 빈 몸으로 겨울을 맞고 싶”(「광양 여자 2」)은 사람들 간의 간극을 좁히기 위해 시인은 어머니와 고향 이웃의 목소리를 의식적으로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로써 시인의 “객지로 울려퍼지는 고향 사투리”(해설)는 향토성을 재해석하게 하는 동시에 숨가쁜 시대를 살고 있는 이들의 숨통을 틔워줄 보편의 서정시로서의 면모를 얻게 되는 것이다.

“속곳까지 후줄근히 물범벅이 된” 채 나락을 베는 한 많은 과부는 “염벵 씹벵 고두마리 씹벵 잠자리 눈꾸녁”(「하고댁」)을 일면 경쾌하게 노래하며 삶에의 투쟁을 계속하고, 어머니라는 말은 “나직이 발음해보면 / 입속에 잔잔한 물결이 일고 / 웅얼웅얼 생기는 파문을 따라 / 보고픔이나 그리움 같은 게 고요고요 번”지고 “성난 마음 녹이는 물의 숨결 들어 있고 / 모난 마음 다듬어주는 / 매운 파도의 외침”(「어머니라는 말」)을 갖는다. 이렇듯 고향의 어머니와 이웃들이야말로 그 자체로 이 시집의 주제이자 우리 삶의 주제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깨달음을 토대로 시인의 사유는 이제 그 자신이 어머니가 되고자 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시인은 세상의 가장 낮은 바닥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생명을 북돋는 어머니의 삶을 삶으로써 인간과 인간의 마음이 진실하게 통하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꿈꾸는 것이다.

 

 

천장 한쪽에서 둥둥 울리는 소리 / 어미 쥐가 새끼 쥐에게 조심하라고 주의를 주나보다 / (…) / 그러나 다시 시작되는 발소리 저것들 / 비 온 뒤 갓 자라난 달개비 뿌리처럼 여린 / 연분홍 발을 가졌을 것이다 / (…) / 어린것들이 / 발갛게 발이 얼어드는 걸 막으려고 / 저리 뛰는 것이리라 / 기침을 할 수도 없어 가만히 / 문 열고 나와 달을 본다 / 어린 내 새끼들 (「쥐와의 동거」 부분)
휘어지며 늘어나는 물의 주름을 보며 / 삶이 고달파 울 일 있다면 그 울음은 / 끄덕이며 끄덕이며 생기는 / 저 물낯의 주름 같은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네 (「주름」 부분)

 

 

무수한 시의 홍수를 보며 누군가는 “그 까튼 거 물라고 쓴다냐”(「오래된 편지」)고 물을지 모른다.“모굿대랑 피마자잎이랑 호박잎이랑 / 비 온 뒤 그것들 데쳐서 곤자리젓에 매운 고추 버성버성 썰어넣어 식은 밥 한 뎅이 싸서 함뽕 했을 때처럼 / 혀가 살아 징그랍게 맛나“(「묘(妙)」)는 훈훈한 삶과 조우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시인이 시를 쓰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이다.

목차

제1부

고매(古梅)에 취하다
비가 오신다
애월(涯月)에서
열이 오르다
낯익은 빗방울
나무의 영혼
옥수수 곁으로
시간의 뿌리
비 그친 사이
바람에 날리는 물고기들
비빔밥
늦봄
물무늬 손바닥
불온한 내력
곰소에서
염소떼가 달려간다
천년 동안의 사랑
젖몸살

제2부
물의 길
어머니의 꽃밭
바닥
비몸살
어머니의 봉다리
어머니의 손바닥엔 천 개의 귀가 있다
오래된 편지
젓갈
소쩍새
울 엄니
어머니라는 말
밥과 쓰레기
주름
어머니의 나라
젖 감전
어머니

제3부
꽃섬
귀가 서럽다
쥐엄나무 그늘에 앉은 아버지
동낭치 부자
아우
대나무
아름다운 거짓말
나이 드신 아이님이 말씀하시길
덕담
쥐와의 동거
하고댁
양산 이숙
아름다운 위반
명자꽃 보면
수문 양반 왕자지
황 영감의 말뚝론
달팽이
손금
룽에게
외출
봄비는 생각이 많다

제4부
나는 꽃을 아네
외꽃 피었다
달몸살
내게 사랑이 있다면
꽃 지네요
묘(妙)
도화의 말을 적다
행복
복송꽃
별의 문장
개구리 울음소리
광양 여자 1
광양 여자 2
오르드르
슬픔의 씨
한라수목원에서
윗세오름 가는 길
그러니 어찌할거나 마음이여
사계리 발자국 화석
남천

해설│엄경희
시인의 말

수상정보
저자 소개
  • 이대흠

    李戴欠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서울예술대학과 조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1994년 『창작과비평』에 「제암산을 본다」 외 6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 시집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상처가 나를 살린다』 『물속의 불』과 산문집 『그리운 사람은 기차를 타고 온다』 『이름만 이삐먼 머한다요』, 장편소설 『청앵』 등이 있다. 현대시 동인상, 애지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시힘’ 동인으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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