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은 용의 홈타운

책 소개

서늘하고 날카로운 직관으로 살피는 삶의 현상

 

용은 날개가 없지만 난다.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고, 개천이 용에게 무슨 짓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날개도 없이 날게 하는 힘은 개천에 있다. 개천은 뿌리치고 가버린 용이 섭섭하다? 사무치게 그립다? 에이, 개천은 아무 생각이 없어, 개천은 그냥 그 자리에서 뒤척이고 있을 뿐이야.//갑자기 벌컥 화를 내는 사람이 있다. 용은 벌컥 화를 낼 자격이 있다는 듯 입에서 불을 뿜는다. 역린을 건드리지 마, 이런 말도 있다. 그러나 범상한 우리 같은 자들이야 용의 어디쯤에 거꾸로 난 비늘이 박혀 있는지 도대체 알 수가 있나.(「개천은 용의 홈타운」 부분)

 

시공간을 넘나드는 분방한 상상력과 독특한 화법으로 개성적인 시 세계를 펼쳐온 최정례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개천은 용의 홈타운』이 출간되었다. 백석문학상을 수상한 전작 시집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문학과지성사 2011)에서 놀라운 시적 변화를 보여준 시인이 4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은 “산문에서 시적 기미를 성취해내는” 심도 있는 통찰력으로 “산문의 시로서의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산문이 어떻게 시가 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기획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시적 의식을 확장하고 넓혀내고자 한 사투의 결과”(조재룡, 해설)이다. 치밀하게 짜인 이야기 구조 속에서 밀도 높은 감성의 언어와 서늘한 직관으로 “무사태평처럼 보이는 일상의 안달복달이 반복된다 날아”(시인의 말)가는 삶의 실감을 포착해내는 진지한 사유와 성찰이 돋보이는 시편들이 은근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지금 흐르는 이 시간은 한때 어떤 시간의 꿈이었을 거야. 지금 나는 그 흐르는 꿈에 실려가면서 엎드려 뭔가를 쓰고 있어. 곤죽이 돼가고 있어. 시간의 원천, 그 시간의 처음이 샘솟으며 꾸었던 꿈이 흐르고 있어.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달덩이가 자기 꿈을 달빛으로 살살 풀어놓는 것처럼. 시간의 꿈은 온 세상이 공평해지는 거였어. 장대하고 아름답고 폭력적인 꿈.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무너뜨리며 모든 아픈 것들을 녹여 재우며 시간은 흐르자고 꿈꾸었어. 이 권력을 저지할 수 있는 자, 나와봐. 이 세계는 공평해야 된다는 꿈. 아무도 못 말려. 그런 꿈을 꾸었던 그때의 시간도 자신의 꿈을 돌이킬 수가 없어. 시간과 시간의 꿈은 마주 볼 수도 없어.(「시간의 상자에서 꺼내어 시간의 가장 귀한 보석을 감춰둘 곳은 어디인가?」 전문)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간과 기억의 조각들을 자유롭게 다루는 최정례의 산문시에는 삶의 슬픔과 고통을 아우르는 일상의 이야기가 선명하게 흐른다. “기억인지 상상인지”(「흙투성이가 되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비극적 현실의 순간들을 시인은 “도로변에 버려진 아이 신발 한짝 같은 심정”(「거처」)으로 담담하면서도 냉철한 어법으로 이야기한다. “의미없이 하루하루를 지내”며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위해”(「존재의 서글픈」) 살다가 “언젠가는 여기서 없어질 존재”(「새의 쇠단추 눈알에」)들의 서글픔과 무력함을 어루만지며 시인은 “딴 세상과 이 세상 사이에 아무것도 없고/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는 것”(「인터뷰」)을 못내 두려워하기도 한다.

추천사
  • 지금 최정례의 시는 어디에 있는가. 그의 이번 시집은 새로워진다는 것의 의미를 새삼 돌아보게 만든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유로움이다. 최정례에게 새로워진다는 것은 자유로워진다는 것이요, 또한 자유로워진 만큼 시는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양자는 서로를 동시에 견인해 내는 것이기에 특별한 넓이를 지닌다. 이번 시집에서는 산문시를 향한 탐험으로 인해 이 넓이가 더 광대하고 예측 불허가 되었다. 산문시란 무엇보다 시적 호흡을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시의 호흡이 보증해주는 회복력, 탄성, 구심력 같은 것들을 넘어서려는 것이며, 대신 진정한 자유, 무장해제된 모험과 위태로움의 길을 가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돌아오는 길을 알지 못하며 반복과 마주침의 구원을 붙잡지 않는다. 오직 일상과 현상의 덤불 속으로 망설임 없이 엎질러질 뿐이다. 최정례의 산문시는 그 덤불 속에 있다. 그리고 시의 위의(威儀) 속으로 포섭되기 위해 덤불 위로 몸을 일으키지 않는다. 시 너머의 시, 덤불의 시, 그의 시는 이렇게 시가 아닐 때까지 그리하여 아마도 산문시도 산문시가 아닐 때까지 가려는 것이겠지. 직선이 직선이 아닐 때까지, 곡선이 곡선이 아니고, 사유가 사유가 아닐 때까지, 아이가 아이가 아니고, 어른이 어른이 아니고, 현재는 현재가 아니고, 나는 내가 아닐 때까지 나아가려는 것이겠지. 최정례의 시는 어디까지 갈 것인가. 이번 시집으로 인해 더욱 예단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그는 더 멀리 나아갈 것이라는 점이다.
    이수명 시인

목차

1부

시간의 상자에서 꺼내어 시간의 가장 귀한 보석을 감춰둘 곳은 어디인가?

나는 짜장면 배달부가 아니다

딸기는 왜 이렇게 향기로운 걸까

동쪽 창에서 서쪽 창까지

꿈땜

거처

닭의 실루엣

한짝

릴케의 팔꿈치

그 시간표 위로

가방은 필요 없었다

망각의 풀밭에서

쥐들도 할 말은 있다

존재의 서글픈

회생

 

2부

개천은 용의 홈 타운

코를 골다

이 길 밖에서

입구

너의 여행기를 왜 내가 쓰나

우주로 가버리는 단어들

심정의 복사본

여행

검은 눈구멍

생각의 피

빗방울 화석의 시대로

Spirit Museum

이수역 7번 출구

흙투성이가 되다

고슴도치와 헬리콥터

담쟁이네 집

 

3부

있음과 있었음의 사이에서

 

4부

인터뷰

흔들렸다

새의 쇠단추 눈알에

네 다리로 걸어간 말

에로틱 숫자

양초공장

말의 고민

표현

경계와 영역

여름 아침

원고와 궤도

군포라는 곳

모기를 데리고

북두칠성

해삼내장젓갈

 

해설 │ 조재룡

시인의 말

수상정보
저자 소개
  • 최정례

    시인은 1955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1990년 『현대시학』을 통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내 귓속의 장대나무숲』 『햇빛 속에 호랑이』 『붉은 밭』 『레바논 감정』 『캥거루는 캥거루고 나는 나인데』 『개천은 용의 홈타운』, 영역 시선집 『Instances』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가 있다. 백석문학상, 현대문학상, 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웃을 수도 없고 울 수도 없는 이상한 날들이다. 무사태평처럼 보이는 일상의 안달복달이 반복된다 날아간다. 와중에 꾸려가고 있는 생각들도 자꾸 변형되면서 이게 시냐, 산문 아니야? 묻는다. 쓴다는 게 뭔가? 흩어져 있다가 꿈틀거리고 결합하기도 하면서 다시 돌아가는 것, 나가지 못하게 하고 꼼짝없이 나를 붙들어놓는 것, 당신을 내복처럼 껴입고 생각하는 것. 이것들이 대체 뭔가.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당신에게 하고 싶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냐, 유령처럼 의식 속에서 무의식 속에서 중얼거리고 있었다. 당신에겐 당신 상황이 제일 중요하지 나는 내 상황이 중요하고, 이런 세상에 어쩌려고! 분노 속에서 당신을 꿈속으로 밀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빠지기 직전에 구해져야 하는데 아무도 건져주지 않는다. 그냥 죽게 내버려둔다. 헬리콥터가 떠서, 아 모든 게 괜찮아, 그러고는 돌아간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것이다. 긴 시간이었지만 사실은 순간이었다. 우린 그 순간을 멍청히 바라보는 관객이었다.  
  
산문과 시, 육신과 영혼, 이 취약하고 희미한 경계에서 내일이면 의미가 바뀌고 감각도 달라질 이 망상의 학교에서 나는 영영 졸업하지 못하고 헤매게 될 것 같다. 그러나 이 저주의 말에 내가 굴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2015년 1월
최정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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