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잔혹사

책 소개

19876월항쟁 30주년, 그날의 기억

그리고 현대사 곳곳에 남은 우리들의 기록들

 

박종철의 동기들이 쉰 살 언저리쯤 되었을 때 세월호가 물에 가라앉았고, 그들의 아들딸 나이쯤 되는 고등학생 아이들이 물속에 잠겼다. 유족들은 보상보다도 진실을 규명하라고 요구한다. 그때도 지금도 외면하기 어려운 진실이 놓여 있다.

6월항쟁 30주년을 앞둔 시점에 대학생으로 현장에 있었던 역사학자 홍석률이 가시밭길 민주주의 여정을 당대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책 『민주주의 잔혹사』를 선보인다. 그러나 그 초점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한국현대사 이면에 감춰져 있는 것들에 맞춰져 있다. 저자는 6월항쟁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해방 후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민주주의라는 대의에 가려져 있던 수많은 역사의 가능성을 세세하게 복원했다. 이 책은 민주주의라는 대의를 위해 희생된 이들에 대한 기록이라는 의미를 넘어 미처 꽃피우지 못했던 그들의 삶, 그리고 역사의 수많은 우연에 기꺼이 녹아든 할머니, 여성노동자, 도시빈민 등 이름없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사건은 단순히 역사 속의 중요한 일 또는 관심을 끄는 일이라는 차원이 아니다. 역사의 다양한 갈림길 또는 전환점으로 작용한 8가지 사건을 통해 한국현대사를 관통하는 주제인 민주주의의 기억을 되살린다. 사건을 중심에 둔 만큼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구체성이다. 단일한 사건을 관련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치밀하게 구성하고, 이를 통해 당대의 구조를 파악하고 한국현대사의 큰 줄기를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장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인물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고, 일간지를 비롯한 관련 기록이 일 단위로 쌓여 있음에도 지금까지 제대로 다뤄지지 못했던 한국현대사를 다큐멘터리처럼, 드라마처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목차

1장 우연과 우연의 연쇄반응

: 박종철과 6월항쟁

 

2장 차라리 재판을 받게 해달라

: 박영두와 삼청교육대

 

3장 똥과 지식

: 여성노동자와 동일방직 사건

 

4장 북미관계의 이상한 기원

: 책임지는 정부와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5장 승리자의 역사만 남다

: 가난한 장교와 5·16쿠데타

 

6장 기록에서 지워지는 여성들

: 마산 할머니와 4월혁명

 

71951년 겨울, 소정골 사람들

: 학살된 민간인과 한국전쟁

 

8장 피 흘리는 젊음

: 돌아온 학병들과 학병동맹 사건

수상정보
저자 소개
  • 홍석률

    1965년 춘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동 대학원에서 한국현대사를 공부했다. 현재 성신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냉전학회 연구이사, 한국사연구회 연구이사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남북관계사, 한미관계사 등 한반도 냉전사가 주된 연구 분야이다. 4월혁명, 5·16쿠데타, 푸에블로호 사건, 판문점 도끼 살해 사건 등을 연구하고, 대학에서 ‘사건으로 읽는 한국사’ ‘역사로 읽는 현실’ 등 교양과목을 맡아 강의하면서 사건사 서술에 관심을 갖게 […]

풍부한 역사를 위하여

일반 대중은 사회적으로 절대다수이고,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도 무시하지 못할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역사에 기록되지도, 잘 기억되지도 않는다. 특히 여성들의 이야기는 더욱 그러하다. 이 책에서는 역사의 그늘에 가려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드러내고자 했다. 한국현대사 서술에서 가려진 사람들과 희생된 역사적 가능성에 주목하여 일종의 사건사 서술을 시도했다. 도시빈민 박영두, 동일방직의 여성노동자들, 마산의 할머니들 등 일반적인 역사 서술에서 배제되어온 주변부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보려 노력했다.
민주주의는 모든 시민들이 정치에 참여하고 통치의 주체가 되는 사회를 지향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세계 많은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정치체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에서도 엘리트들이나 유명한 사람들만 주로 부각되고,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은 선거 때를 제외하고는 잘 보이지 않는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의 역할과 행동이 여전히 부차화, 주변화되는 것은 현재 민주주의의 가장 잔혹한 측면이다. 즉 ‘민주주의 잔혹사’라 할 때 이는 한국현대사에서 민주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인권탄압, 국가폭력 등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 혹은 희생된 사람들이 여전히 가려지고, 역사에 잘 기록되지 않는 것 역시 잔혹한 일이라 생각한다.
6월항쟁 때의 박종철, 한국전쟁기 외공리 학살 사건의 희생자들, 해방 직후 돌아온 학병동맹원들은 지식인들로서 엘리트가 될 가능성이 더 큰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주류 집단과 다른 이념적 입장과 시각을 가졌기 때문에 역사 속에서 사라진 사람들이다. 또한 대부분 아주 젊은 사람들로서 자기 삶의 가능성을 제대로 실현해보지도 못하고 희생된 존재들이다. 5·16쿠데타와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등이 민주주의 잔혹사로 다뤄진 것이 다소 의외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5·16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은 한국 군부에서 주류집단이 아닌 주변부의 청년 장교들이었다.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은 국제관계와 관련이 있는데, 한국은 국제관계 면에서 주변부다.
가려진 이름들에 주목하는 또 다른 이유는 실현되지 못한 희생된 역사적 가능성을 되새기기 위해서다. 역사를 인식할 때 이미 현실화된 결과만을 놓고, 그것을 필연적이고 불가피한 것으로 합리화하며 단선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협소한 역사의식을 가져온다. 그러한 결과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가능성들을 단순히 비현실적인 것으로 부차화, 주변화하기보다는 여기에도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역사를 좀더 복합적이고 풍부하게 인식할 수 있다. 우리가 겪은 식민지, 분단, 전쟁, 군사독재하에서의 불균등한 경제성장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역사적 가능성의 경합 속에서 다른 가능성들이 희생되어 선택된 결과다. 역사학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역사 속에서 현실화되지 못한, 희생된 가능성을 불러오고 보여주는 것이다. 과거에 발생한 결과를 필연적인 것으로 합리화하기보다는 상대화해야 더 깊이 있고 폭넓은 역사적 성찰이 가능하다. 성공한 이야기가 아니라 실패한 이야기 속에서 현실의 문제점들이 더 잘 드러난다.
남북통합과 평화, 경제적 평등, 성평등 등은 한국현대사에서 주로 희생된 가능성이었지만, 이것을 기억하며 미완의 가능성을 실현해보려고 노력할 때 더 나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추구했던 역사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킨 위대한 인물이나 승리자만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이 역사 서술에서 부각될 때,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도 채워질 수 있을 것이다.
사건사 서술에 대해서는 무언가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사건사’(event history)라 함은 장기적으로 작용하는 구조를 중심으로 역사를 보는 사람들이 기존의 정치사 중심의 역사 서술을 조롱하면서 사용한 단어이기도 하다. 이때의 ‘사건사’는 주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나 승리자들의 영웅담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사건을 다양한 역사적 가능성이 교차하는 순간으로 보고, 권력에서 배제된 주변부 사람들과 패배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현재 한국사회의 역사인식, 특히 한국현대사 인식은 권력을 잡은 최고 지도자의 공과功過 논쟁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경향이 크다. 이러한 협소한 인물 중심의 역사보다는 사건사 서술이 역사를 더욱 풍부하게 보고, 다수의 인물을 드러내는 데 상대적으로 나은 측면이 있다.
또한 사건사 서술은 역사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는 데에도 유의미하다. 현재 한국사에서 대중적으로 통용되는 역사책들은 대체로 ‘한권으로’ ‘하룻밤에’ 읽는 것을 표방하는 통사 중심의 책들이다. 통사는 역사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지만, 실제로는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나 승리자들의 이야기가 중심을 이뤄, 그 어느 것도 구체적으로 깊이 있게 다루기 힘든 형식이다. 그 때문에 역사의 모든 것을 재빨리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어떤 것도 구체적으로 깊이 알기 어렵다. 나아가 기존의 역사 서술에서 무엇이 생략되고, 배제되며, 가려져 있는지를 알기란 더욱 어렵다.
비록 점점이 흩어진 8개의 이야기들이지만 작은 사건들을 거대한 역사적 맥락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한국현대사를 보다 복합적이고 풍부하게 이야기해보려 한다. 평범한 사람들도 역사를 형성해가는 데 참여하고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를 통해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데 이 책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이 책은 역사의 현재성을 강조하기 위해 일반적인 역사책과는 달리 가까운 시기의 사건에서부터 더 먼 과거의 사건으로 거슬러가는 순서로 배열했다. 8개의 이야기가 각기 독립적이기 때문에 큰 불편은 없을 것이라 생각되나, 혹시 불편한 분들은 뒤의 이야기부터 시대순으로 읽어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 책의 각 사건사 서술은 필자가 연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발굴한 1차 자료에 기초하여 행한 학술 연구를 풀어쓴 것도 있지만, 상대적으로 긴 시기의 다양한 사건들을 다루다보니 다른 학자들의 연구에 빚진 부분도 많다. 또한 그동안 진행된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의 성과도 참조했다. 이 책에 인용된 많은 국내외 학자들, 과거사 진상규명 작업에 참여한 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혹시 오독이나 잘못된 해석이 있다면 서슴없이 말씀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2017년 4월
홍석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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