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

책 소개

삶의 진풍경을 포착하는 특별하고 놀라운 투시력

 

등단 이후 줄곧 시적 갱신을 도모하며 독특한 발상과 어법으로 독자적인 시세계를 펼쳐온 중견 시인 고형렬의 열번째 시집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가 출간되었다. 시인은 최근 2년간 전작 시집 『유리체를 통과하다』(2012 실천문학사),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2013 문학동네)를 잇달아 펴내며 왕성한 창작열을 보여주었다. 2년 만에 새롭게 선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세계를 바라보는 예민한 투시력으로 어설픈 “깨달음보다는 느껴짐”의 시학을 펼쳐 보인다. 불안과 혼돈의 세계에서 희망보다는 절망과 어둠을 통해서 길을 내고, 그 어둠 너머의 빛을 탐색하는 “회한과 좌절과 망연자실”의 “녹록지 않은 정서”(김소연, 추천사)와 비장한 감정들이 담긴 시편들이 심금을 울리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것은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라는 끊임없는 물음 속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삶의 치열성과 시 쓰기에 대한 열정이다.

 

해변의 황무지를 쓰고 죽고 싶다/풀 서너줄기 이어진 석양의 모래톱//고독한 동북아시아,/변방의 한 시인 어린 킹크랩의 눈단추처럼/늘 기울어진 하늘을 찾는 물별을/기다리며//스스로 황무지가 된 해변의 나는/안쪽에 옹벽을 올린 절벽의 주거지에서/새물거리는 동북의 샛눈//황무지 모래톱에 눕고 싶어라/황무지 풀밭에서 나를 붙잡고 싶지 않아라/못 죽어 눈물도 없이//바람 우는 황무지 해당화야/흰 불가 갯메꽃 나 수술에서 혼자 운다//먼 곳에서 해변의 황무지가 된다(「황무지 모래톱」 전문)

 

고형렬의 시는 편안하게 읽히는 서정시와는 어느정도 거리가 있다. 시적 발상이 낯선데다가 “해니(骸泥)”(「해니(骸泥)여 어디 있는가」), “좌안의 어둠속 망막”(「빛의 아들에게」), “우주의 다이어프램”(「나에게도 조금 보여주지 않겠어요」), “인공막창” “씰리콘 펠릿”(「태양의 인공막창집」), “풍계묻이를 한 미술의 비밀 사다리” “행려시(行旅屍)”(「죽음 속의 기척을 위하여」), “손바닥만 한 경구개의 문”(「푸른 물고기의 울음」), “상한(傷寒)의 검은 목내이들”(「참나무시드름감염목」), “회맹판” “랑게르한스섬”(「보잘것없는 인간」) 등과 같은 생경한 언어와 요령부득의 표현들이 난해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일상의 세목을 재현하는 섬세함을 넘어 과학적인 사유에 바탕을 둔 기발한 상상력과 언어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그만의 개성으로 힘을 발휘한다.

추천사
  • 고형렬 시인은 언제나 달랐고, 다르다는 점은 한결같았다. 내가 한결같이 흠모한 건 시인만의 놀라운 투시력이다. 기척에 불과한 것, 아직 도착하지 않은 예감과 뜻밖에 발생하는 것들을 포착하는 특별한 시야가 시인에겐 있었다. 야릇했던 것들이 일순 또렷해져 형형한 모습을 느닷없이 드러내는 진풍경이 시인의 시에는 언제나 있어왔다.
    그의 투시가 깨달음이 된 적이 없었다는 점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그는 깨달음을 기묘하게 거절하고 한발 비켜서왔다. 깨달음보다는 느껴짐의 편에 서서 한걸음씩 한걸음씩 나아간다. 절제와 결기를 최대한 정제하여 나아간다. 그는 언어의 연금술이 아니라 태도의 연금술로써 시인의 삶을 완성하는 시인이다. 이 점을 특히 나는 흠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목차

풀과 아파트

화곡동의 빨간 벽돌 속에는

입맞춤의 난해성

어떤 새에 대한 공포

손에서 번쩍거려

내통(內通)

해니(骸泥)여 어디 있는가

사랑초 파란 줄기 속에

도망가는 말들에게 부탁

위조지폐

빛의 아들에게

나에게도 조금 보여주지 않겠어요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

참을 수 없을 땐 전철역으로 간다

언제부턴가 Y는

멀리서 실외기를 지나가다

거울 속 상하이 귀뚜라미

수상정보
  • 2003년 제3회 지훈(芝薰)문학상
  • 2006년 제2회 일연문학상
  • 2006년 제38회 대한민국문화예술상
  • 2006년 제8회 백석문학상
  • 2010년 제55회 현대문학상
저자 소개
  • 고형렬

    1954년 강원도 속초에서 태어나 1979년 『현대문학』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대청봉 수박밭』 『해청』 『사진리 대설』 『성에꽃 눈부처』 『김포 운호가든집에서』 『밤 미시령』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유리체를 통과하다』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거울이다』, 장시 『리틀 보이』 『붕(鵬)새』, 장편산문 『은빛 물고기』 『고형렬 에세이 장자』(전7권) 등이 있다. 백석문학상, 대한민국문화예술상, 현대문학상, 유심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2010년에 간행한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이후에 발표한 시들을 모아 시집을 묶는다. 이제 이 언어의 속도와 의상으로 저 앞의 십년을 건너게 될 것 같다.
시간을 앞서지 못하는 이상 지연되는 삶의 어떤 언어도 폭력적인 저 바깥을 읽어낼 수가 없다. 나의 뿔은 뛰어갈 것이고 저 언덕 너머 도시에선 많은 시가 죽고 더 많은 시가 태어날 것이다. 나는 지난 십년간 망가진 언어를 붙잡고 허둥거렸다. 막막한 안개 시간들이 주위를 에워쌌고 그것들이 망루의 꽃이 되어 다시 한번 과거와 장님이 되어 낙화하고자 한다.
저 밖에 있는 반(半)의식의 현실세계는 신기루처럼 보이다가도 갑자기 현재인 것처럼 소란스럽고 선명하다. 모두 남의 꿈과 상처를 밟지 않고선 발을 뗄 수 없는 현실 속에 처해 있다. 나약한 나의 독초(毒草)들은 중심의 뒷면에 웅크린 채 무언가를 제대로 듣고 말하고 싶어 한다.
모든 욕망과 상처가 다스려지고 치유될 순 없지만 그곳에서 그것들이 모두 비춰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전등 아래 부유하는 먼지들의 빛, 도망 온 말들이 그곳에 유치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현실적 언어의 빗방울과 조우하길 바라면서 암울한 빌딩들을 내다본다. 횡단보도에서 죽음의 그림자와 마주치고 말 못하는 자의 통어(通語)가 건너오길 바란다.
귀뚜라미가 대곡(代哭)하는 울음상자 하나를 들고 봄은 말들이 사라진 거울 앞에서 다시 서성인다.
  
2015년 5월 지평에서
고형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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