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책 소개

이제는 가만히 침묵에 물 줄 시간

 

‘절벽’이 되어버린 세계에서 삶을 고통을 가누는 고독한 시정신

 

누에고치 삶은 물 속에선/언제나/나비 날개 냄새가 난다//단 한줄도 없이/시(「흔적」 전문)

 

1998년 『현대문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한 지 20년을 맞이한 김경후 시인의 세번째 시집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이 출간되었다. 등단 이래 줄곧 뜨겁고 개성있는 시세계를 선보였던 시인은 지난해 현대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새롭게 주목을 받았다. 상실의 아픔을 간절한 언어로 노래한 두번째 시집 『열두겹의 자정』(문학동네 2012)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이 시집에서 시인은 어둠과 죽음의 그늘 속에서 삶의 고통을 가누는 고독한 시정신을 보여준다. 세상을 바라보는 차가운 통찰이 깃든 자유롭고 활달한 이미지 속에 “그로테스크와 서정이, 유머와 불온이, 추와 미가 행복하게 혼숙하고 있”(손택수, 추천사)는 절박하면서도 절제된 시편들이 애잔한 슬픔과 뭉클한 공감을 자아낸다. 2016년 현대문학상 수상작 「잉어가죽 구두」 외 5편을 포함하여 55편의 시를 4부로 나누어 실었다.

 

너덜대는 붉은 가슴지느러미/수억년 동안 끝나지 않는/오늘이란 비늘/떨어뜨리는/노을/아래/기우뚱/여자는 한쪽 발을 벗은 채/깨진 보도블록 틈에 박힌 구두굽을 잡고 쪼그려 있다(「잉어가죽 구두」 전문)

 

김경후의 시는 아프고 쓸쓸하다. 부재와 소멸과 상실로 삶이 ‘절벽’이 되어버린 세계에서“침묵에 들러붙어”(「박쥐난이 있는 방」) 살아가는 존재들의 비탄에 잠긴 목소리가 가슴에 사무친다. “세상 모든 정오들로 만든 암캐”의 처절한 죽음을 목격한 이후 “마음에 없는 말과, 말 없는 마음”을 갖게 된 시인은 “뱃가죽이 찢어지는 소리로 울 수 있었다”(「해바라기」)고 말한다. “무너진 뼈, 찢겨나간 꿈들”이 쌓인 “폐허 속”(「폼페이 벌레」) 침묵의 세계, “뭘 써도/아무것도 쓰지 않은/텅 빈 밤”(「아귀」)이 되는 세계에서 시인은 “바벨탑보다 높은 내/안의 외벽”과 “내벽”을 돌며 “텅 빈 입으로 적막을/물고”(「절벽아파트」)서, “아직 한 음도 낸 적 없는” 심해어와 “이미 잃어버린 말”을 “상상”(「심해어」)하며 실존의 시 쓰기를 멈추지 않는다.

추천사
  • 시는 지금 「야간 도로 공사」 중이다. “오랫동안 짓밟힐 길을 깔기 위해/오랫동안 짓밟힌 길을 파”내는 일에 여념이 없다. 소통의 강박으로 밤을 잃어버린 이 시대에 “깨진 보도블록 틈에 박힌 구두굽을 잡고 쪼그”(「잉어가죽 구두」)린 난감한 자세로 “아직 한 음도 낸 적 없는/심해어를 상상”(「심해어」)하는 시인이 있다. 김경후에게 고독은 스스로를 겹겹이 걸어잠근 꽃망울과 같아서 침묵의 충만 속에서 세계를 향해 터지는 섬광이 된다. 또한 죽음의 기억은 일상의 말들이 지닌 더께를 벗겨내거나 사물의 질서를 미결정의 두근거리는 태동 속에 있게 한다. 무엇보다 이 시인에게 여백은 의미에 확고하게 붙들린 말들을 소리의 궤도를 따라 운행하는 별자리가 되게 한다. 그리하여 백지 한장 속에 측정이 불가한 심해와 깎아지른 “철벽 길”의 해발이 동시에 머물게 된다. 높이도 깊이도 없이 직립한 평면의 매혹 속에 그로테스크와 서정이, 유머와 불온이, 추와 미가 행복하게 혼숙하고 있다. 절벽 끝의 노래는 절박하지만 또 얼마나 절제되어 있는지. 백치처럼 「속수무책」으로 백지의 매혹을 읽는다.
    손택수 시인

목차

제1부
입술
절벽아파트
박쥐난이 있는 방
반딧불이
해바라기
불새처럼
룹알할리 사막지렁이의 질주
야간 도로 공사
잉어가죽 구두
심해어
깃털 베개의 말씀
먹감나무 옷장

 

제2부
폼페이벌레
수렵시대
오르간파이프선인장
카니발식 사랑
오늘도 기다리다
침대

개미지옥
아귀
해바라기 소리
뱀의 허물로 만든 달
속수무책
빈 병 저글러
절벽아파트―주소

수상정보
저자 소개
  • 김경후
    김경후

    1998년 『현대문학』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 등을 냈고, 청소년소설 『괴테, 악마와 내기를 하다』, 과학 그림책 『살았니? 죽었니? 살았다!』 등을 썼다.

오르간 건반이
흐르는 구름에 하듯
말을 겁니다.

아무 말 없이
아무 쓸모없이
말을 겁니다.

파이프의 전부였지만 아무것도 아닌
속삭임처럼
연기처럼
말을 걸고 싶습니다.

나에게서 당신에게
당신에게서 나에게

간결하게 간절하게
백지보다 고요하게

말을
겁니다.

2017년 7월
김경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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