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계를 향한 문학의 행보
‘사소한 이야기’에 깃든 공공의 삶을 들여다보다
1996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래 지금껏 우리 비평계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쳐온 평론가 중 한명으로 손꼽히는 백지연의 신작 평론집 『사소한 이야기의 자유』가 출간되었다. 2001년에 발간한 첫 평론집 『미로 속을 질주하는 문학』 이후 무려 17년 만에 선보이는 두번째 평론집이다.
평론계·문단의 중추 역할을 지속해왔음에도 새 평론집이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은 일견 의외로 느껴지지만, 그만큼 저자의 무게감 있는 행보에 신뢰감이 더해지는 면모이기도 하다. 저자는 그간 발표한 수많은 글 중에서 일정한 주제의식을 관통하는 원고를 추려 이 한권의 책을 꾸렸다. 문학과 공공성의 관계, 페미니즘 문학의 지향, 장편소설의 더 큰 가능성, 좋은 이야기의 다양한 양상 등이 그것인바, 진중하고도 사려 깊은 문제의식이 꾸준히 유지되어온 한편으로 늘 당대의 사회현실과 접합해 사유의 갱신을 게을리하지 않음으로 인해 개별 글에도 평론집 전체에도 현재성이 충실히 담겨 있다. 백신애 김승옥 박완서에서부터 신경숙 공선옥 한강 김애란 김려령 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가가 호명됨은 물론 다양한 비평 담론의 사례들이 재조명되는 등 분석 대상으로 삼은 텍스트가 종횡무진하다는 것 또한 이 책의 특장이다.
저자는 촛불광장의 시간을 통과하면서 많은 이들에게 새로운 삶의 국면이 열리게 되었고, 자연스레 문학과 비평의 자리에 대해서도 “새로운 감수성과 시야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세차게 일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평은 ‘좋은 이야기’가 갖는 “해방적 힘”을 읽어내야 할 소임을 가졌다는 자각, 그리고 비평의 개방성과 설득력은 “사소한 이야기 속에 깃들어 있는 자유로움을 잊지 않는 데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마음자세가 이 평론집의 뿌리라 할 수 있다.
우리 소설 및 작가들에 대한 따스한 애정,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비평의 역할이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 문학을 통해 현실을 들여다보고 현실 속에서 문학을 논함으로써 더 나은 세계를 상상하려는 꿈. 바로 이런 점들이 지금껏 그의 평론을 문단·독자들과 호흡하게 만든 힘이었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소한 이야기의 자유』는 우리 문학에 새로운 활력이 크고 작게 항상 존재해왔음을 증거하는 동시에 앞으로도 또다른 무언가가 도래할 것이라는 희망을 예감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사소한 이야기의 자유’는 지난해 쓴 짧은 글 중에서 마음에 오래 머물렀던 어구이다. 발터 벤야민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의 단순하고 소박한 힘이 ‘인간 내부의 순수한 개방성’에 있다고 말하였다. 아무리 사소한 이야기일망정 그것을 표현하는 데 얼마나 많은 자유로움이 필요한지 모른다고 강조하는 그의 전언이 깊게 와닿는다. 공동체에 전해지는 이야기의 고유한 힘과 지혜의 전승을 강조하는 이 대목은 한편의 좋은 이야기를 꾸리기 위해 거쳐야 하는 지난한 시간을 환기한다. 눈 밝은 작가는 일상에 스민 관계들의 복잡한 그물망을 놓치지 않는다. 감동을 주는 작품이 이겨내는 수많은 편견과 통념, 그리고 그것이 불러오는 해방의 힘은 독자를 늘 매료시킨다. 비평이야말로 이러한 이야기의 해방적 힘을 이루는 분투의 상상력을 읽어내야 할 소임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비평의 개방성과 설득력은 사소한 이야기 속에 깃들어 있는 자유로움을 잊지 않는 데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머리에’ 중에서
삶의 현장에서 터져 나오는 절박한 기록들,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는 예리한 시선, 미래를 향한 강한 소망 등이 개인의 일상적 삶 속에 차곡차곡 쌓이는 과정을 통해 문학은 더 나은 세계를 향한 무수한 질문과 탐색을 계속해간다. 문학이 미래를 성찰한다는 것은 선명하게 완성된 그림을 예언하는 일이 아니다. 문학적 전망의 의미 역시 막연하게 살고 싶은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살고 있는 세계가 은폐하거나 잃어버린 삶의 귀중한 조각이 무엇인지 탐색하는 데서 만들어진다.
―본문(「‘가능한 미래’를 성찰하는 문학」) 중에서
세부 소개
제1부 한국문학과 공공성의 성찰
1부에서는 공공성, 민주주의, 공동체와 소통 등의 키워드를 통해 2000년대 이후 문학의 특징을 살펴본다. 「타자의 인식과 공공성의 성찰」은 배수아 공선옥 전성태의 작품을 중심으로 소수자와 이방인의 서사를 살피면서 타자의 문제를 고찰한다. 「공동체와 소통의 상상력」은 권여선 윤성희 김미월의 작품 속에서 공동체라는 범주 안에 존재하는 관계들의 차이를 직시하는 가운데 소통의 새로운 지점이 열릴 수 있음을 역설한다. 「한국문학과 민주주의, 평등의 의미를 돌아보다」에서는 르뽀 문학과 황정은 조해진 소설을 통해 삶의 터전을 빼앗긴 사람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가시화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가능한 미래’를 성찰하는 문학: 한국소설에서의 ‘전망’ 문제」의 메시지도 긴요하다. 홍희담의 「깃발」과 신경숙의 「외딴 방」에 대한 비평을 토대로 끌어낸바, “‘미래에 대한 성찰이 없다면 현실의 체제를 벗어나 좀더 나은 세계로 갈 수 있는 가능성도 사라지게 된다”는 주장이다. 「비평의 질문은 어떻게 귀환하는가」는 근년의 표절 논란을 계기로 90년대 문학에 대한 주류적 비평 담론을 검토하면서 비평의 말들이 그동안 어떻게 옮겨지고 해석되었는가를 다시금 차분히 살펴봐야 한다는 과제를 제시한다.
제2부 페미니즘과 공공의 삶, 그리고 문학
2부는 저자가 오랫동안 관심을 기울여온 주제이자 최근 우리 문학에 다시금 큰 영향을 끼치고 있는 페미니즘이 핵심 화두이다. 「페미니즘 비평과 ‘혐오’를 읽는 방식」은 여성혐오의 문제가 대두되면서 문학사를 다시 읽는 작업이 활발한 지금 상황에서 김승옥의 작품세계에 좀더 세심하게 접근하는 한편 김애란의 최근 단편을 통해 혐오 현상에 의미있게 접근하는 소설의 새로운 방식을 모색한다. 「페미니즘과 공공의 삶, 그리고 문학」은 박완서 황정은 한강 소설의 사례를 바탕으로 차별과 폭력의 문제 앞에서 과잉담론화와 텍스트주의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어떻게 공공의 문제로 형상화할지 실마리를 찾는다. 「시간 속을 여행하는 어머니」에서는 봉준호의 영화 「마더」를 모성서사의 관점에서 정치하게 분석한다. 문학을 넘어 문화비평 영역에서도 뛰어난 식견이 발휘된 글이다. 「낭만적 사랑은 어떻게 부정되는가」는 이만교와 정이현의 소설을 중심으로 결혼제도와 소비욕망 속에서 포착되는 불안한 삶을 짚어내며, 「페넬로페의 복화술」은 공선옥 천운영 윤성희의 작품을 놓고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여성들의 목소리, 여성의 글쓰기를 대별한 글이다. 「예술적 구원과 자아 발견의 여정」에서는 칠팔십년대에 특히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쳐온 강석경의 소설세계를 말한다. 여성의 존재를 구속하는 각종 구조 속에서 방황하거나 그것을 초월하고자 하는 여성인물들이 꼼꼼하게 다루어진다. 「식민지 현실과 모성의 재현 양상」과 「도시의 거울에 갇힌 나르키소스」는 각각 백신애와 김승옥에 대한 작가론이다. 각자 1930년대와 1960년대를 풍미한 이들 작가는 성별만큼이나 작품세계의 차이도 뚜렷한바, 두 글은 양자에 대한 풍성한 해석을 전달해줌과 더불어 특히 당대 현실 아래 여성의 존재가 어떻게 가시화되거나 왜곡되는지를 분석함으로써 이른바 문학사 다시 쓰기의 균형 잡힌 사례로 주목할 만하다.
제3부 장편소설의 현재와 가능성
2007년 계간 『창작과비평』 여름호 특집 ‘한국 장편소설의 미래를 열자’가 새 시대 장편소설의 과제와 가능성을 제기한 이래 장편소설론을 둘러싼 비평적 논쟁이 수년간 활발하게 이어진 바 있다. 3부에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씌어진 3편의 글, 그리고 문제의식이 맞닿는 이전 글 1편을 묶었다. 「장편소설의 현재와 가족서사의 가능성」은 천명관 김이설 최진영의 장편을 주 텍스트로 삼아 특히 가족이라는 제도적 틀을 각기 개성적으로 비판하고 돌파해내려는 우리 소설의 모험을 격려한다. 「장편소설의 곤경과 활로」는 청소년소설로 먼저 주목받은 김려령과 구병모의 작품을 사례로, 관습적인 서사에 섞여들면서 동시에 그 경계를 확장하고자 하는 장편의 가능성과 유의점을 두루 짚는다. 「역사를 호명하는 장편소설」은 광주항쟁을 탁월하게 작품화한 공선옥의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와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중심으로 한 평문이다. 역사적 체험을 문학화한다는 것, 그리고 “현재의 장막을 걷어 그 너머의 역사적 지평을 상상하”는 것의 중차대함을 역설한다. 「역사적 사실과 문학적 진실의 경계」는 『황진이』로 만해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한 북한작가 홍석중의 『높새바람』을 집중적으로 논한다. 장편역사소설이 구현해낼 수 있는 요소들을 모색하는 데 실마리가 되는 한편 잘 알려지지 않은 북한소설을 소개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제4부 이야기의 미래
마지막 4부에는 그간 써온 계간평과 개별 작품론 중에서 가려 실은 글들이 담겨 있다. 「사라진 ‘아비’와 글쓰기의 기원」 「망각과 기억의 사이」 「성장서사와 균열의 상상력」 「전도된 시선의 비밀」 「도시의 꿈과 기억, 그리고 어떤 만남」 「‘세계의 끝’에서 시작되는 이야기의 모험」이 그것으로, 각각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다양한 주제가 망라되어 있다. 구효서 김애란 심윤경 이기호 박민규 임철우 최인석 정지아 은희경 하성란 전성태 김중혁 강영숙 윤이형 등 많은 작가들의 개성적인 작품세계를 애정 어린 눈으로 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