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한평생

책 소개

최초로 완역된 ‘다산 연보’의 결정판!
다산의 현손(玄孫)이 직접 쓴 정약용의 생애

 

다산의 현손(玄孫) 정규영(丁奎英, 1872~1927)이 다산 사후 85년이 지난 1921년에 편찬한 다산의 일대기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가 『다산의 한평생: 사암선생연보』라는 이름으로 완역 출간되었다. 그동안은 다산의 「자찬묘지명」이 ‘연보’를 대신해왔으나 이는 그가 환갑 때 작성한 것이어서 서거할 때까지 15년간의 행적은 공백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다산 사후 85년 만인 1921년 그의 현손인 정규영이 다산의 가계와 행적을 연월(年月)순으로 기록하고, 다산의 대표 저술의 착수‧완성 시기에 맞춰 해당 저술의 주제와 서문을 가려 싣는 방식의 정식 체재를 갖춘 연보를 처음으로 편찬하게 된 것이다. 다산이 환갑 때 작성한 「자찬묘지명」에는 실려 있지 않은 환갑 이후 15년간의 행적까지 담은 다산 가문의 공식 연보인 셈이다.

이제 이 책을 통해 사상가이자 시인인 다산 정약용의 굴곡 많은 한평생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방대한 다산 저술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다산사상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다산의 일대기와 함께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다산에 관심 있는 독자들이라면 다산 저술과 사상의 흐름을 꿰뚫는 사료적 가치가 풍성한 연보로, 일반 독자들이라면 지극한 도(道)를 추구하는 다산의 진면목을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는 다산 입문서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다산의 생애와 대표 저술을 한 흐름으로 꿰다

 

현손 정규영이 연보를 편찬함에 있어 중심으로 삼은 것은 당연히 다산의 가계와 행적이다. 그러나 그 못지않게 주목한 것은 다산의 저술이다. 그는 다산의 생애를 “육경사서(六經史書)의 학에 있어서, 『주역』은 다섯번 원고를 바꾸었고 그 나머지 구경(九經)도 두세번씩 원고를 바꾸었다”고 할 만큼 저술에 전념한 생애로 바라본다. 다산 스스로도 자신의 삶과 저술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는데, 그의 또다른 호 사암(俟菴)은 『중용』 제29장의 “백세이사성인이불혹(百世以俟聖人而不惑)”에서 따온 것으로 “백세 뒤의 성인을 기다려[俟] 물어보더라도 의혹이 없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후손인 정규영이 “그 편질(篇帙)이 방대하여 흩어지고 없어진다면 후손 중에서 누가 기억할 수 있을지 두렵다”는 마음을 품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는 출생에서부터 서거할 때까지 다산의 가계와 행적이 연대순으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대표적인 저술의 서문이 거의 수록되어 있어 이 연보만으로도 다산의 일생과 학문의 개요를 충실히 파악할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 또한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걸친 시기의 정치적 상황, 다산의 관직생활과 교유관계, 유배 전후의 상황, 인간적인 면모, 만년의 집필 활동 등을 알 수 있어 다산 연구자들에게는 더없이 귀중한 책이 아닐 수 없다.

책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사암선생연보』는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한 『국역 목민심서』의 부록, 『다산시 연구』(송재소 지음, 1986년 간행)의 부록으로 실려 전해져왔다. 『국역 목민심서』본은 초역일 뿐만 아니라 주석이 소략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아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다산시 연구』본이 가장 널리 읽혀왔다. 이에 『다산시 연구』본을 저본으로 삼아 오역을 바로잡고 번역문을 손질하고 역주도 보완하여 별도의 책으로 펴낸 것이다. 『사암선생연보』에는 어려운 용어, 수많은 인물, 방대한 저작물, 정치적 사건들이 등장하여 번역자의 주석이 없이는 읽기가 쉽지 않다. 다산 정약용의 학문과 문학세계를 알리는 데 힘써온 역자 송재소 교수는 이들 항목에 대해 꼼꼼한 역주를 달아 독자의 이해를 도왔다.

목차

역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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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한평생

편찬자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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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정보
저자 소개
  • 정규영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현손(玄孫)으로 경기도 양주에서 태어났다. 1900년 탁지부(度支部) 주사(主事)로 첫 관직생활을 시작한 이래 지계아문(地契衙門) 양무과장(量務課長) 사무대판(事務代辦), 탁지부 사세국(司稅局) 양지과장(量地課長) 사무대판(事務代辦), 탁지부 북청(北靑) 재무서장(財務署長) 등을 역임했고, 북청지방 금융조합 설립위원, 북청 국유지 소작인조합 설립위원으로 활동하다가 1910년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양주군 사립 광동학교(廣東學校) 교장을 역임했다.

  • 송재소

    194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영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다산문학연구」로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한문학회 회장을 지냈고,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정년을 맞았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퇴계학연구원 원장이자 다산연구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의 학문과 문학 세계를 알리는 데 오랫동안 힘써왔고, 우리 한문학을 유려하게 번역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저서로 『다산시 연구』 『한시 미학과 역사적 […]

이 책은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를 완역한 것이다. 사암(俟菴)은 정약용의 호(號)이다. 정약용은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다산(茶山)이라는 호 이외에도 열수(洌水), 사암(俟菴), 탁옹(籜翁), 자하도인(紫霞道人), 문암일인(門巖逸人), 철마산초(鐵馬山樵) 등 여러개의 호를 가지고 있는데 다산 자신은 그중에서 사암을 선호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쓴 「자찬묘지명」에서도 자신의 호를 ‘사암’으로 밝혀놓았다. ‘俟菴’은 『중용』 제29장의 “百世以俟聖人而不惑”에서 따온 것인데 이 구절은 ‘백세 뒤의 성인을 기다려[俟] 물어보더라도 의혹이 없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즉 500여권에 달하는 자신의 저술은 백세 뒤의 성인이 보더라도 한점 의혹이 없을 만큼 당당하다는 자부심을 나타낸 호이다.
『사암선생연보』는 다산의 현손(玄孫) 정규영(丁奎英)이 1921년에 편찬했다. 대개의 문집에는 저자의 연보, 행장(行狀), 묘지명 등이 실려 있어서 저자의 가계(家系)나 행적을 알 수 있는데 다산의 문집에는 연보도 행장도 묘지명도 없다. 이 글들은 일반적으로 저자 사후에 그 자손이 작성하거나 자손이 남에게 부탁해서 작성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다. 다산 사후에 연보나 행장이나 묘지명을 마련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다산 자신이 생전에 방대한 분량의 「자찬묘지명」을 작성해놓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자찬묘지명」이 있으니 별도의 묘지명은 필요 없을 것이고 또 「자찬묘지명」에는 그 어떤 연보나 행장 못지않게 자신의 행적과 업적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어서 사실상의 연보나 행장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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