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책 소개

시의 미래와 함께하는 비평의 무한한 가능성

 

 

 

시에 대한 애정어린 시선과 차분하고 꼼꼼한 분석으로 우리 문단에서 가장 활발한 비평활동을 펼치고 있는 평론가 김수이의 네번째 평론집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이 출간되었다. 쓸 수 있는 것에 대한 자신감과 설렘, 쓸 수 없는 것을 쓰고자 하는 패기와 비전, 이 모두를 한데 아우르고자 하는 저자의 글은, 화려하거나 논쟁적이진 않다. 하지만 우리 시를 통해 문학 본연의 지향점을 모색하고 아울러 동시대에 던지는 발언의 지점을 확보하고자 하는 야심찬 행보이자 텍스트와 시인, 독자 모두에게 나긋하게 다가오는 따스한 고백이기도 하다. 중견과 신예 시인 모두를 포괄하는 김수이의 비평은 최근의 시로부터 다소 멀어진 독자라도 근래 우리 시의 흐름을 일정한 맥락 속에서 자연스레 파악하게 해준다. 이 책의 제1부는 여러 문예지에 실은 특집 및 기획글을, 제2부는 개별 시인의 시세계를 조망하는 글을, 제3부는 시집에 수록된 해설을 묶어 꾸렸다.

 

 

 

제1부의 첫 장을 여는 「자체제작 소리를 내는 상자들, 그리고」는 2000년대 새롭게 등장한 시의 경향을 정리하는 동시에 그간 발견된 가능성들을 바탕으로 진전될 2010년대의 시를 기약하는, 이 평론집을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담은 글이다. 저자는, 제작 당시의 망치질과 톱질 소리를 들려주는 테이프가 들어 있는 로버트 모리스의 목제예술품 ‘자체제작 소리를 내는 상자들’에 빗대어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이 시쓰기의 원리와 공정을 텍스트에 기입했다고 평한다. 자기 자신 및 세계, 시 자체에 대한 커다란 자의식으로 무장한 시인들은 시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숨기지 않으며, 자기 사유의 기반이 된 철학-비평의 개념과 언어를 시에 도입했다는 것이다. 이는 기존 시의 문법에서 철저히 벗어난 ‘미래파’의 시, 그리고 최근 몇년간 한국 문단의 뜨거운 이슈였던 시(문학)와 정치 논쟁이라는 결과물을 낳았다. 그리하여 저자는 이렇듯 새로운 경향의 시들이 부단한 갱신을 시도하는 가운데 “미학적이며 정치적이며 윤리적인 실천을 동시에 이행”하게 되기를 기대한다. 서정의 새 지평을 또 한번 열 2010년대의 새로운 시야말로 우리 시단의 과제이자 김수이 평론이 앞으로 주목할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이밖에 자본주의 체제가 만들어낸 시대의 ‘미로’에 균열을 내는 황인숙 송찬호 송재학 시의 활력에 주목한 「2000년대 시의 미로와 심연」, 황병승 이승원의 시를 하위문화적 상상력으로 지배문화에 저항하는 것으로 읽어낸 「스타일과 카운터펀치」, 김이듬 김윤이 박정대 등 최근 시집에 나타난 다양한 시적 방법론을 다룬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등은 근래의 시 경향들을 통해 갈수록 첨예해지는 체제의 모순 속에서 시가 나아갈 수 있는 방향, 혹은 시가 복무해야 하는 역할을 제시하는 수작들이다.

 

특히 김기택 유홍준 황규관 등의 시들이 종래의 노동시, 민중시의 개념을 어떻게 해체-재구성하는가, 그리고 현시기 자본주의에서 양상을 달리하는 노동의 제 현상들을 어떻게 형상화하는가를 추적한 「얼굴 없는 노동, 자본주의의 역습」, 「노동과 삶의 노역」은 시라는 장르를 넘어서까지 읽힐 만한 분석적 텍스트이다. 한편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를 중심으로 우리 시가 이 세계를 핍진하면서도 미학적으로 그려내기 위해 확보해야 할 ‘거대한 뿌리’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탐구한 「거대한 뿌리, 혹은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는 변화할 서정시의 향방에 대한 이 평론가의 고민이 얼마나 진지한 것인지를 실감케하는 깊이있는 비평이다.

 

 

 

제2부는 좀더 구체적으로 개별 시인의 시세계를 조망하는 글들을 모았다. 우리 시단의 대표적인 중견시인으로 자리매김한 송재학 장석남에서부터 자신만의 독보적인 위상을 확립한 백무산 홍신선, 그리고 박연준 김지녀 이덕규 등의 젊은 시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시인들의 작품세계를 심도있게 다룬 글들이다. 시인 각자가 지닌 서로 다른 서정성들을 세심하게 읽어내면서 그 서정과 주제의식 들이 당대의 현실에 가닿는 지점을 정치하게 포착함으로써 각각의 시인들에게 확고한 현재성을 부여하는 것은 김수이 평론이 지닌 중요한 미덕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녀는 급변하는 시의 조류에 휩쓸리거나 소위 주례비평 류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자기 본연의 문제의식과 역할을 자각, 고수하면서도 문단으로부터 굳은 신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조정인 천수호 문동만 윤성택 이사라 이규리 등의 신작시집을 해설한 3부의 글들은 이에 대한 작지만 뚜렷한 증거인바, 그녀가 앞으로도 시(문학)의 역할과 방향성을 모색하는 ‘거대한’ 기획뿐 아니라 묵묵히 시를 써가는 시인들과 한데 어울리는 현장비평가로서 활약하길 기대하게 한다.

 

 

 

김수이는 서두에서, 평론을 쓰면서 늘 쓸 수 있는 가능성과 쓸 수 없는 불가능성이라는 두 갈래의 길 앞에서 희망과 절망을 반복했다고 말한다.(‘책머리에’) 두 갈래 길의 존재와 그 사이에서의 갈등은 비단 저자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이 시대는 가능성과 불가능성, 희망과 절망, 도전과 좌절, 성취와 표류 등 속에서 계속되는 부침을 겪고 있는 중이다. 이 불확실한 시대에 현실과 함께 호흡하고자 하는 문학 또한 같은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은 아닐까. 불확정성이 강요하는 고뇌와 암담함을 외면하거나 그에 짓눌리지 않고 평론가로서 ‘쓸 수 있는 것과 쓸 수 없는 것’ 사이에서 늘 자신의 역할을 찾아나가는 김수이의 존재는 그래서 그 자신의 겸손한 고백처럼 “때로 허황되”거나 “무기력”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위기의 시대에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현실에 대한 발언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저 수많은 시인들이 있는 한 김수이의 글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목차

책머리에

제1부

자체제작 소리를 내는 상자들,
_2010년대 시로 나아가기 위하여

2000년대 시의 미로와 심연
_황인숙, 송찬호, 송재학의 시를 중심으로

스타일과 카운터펀치
_황병승, 이승원 시에 나타난 하위문화적 상상력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얼굴 없는 노동, 자본주의의 역습
_최근 시에서 ‘노동’은 어떻게 존재/부재하는가

노동과 삶의 노역
_황규관을 중심으로

거대한 뿌리, 혹은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
_최근 우리 시의 ‘뿌리’에 대한 단상

무한히 열린, 진정한 모험의 가능성

제2부

운동하는 풍경과 존재의 고고학
_송재학의 시세계

사경(死境/寫經)의 시학
_홍신선의 시세계

푸르른 절연(絶緣)의 시학
_백무산의 시세계

삶의 허기를 향유하다
_장석남의 시세계

몸에서 시가 ‘똥’처럼 떨어지기까지
_박연준의 시세계

(불가능한) 자기 정체성의 기술(技術/記述)
_김지녀의 시세계

담백한 이념의 뭉게구름쏘스
_이덕규의 시세계

제3부

장미와 바람의 보존법
_조정인 시집 『장미의 내용』

빛의 번식력을 모방하다
_천수호 시집 『아주 붉은 현기증』

서정시가 파닥거린다!
_문동만 시집 『그네』

현실의 균열들 속에 존재-부재하기
_윤성택 시집 『리트머스』

역동하는 삶의 공간, ‘박물관’에서 ‘옷수선집’까지
_이사라 시집 『가족 박물관』

‘반복의 생리’를 휘젓는 ‘별별 상상력’의 세계
_이규리 시집 『뒷모습』

수상정보
저자 소개
  • 김수이

    문학평론가,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1968년 충북 제천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1997년 『문학동네』 문예공모에 평론 「타자와 만나는 두 가지 방식 – 기형도, 남진우의 시에 관하여」가 당선되었다. 평론집 『환각의 칼날』 『풍경 속의 빈 곳』 『서정은 진화한다』 『쓸 수 있거나 쓸 수 없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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