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

책 소개

따뜻함은 흘러가 태양을 떠오르게 한다

낮은 영혼 곁에 오래도록 머물 섬세한 시편들

 

올해로 등단 28년을 맞은 박라연 시인의 여덟번째 시집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가 출간되었다. 시인은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지상의 슬픔을 특유의 따뜻함과 섬세함으로 보듬으며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삶의 세목을 두루 보여준 『노랑나비로 번지는 오후』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은 총 6부로 나눈 66편의 시를 묶었으며, “세상사 고달픔 속에 한 세월 무르익은 오늘의 기품”(김사인 추천사)을 보여주며 용서와 죽음을 받아들이는 시인의 품이 더 넓어졌음을 증명한다. 세상을 거두는 일에 대한 긍지를 보여주는 시인만의 성실하고도 다정한 태도는 “옆의 세계”로 확장되어, 오래된 영혼들 곁에 낮게 머문다. 그리고 종내에 시를 읽는 이들의 “옆자리”(「옆구리」)에 서린 눈물마저 어루만진다.

 

 

“위로의 빛은 어디서 오나”

패자와 잊힌 것들의 공동체에 닿아 있는 다감한 시선

 

문학평론가 김종훈은 해설에서 “타인의 고통을 덜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늘리는 것이 그에게는 ‘진화’이다”라고 말하며, 폐허처럼 변한 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을 일컬어 ‘천사의 시선’이라 명명한다. 작은 불씨 같은 시인의 시선은 일상과 불안, 삶과 죽음 등에 번갈아 충돌하며 불꽃을 틔우고 불길을 이어나간다. 시인의 내면을 넘어 일은 불길은 공동체와 만나게 되는데, 이 만남의 방식은 ‘화엄’이라는 장엄보다는 ‘화음’이라는 화합에 가깝다. 마치 “불우가 죄 없는 세계의 절반을 점거”(「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하는 것처럼, 혹은 “당신이 어디쯤 저물어가듯 호주머니 속 오래된 실패들이 어디쯤 저물어”가는 것처럼.

박라연의 이번 시집에는 서정시의 전통적 방식인 ‘투사’와 시인만의 독특한 시적 방법론인 ‘직접 발화’가 뒤섞여 있다. 구별 없음의 자유로운 시 정신과 다채로운 언어의 힘으로 시인은 개인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슬픔이라는 근원과 아픔이라는 구체를 동시에 살피고 톺는다. 아슬아슬한 외길이면서도 동시에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행보 덕분에 시편들은 절제와 직설이라는 미학을, 시인은 비관의 직관이라는 정신을 역설적으로 만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도 박라연의 시는 현재 진행형이다. 시인은 세계의 양면을 동시에 바라보는 일에 여전히 몰두하며 스스로 넓어지고 있다. 숱한 존재의 내면과 외연은 드넓은 시의 들판에서 언어로 깃들고 리듬으로 머물며 시인과 함께 “제법 긴 이름으로 살아”(「즐거운 진화」)가리라.

 

추천사
  • 박라연의 등단작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를 따뜻하게 기억하는 독자들이라면, 그 신혼의 공주가 30년의 세월과 더불어 어떤 모습이 되었는지 이번 시집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철부지 시절의 천진난만도 사랑스럽지만, 세상사 고달픔 속에 한 세월 무르익은 오늘의 기품만 하리오. 법력은 높아져 때로 시간의 “귀싸대기”를 쳐서 “죽은 시간”(「무례한 치료」)을 살려내고, 희망의 ‘보들보들함’에 닿을 만큼 눈과 귀는 더 밝아졌으니.
    앙앙불락의 나날들을 건너 이제 고요와 화엄과 “옆자리”(「옆구리」)에까지 눈이 열린, 잘 나이 드신 한 ‘평강공주’를 뵙는 듯하다.
    김사인 시인

목차

제1부 나부끼며 가는 세계

아름다운 너무나

집밥 한끼

나부끼며 가는 세계 1

옆구리

봉지

그는 따뜻한 오버랩이다

달래주려면 당신처럼

하루

헤어진 이름이 태양을 낳았다

물론

 

제2부 즐거운 진화

여러분의 오십가지 그림자

종잇장 오후

실패가 실패의 품에서

내 마음에 들어오지 마세요

즐거운 진화

휠체어에 오늘을

자라나는 선물

너만의 산책

김광석과 니체는

피칭머신

 

제3부 화음을 어떻게든

나부끼며 가는 세계 2

지붕을 선물받았어요!

무례한 치료

흘러 흘러서

보들보들한 희망이란

디엔에이

너에게도 남향이

칫솔질

그렇게 다시

딜레마

화음을 어떻게든

 

수상정보
  • 2008년 제3회 윤동주상 문학 부문 대상
  • 2010년 제42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
  • 2010년 제5회 박두진문학상
저자 소개
  • 박라연

    1951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199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서울에 사는 평강공주』 『생밤 까주는 사람』 『너에게 세들어 사는 동안』 『공중 속의 내 정원』 『우주 돌아가셨다』 『빛의 사서함』 『노랑나비로 번지는 오후』 등이 있다. 윤동주상 문학 부문 대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박두진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여전히 시가 너의 종교니? 그럼 한번 먹어봐! 이 두려움,
이 고통, 이 혼란을……
 
속수무책, 그 세월이 폐가와 무덤의 수가 사람의 수보다
점점 많아지는 산골마을로 나를 이사시켰을까?
 
눈만 뜨면 망치질하고 토라진 땅을 삽질하고 호미질을 했다.
공포영화 찍기에 딱 맞는 곳이라며 울면서 말리던 내 동생
명희의 우려는 꽃의 천지로 바뀌기 시작했다.
 
폐가의 벽을 뚫고 또 뚫어 창을 내었다. 그 창으로 들어온
풍경은 고스란히 나의 내면이 되었다.
 
가스 연결 구멍 그 작은 틈새에 딱새가 새끼를
일곱마리나 낳았다. 수십마리의 대왕호랑나비들이 날마다
날아들었다. 어떤 날은 무려 칠십여마리가 날아와
황화코스모스 천지의 언덕에 미래의 내 행운을 수놓을 것처럼.
 
제가요! 오래 버려진 시간들을 그러니까 희로애락이 다시 숨
쉬는 곳으로 바꾸어놓았습니다. 이제 그 상으로
저,라는 밭에 시를 뿌려주세요! 하는 독백이 창고에 쌓여갔다.
 
그래서 이번 시집은 누가 불러준 말을 받아 적었다고 말해야
옳다. 폐가에 터를 잡은 나, 나를 찾아오고 떠나가는
순간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무의식까지 동원해서 받아 적은 노트다.
 
출간 기회를 준 창비와 내 시의 흠결들을 매의 눈으로 찾아내어
더 단단하게 해준 박준 시인과 박지영 선생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영혼의 분리수거함에서 나를 건져 올려주신 장덕순 목사님과
강순희 사모와 마루와 마당을 선물해준 제자 최환엽과
어은당 식구들의 배려 또한 눈물겹다. 나는 겨우
한방울의 이슬이니! 이쯤에서 나에게 물어주시라!
 
너는 무슨 힘으로 이 세상을 사느냐고.
그럼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힘으로 산다고 대답할 테니……
 
99세의 시어머님을 삼십칠년이나 모신 김명자와 그녀의 남편 송봉의는
내가 받아 적는 시다. 사람 공기다.
 
2018년 봄
박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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