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여성’, 내셔널리즘과 젠더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동아시아 각국 간 논란 등 세계 여성운동이론에서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다. 서남동양학술총서 『근대 중국의 민족서사와 젠더』는 중국의 근대 경험을 통해 민족과 여성의 관계를 해석하기 위한 한층 정치한 방법론을 모색하는 책이다. 저자는 현대 여성해방의 상징으로 간주되는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의 주인공 노라가 5·4시기 중국에서 ‘혁명의 천사’ 혹은 민족의 영웅형상으로 번역되는 맥락에 대해 세밀히 분석하며 페미니즘과 내셔널리즘의 관계를 드러내고자 했다. 이로써 민족담론이 어떻게 여성문제를 전유하면서 현대적 형태로 여성의 타자화를 초래하는가, 또한 이와 반대로 여성들은 어떻게 민족담론을 자기해방담론으로 전유하는가라는 문제를 날카롭게 파헤친다.
민족서사라는 개념을 통해 본 ‘여성’
민족국가 틀 안에서 진정한 여성해방은 불가능하므로 페미니즘은 내셔널리즘을 초월해야 한다는 일본 사회학자 우에노 치즈꼬(上野千鶴子)의 주장은 잘 알려져 있다. 저자는 설사 이에 동의하더라도 그것이 곧 민족국가라는 삶의 현실적 토대를 초월할 수는 없다고 본다. 민족국가라는 공간은 상상적·현실적 차원을 막론하고 근대적 여성정체성을 형성하는 중요한 토대였으며, 반대로 여성 역시 민족국가를 상상하면서 ‘상상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데 개입해온 엄연한 주체였음을 분명히 한다. 개인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20세기 세계체제는 개인에게 민족국가의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하기 때문에 경험영역에서 민족과 여성의 분리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런 사회의 여성은 좋든 싫든 해당 사회의 남성들과 더욱 긴밀한 공동체 상상 속에 묶이기 쉽다. 그녀들에게 민족국가 구성원으로서 자신을 상상하는 것은 곧 ‘여성’으로서의 각성과 중첩된다.
민족서사는 어떤 서사의 어떤 소재가 주제로써 직접 민족을 다루고 있는 경우를 말한다. 여기에 더해 이 책은 이 같은 협의의 민족서사는 물론이고 현대 민족상상과 관련되는 모든 언술행위를 민족서사라고 칭한다. 특히 이 책이 제안하는 민족서사 개념은 호미 바바가 말하는 ‘서사로서의 민족’(nation as narration) 개념에 기초한다. 호미 바바에 따르면 서사로서의 민족은 전통과 현대 사이의 시간을 분절하고 민족건설이라는 현대의 정치적 이념에 따라 과거의 기호들을 자의적으로 결합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을 상상한다. 서사로서의 민족은 동질적인 공동체로서의 민족을 강조하는 교의적(pedagogic) 시간성과, 서사 자체에 개입하는 수행적(performative) 시간성으로 구분된다. 모든 서사의 수행적 시간은 선행하는 교의적 시간에 대해 해체적 성격을 지닌다. 그리하여 민족을 하나의 시간으로 동질화하고자 하는 교의적 시간성은 그 서사의 반복적인 수행으로 발생하는 수많은 이질적 시간들에 의해 도전받는다.
서사로서의 민족 개념은 바로 이 같은 두개의 서사 시간, 특히 수행적 시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여성을 민족의 주체로서 논할 수 있도록 돕는다. 국민이란 민족적 교육의 대상이지만 동시에 의미작용 과정의 ‘주체’이기도 하며, 여성 역시 민족이라는 교의적 시간을 다시 써내는 하나의 수행주체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 ‘민족서사’ 개념을 기본틀로 하여 첫째, 5·4시기 반전통주의가 민족상상과 여성해방기획을 서로 결합하는 양상, 둘째, 노라가 여성해방의 상징이면서도 민족혁명의 기호로 번역되는 과정, 셋째, 반전통주의와 노라 이야기를 실제로 전유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주체의 성별 차이라는 세가지 문제를 주로 논한다.
루 쉰(魯迅), 빙신(氷心), 장 아이링(張愛玲) 그리고 노라의 자살
흔히 중국 5·4(운동) 시기 반전통주의는 민족동일성의 기반인 전통을 부정하고 전반적 서구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먼 것으로 오해받는다. 그로 인해 바로 신계몽주의 여성사 인식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5·4시기 여성의 각성은 민족과 상관없는 자율적 각성이었다는 부박한 이해가 따른다. 이에 대해 저자는 5·4시기 반전통주의를 다양한 민족서사 중의 하나로 보고, 전통을 야만적인 것으로 창조해내는 5·4 반전통주의가 여타 반식민 민족주의 기획(전통을 서양의 그것보다 우월하게 재창조하고자 하는 기획)과 어떻게 다른지에 주목한다.
반전통주의 담론은 야만적 전통을 증명하기 위한 유력한 증거로서 여성문제를 발견하고 구성하며 그것을 민족 위기의식의 해결을 위한 동력으로 동원한다. 그 과정에서 남성 지식인은 자연스럽게 여성을 동정하며 여성을 재현하는 주체로 가정된다. 그로 인해 여성억압에 대한 남성 계몽주체의 진심어린 동정과 관심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부단히 야만적 전통 자체와 결부되고 급기야 전통과 함께 타자화되고 만다는 것이다.
개인주의와 낭만적 사랑에 기반을 둔 현대 결혼제도 사이의 문제를 그린 입센의 「인형의 집」은 중국에서 5·4시기 반전통주의 지식인들에 의해 민족서사로 번역되었다. 현대 여성해방의 상징으로 불리는 노라는 중국 남성지식인들에 의해 ‘혁명의 천사’로 추앙되는 경향이 강했다. 전통 가족제도가 반전통주의 담론에서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되는 가운데, 노라의 과감한 가출은 바로 전통가족제도에 대한 철저한 반항의 의미로 해석되었다. 후 스(胡適)의 「종신대사」는 그와 같은 중국판 노라 이야기의 결정판이다. 희생자였던 청년여성이 가출을 통해 신세계로 들어선다는 중국판 노라 이야기는 여성해방 서사이면서 동시에 야만에서 문명으로, 전통에서 현대로 가는 중국 변신에 관한 민족서사였다. 이때 노라는 신청년의 모범으로 요구되면서 ‘무성화’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노라의 성별이 여성이라는 사실은 노라 민족서사의 성별 상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또한 남성과 여성이 노라 이야기를 전유하는 양상의 차이를 낳는 중요한 기반이 된다.
위의 논의를 더욱 구체화하여, 5·4시기 대표적 작가인 루 쉰(魯迅)과 빙신(氷心)을 대상으로 노라 민족서사가 유포되는 과정에서 서사주체의 성별에 따라 어떻게 다른 양상을 보이는지 살핀다. 이 책은 우선 빙신의 「두 가정(兩個家庭)」을 통해 주로 남성이 주도하는 여성담론을 내면화하면서 겪었을 여성주체의 분열적 멘탈리티와 협상의 시간을 추적한다. 여성에게 찬양과 혐오감을 동시에 드러낸 빙신의 이중성은 남성중심사회의 여성혐오증을 내면화한 결과이며 이는 5·4시기 민족주체로 서고자 했던 여성지식인 대부분이 초월하기 어려웠던 노라 강박증이기도 했다.
한편 루 쉰의 「상서(傷逝)」는 보통 가출한 노라의 실패한 후일담, 혹은 여성의 경제적 독립의 중요성을 강조한 텍스트로 특히 창조주체인 남성의 나르시시즘에 대해 탁월하게 해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또한 루 쉰은 남성창조자가 “새로운 삶〔新生〕을 도모”하는 주체로 서기 위해 한 여성을 어떻게 타자화하는가를 신랄하게 해부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여주인공의 죽음으로 상징되는 주체의 폭력성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는 역설에 빠진다.
이어서 1940년대의 대표적 여성작가 장 아이링(張愛玲)의 「패왕별희(覇王別姬)」에 드러나는 여성의식의 의미를 1930년대 후반 민족서사들의 구체적 지형 안에 놓고 고찰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훗날 장 아이링 문학의 일반적 특징인 ‘정치적 무관심’이 근대적 주체로서의 여성의식과 남성중심적 민족주의 사이의 갈등에서 연원함을 밝힌다. 「패왕별희」는 1930년대 중반 5·4 신문학 전통의 창조를 통해 민족적 합법성을 쟁취하고자 했던 이른바 진보적 민족주의 열기 속에서 탄생했다. 주인공 우희는 자신의 타자적 정체성을 묻고 과감히 그것과 결연하는 5·4식 노라의 형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렇게 철저한 여성적 각성으로 인해 오히려 우희는 5·4 민족서사의 남성중심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여성주의적 주체로 성장하고, 급기야 5·4 민족서사의 산물인 자기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하게 된다. 노라의 자살은 결국 5·4시기 노라의 창조를 자임했던 남성지식인들의 창조물을 죽임으로써 타자로서의 여성정체성을 부인하는 급진적 여성의식을 보여준다. 가장 5·4적이라며 호평받았던 장 아이링의 작품이 사실은 5·4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새로운 여성주체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패왕별희」는 페미니즘의 또다른 역설을 드러낸다.
중국 여성해방의 여정을 새롭게 해석하는 시선
요약하자면, 중국의 반전통주의 민족서사는 먼저 여성을 야만적 전통의 희생자로 재현했고 그다음에는 다시 미래의 영웅으로 이상화했다. 그 결과 전통의 희생자로서의 여성은 물론이고 ‘혁명의 천사’라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가능태로서의 여성 역시 현실이 근본적으로 남성 위주로 짜여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여성을 상징화 이전의 타자성과 계속 동일시할 위험이 있었다.
저자는 여성을 일방적인 희생자로, 혹은 남성을 일방적인 가해자로 규정하는 본질주의적 접근은 궁극적으로 여성을 민족의 시간과 영역 바깥으로 내몰고 결국 여성주체가 관여한 현대성을 여전히 공백으로 처리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한다. 남성과 다른 여성의 경험은 많은 부분 바로 사회적으로 젠더화되는 경험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런 경험의 차이는 노라 민족서사의 성별상징성과 주체의 성별 간 관계와도 밀접하게 연관된다. 노라 가출 사건을 둘러싼 페미니즘담론 주체의 서사전략은 자신의 성별 경험에 따라 상이한 양상을 띤다. 다른 한편 노라 형상의 양가적 성별 상징성은 주체의 성별에 따라 노라 민족우언(民族愚言)을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서로 다른 양상을 유발한다. 따라서 노라의 성별을 ‘무성화(無性化)’하는 담론의 논리와 그 남성중심적 효과를 드러내고 그에 대한 시정을 요구하며 다른 한편 노라 민족서사의 유포 과정에서 드러난 성별 경험에 따른 차이를 드러내는 작업은 그 중요도를 인정받아야 한다.
저자 특유의 이와 같은 분석은 민족서사로서의 반전통주의와 여성해방담론의 구조 및 그 안에서 5·4시기 현대 민족건설 초입의 여성과 남성이 어떻게 개인적 정체성을 민족적 정체성과 결합시키면서 갈등하고 또 그 갈등을 봉합했는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5·4시기 철저한 전통주의 여성해방담론이 남성지식인들 사이의 공감과 유대 속에 형성되지 못했다면 중국 여성해방의 길은 훨씬 더 험난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반전통주의담론이 불가피하게 형성해온 여성의 타자화 경향이 어떻게 처음부터 구조화되고 있었는지를 살피는 작업은 여전히 남은 중국 여성문제에 관한 비판적 고찰로서 가치를 지닌다. 중국 여성해방의 길은 여성의 타자화를 여성 스스로 내면화하는 주체적 역사이자 역설적 과정 그 자체였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촘촘히 추적하며 중국 여성해방의 일단을 새롭게 조망하는 시선을 제공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