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

책 소개

“치밀함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없는 것을 만지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 탁월한 감각의 시

 

타고 남은 너의 얼굴은 잿빛이었다//한번도 불붙은 적이 없는 것은 네 얼굴이었다//머리 한가득 연기를 품고//네가 거닐던 어디에서든 흩날리는 것은 재로 변했다//한때 너의 일부였던 표정들이//도처에 마음을 묻으려고 했다(「호명」 전문)

 

2013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신두호 시인의 첫 시집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이 출간되었다. 등단 당시 ‘이미지와 사유를 능숙하게 발휘하고, 유장한 리듬에 실린 힘 있는 문장을 매끄럽게 운용한다’는 호평을 받았던 시인은 등단 4년 만에 펴내는 이 시집에서 참신하고 활달한 시적 상상력과 감각적인 표현을 앞세워 존재와 존재, 현상과 실재가 만나는 다양한 양상과 그것의 의미를 냉철하게 고민하며 세계의 진상(眞相)을 드러내는 색다른 시각의 관념적 시 세계를 펼쳐 보인다. 세밀하고 안정된 문장 속에 “형이상학과 관념론과 모호한 이미지”(함돈균, 해설)가 뒤섞인 가운데 철학적 사유가 돋보이는 깊이 있는 시편들을 오래오래 곱씹어 읽는 맛이 각별하다.

 

풍경은 징후와도 같은 울림으로 포착된다/더이상 호소하거나 맹세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을 때/문 앞에서 증식하는 문을 보았다/유리볼에 담긴 샐러드를 뒤적이며/중얼거렸다 이런 일이 일어나서 미안하게 됐다/소독과 오염이 구분되지 않는 거리에서/우리의 고해를 위한 몇개의 빈소를 마련하고서/(…)/째깍거리는 심장 소리를 확인하려/창백한 손목들에 귀를 가져다 대면서/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올리면서/고백했다 몇번의 비명과 함께 날이 밝아오고/구겨진 신발들이 구석에서 벗어나게 되면/물이 멎듯 고요해질 선언들로 남아(「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 부분)

추천사
  • 신두호의 첫 시집은 ‘이행(移行)’과 ‘작용(作用)’의 시들로 이루어진 음악적 세계다. 점에서 점으로, 음에서 음으로, 시의 궤도를 수정하고 확장하면서 존재를 실어나르는 동사들을 보라. 현재진행형이나 수동형의 동사들이 만들어내는 파동 속에서 모든 사물은 어딘가로 가고 있고, 무언가가 되어가는 중이다. 물기가 증발하고 빛과 색이 희박해진 진공상태, 그 무중력의 어둠속에서, 고독이라는 장소에서, 신두호의 시들은 태어난다. 보거나 말하는 자의 능동성을 포기하는 대신 그의 감각은 없는 것을 만지고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 그래서 시인이 생산해낸 얼굴에는 주체의 표정이 비워져 있고 발화하는 입 또한 없다. 사라진 입은 “문 앞에서 증식하는 문”처럼 부재와 침묵의 내부를 열고 들어가 독특한 선율과 화음을 만들어낸다. 그 이행의 과정에서 시어들은 잘 조율된 피아노처럼 힘과 긴장이 고루 안배되어 있다. 이 내향적이고 사려깊은 연금술사의 손끝에서 시의 질료들은 기화와 액화, 상승과 추락을 거듭하며 “진리의 순수한 불순물들”에 가까워져간다. 이 젊은 시인은 왜 그토록 일관되게 ‘선천적 희미함’과 ‘수동적 능동성’을 견지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그는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제대로 무력해지기 위해서는 내부에 얼마나 많은 힘을 비축해야 하는지를. 정교하게 엇갈리기 위해서는 서로의 속도와 중력에 얼마나 예민해져야 하는지를.
    이 개성적인 시인이 입문한 ‘새로운 자연’ 앞에서, 그 ‘조화(調和)로운 조화(造花)’의 풍경 앞에서, 독자들은 어리둥절해하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수학적 치밀함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서정적 물기와 실물감을 걷어낸 ‘표본의 세계’가 이렇게 유려한 음악을 들려줄 수 있다니!
    나희덕 시인

목차

버드나무들과

다가가는 행위

시든 조화를

구름의 내부

연인들의 연인

모텔 밀라노

증후군

요정들과

개들은 曰曰曰

당기시오

만찬

탁상공론의 아름다움

여론의 기억

자연에의 입문

자연에의 입문 2

자연에의 입문 3

11월

에네르게이아

튈르리

호명

횡단하는 단면

푸른 병

늘어지는 부드러운 가죽가방

캐비닛

6/5

나선의 뜰

소여들

고양이 관념론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

지구촌

백합 홍학 네뷸러

세계화

폭포

소화기論

높이의 깊이

숲의 물결

SO WHAT

마네킹도 손가락을 가지고

robot_love

밤의 골상학

일몰

계절의 방

미래

간격들

지구본

이마 위의 붉은 점

안부

과일주의자

온 더 비치

모든 게 숲으로 돌아갔다

 

해설|함돈균

시인의 말

수상정보
저자 소개
  • 신두호

    시인. 1984년 광주 출생. 2013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권태 속에는 위안이 있을 것만 같았다. 지겨움이 지겨워지지 않을 때까지 같은 곳을 볼 수 있기를 바랐다. 모든 일이 순조로워 보였다. 해에게서 지겨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항상 같은 자리에서 나뭇잎들이 흔들렸다. 곧 한번의 바람이 모든 잎들을 앗아가버렸지만, 맹목적인 앙상함만이 이제 그곳을 대신하고 있다. 내가 보아온 모든 것들에 제자리를 돌려주었다면 권태를 가질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지워지지 않는 얼룩에 자주 사로잡히곤 했다. 빛을 밝히고 어둠을 더욱 어둡게 하며, 번져나가는, 호흡과 늘 함께였다.

2017년 4월
신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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