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의 끝을 돌아온 종횡(縱橫) 세계일주!
9년, 457일, 44회에 걸친 실크로드 대장정을 마치다
1955년 12월, 스물을 갓 넘은 청년이 생애 처음 비행기를 타고 유학길에 오른다. 가는 곳은 문명의 발상지 이집트 카이로. 마음은 지구를 가로로 한바퀴, 세로로 한바퀴 돌아보리라는 꿈으로 부풀었다. 그러나 이 꿈을 이루는 데는 5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2005년 일흔 나이에 떠난 ‘실크로드 답사’를 계기로 그는 9년의 시간 동안 457일, 44회에 걸쳐 지구의 끝과 끝을 오가는 문명교류 답사를 수행했다. 그리고 마침내 2014년 6월 21일 모든 여정을 마치고 돌아왔다.
문명교류학자 정수일이 행한 이 대장정의 기록은 글과 사진으로 오롯이 남았다. 2013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역작”이라는 평을 들으며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한 『실크로드 사전』과 그 뒤 『실크로드 도록: 육로편』에 이어, 2014년 12월에는 신간 『해상 실크로드 사전』과 『실크로드 도록: 해로편』이 출간되었다. 실크로드에서 특별히 ‘바닷길’을 따로 다룬 것은 해상 교통로의 세계사적 중요성 때문이다. 지구 전체의 70퍼센트를 뒤덮는 바다를 거치지 않고서는 세계를 종횡할 수 없다. ‘하나의 세계’ ‘세계 속의 우리’를 발견하겠다는 정수일의 문명교류관(觀)은 해상 실크로드 답사를 통해 비로소 완성에 이른 것이다.
『해상 실크로드 사전』
해상 실크로드 개념을 재정립할 필요
흔히 실크로드라 하면 비단이 오고 간 사막길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실크로드를 단순한 물자교역로가 아니라 문명교류의 통로로서 이해한다면 그 범위는 훨씬 더 넓어진다. 넓은 범위의 실크로드는 오아시스로, 초원로, 해로를 망라한다. 그중에서도 해로는 오랫동안 중요도에 비해 덜 주목받았다. 해로를 실크로드에 포함시킬 수 있는지 여부가 우선 논쟁의 대상이었다. 『해상 실크로드 사전』은 이러한 문제상황을 인식하고 해상 실크로드 개념을 정립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편저자 정수일은 해상 실크로드 개념을 정립하지 않으면 “실크로드와 그에 바탕한 문명교류 연구는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해상 실크로드의 가치는 비단 학계 안에만 머물지 않는다. 최근 변화한 국제 정세도 해상 실크로드의 위상을 높이는 데 한몫하고 있다. 2013년 10월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중국 동남부에서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으로 이어지는 21세기 해상 실크로드를 건설할 것을 제안했다. 2014년 11월에는 중국 정부에서 400억달러를 출자해 실크로드 기금을 만들겠다고 공식 발표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해상 실크로드 은행을 설립하는 데 최소 50억위안(한화 약 9000억원)의 자본금을 출자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전까지만 해도 중국은 해로를 실크로드로 인정하지도 않았다. 때문에 중국이 해상을 중심으로 한 ‘신(新)실크로드’ 구상에 이처럼 몰두하는 의도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중국은 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잇는 육로, 그리고 중국-동남아시아-인도양-아프리카를 잇는 해로를 통해 중국 중심으로 세계 정치와 경제 구도를 재편하려 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 들어오는 원유의 90퍼센트가 이 해로를 통한다는 점에서 해상 진출은 중국의 가장 중요한 전력과제로 떠올랐다. 해로 연안국들도 중국에 기대어 부수적인 이익을 얻고자 신실크로드에 기대를 걸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의 패권을 경계하는 세계 각지에서는 이제 해상 실크로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됐다.
한반도의 경우 실크로드의 동쪽 끝이라 할 수 있는 경주가 중국 중심 실크로드 사관에서 흔히 배제되었듯이, 신실크로드 구상에서도 소외될 개연성이 있다. 천여년 전 통일신라시대 장보고는 청해진을 통해 당-신라-일본으로 이어지는 삼각구도를 형성했고, 이는 동아시아가 아랍-무슬림들과 교류하는 거점이 되었다. 고대의 해상 실크로드는 어느 한 국가나 세력이 독점한 길이 아니었다. 만일 독점이 이루어졌다면 세계 문명이 지금처럼 교류를 통해 인류 공동의 물적•지적 유산을 꽃피우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문제의식을 지닌 한 우리가 앞장서 해상 실크로드에 대한 새롭고 바른 이해를 도모해야 한다. 『해상 실크로드 사전』은 이에 마땅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우리에게 필수적인 해양 지식
반도라는 지정학적 조건을 가진 우리에게 해양국은 숙명이다. 우리는 바다에 둘러싸여 살아가며,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까운 일본 대마도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여행을 다니기도 한다. 해양 지식은 우리의 기본 소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해양에 관해 아는 바가 너무 적고 무관심하다. 공신력 있는 해양 사전이나,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해양 교육도 턱없이 부족하다. 그런 면에서 『해상 실크로드 사전』은 문명교류에 관한 인문적 지식뿐 아니라 해양에 관한 기본지식을 전달해주는 실용성을 갖추고 있다.
사전 집필에는 문명교류학자 정수일 외에도 한국해양과학기술원의 김웅서, 최영호, 김윤배 박사가 참여했다. 정수일이 『실크로드 사전』(2013)의 해상/역사 관련 부분을 일부 발췌하면서 해상 실크로드에 관한 역사적인 내용을 주로 담당했다면, 다른 필진은 해양전문가로서 해양에 관한 흥미로운 지식을 보충했다. 여기에 더해 한국문명교류연구소 강윤봉 상임이사가 범지구적인 해로의 주요 거점(항구)들을 119개 표제어로 간명하게 서술했다. 각기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 “해상 실크로드라는 하나의 과녁에 초점을 맞춰 3합을 이루어낸” 결실인 셈이다.
사전의 실용적 특색에 맞게 총 621개의 표제어들은 단순히 어휘 풀이에 그치지 않고, 여러 사항에 관한 기본개념을 터득할 수 있도록 서술되었다. 이해를 돕기 위한 162장의 현장 사진자료도 함께 실렸다. 이 책이 지난해 출간된 『실크로드 사전』과 마찬가지로 사전(辭典)이 아닌 사전(事典)으로 기능할 수 있는 이유다.
지난한 두권의 사전 작업을 진두지휘한 정수일은 앞으로 한권의 사전을 더 예비하고 있다. 총 5148개의 표제어를 골라놓았다는 가칭 『문명교류 사전』이다. 유라시아에 많이 치우친 기존 연구를 보완해 북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까지 아우르는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 하니, 1998년 옥중 집필에서 시작된 그의 오랜 여정이 어떻게 매듭지어질지 기대해볼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