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한국문학사 100년을 통틀어 ‘영혼’, 즉 개인의 내면은 주요한 탐구의 영역이었다. 이는 ‘리얼리즘 대 모더니즘’이라는 문학 내부의 논쟁뿐 아니라 철학•사학•문화학 분야까지도 연계된 범인문학의 논의주제로서, 근대문학 더 나아가 근대 자체를 형성해온 개인의 자아가 시대상황과 어떻게 소통했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내줄 키워드다.
서남동양학술총서 『영혼의 계보』는 한국 근대문학사의 낭만주의 연구 특히 20세기 초 신지식인들의 담론을 반추하면서, 그 담론들 속에서 채 발굴되지 못했던 다양한 의의를 계열화•패턴화해내며 낭만주의 문학의 전모를 밝혀낸 문제적 저작이다. 과연 100여년에 걸친 낭만주의 사조의 형성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영혼’이란 무엇이며, 그와 관련되어 생산되어온 수많은 문화담론과 사건사고는 어떻게 하나의 ‘계보’로서 엮일 수 있을까.
문제풀이의 실마리는 다음과 같다. “이를 위해서는 한국문학에서 나타난 근대적 경험과 그 경험의 주체를 자명하게 받아들이는 대신에, 근대적 개인의 출현을 가능케 했던 담론조건을 면밀하게 재구하는 작업이 선결되어야 한다.”(19~20면)
낭만주의와 기독교담론, 근대적 개인을 낳은 두가지 산파
이 책에서 말하는 ‘영혼’은 근대문학에서 민족적 층위에서든(‘민족혼’) 개인정서의 층위에서든(‘혼’ ‘심령’) 다양하게 활용되어온 개념으로, 저자는 특히 “개인과 민족의 깊은 내연관계”를 밀도있게 다룬다. 또한 이 개념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낭만주의’와 ‘기독교담론’을 연대기적으로 분석하여 그 전모를 펼쳐내 선보였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저자는 한국 근대문학 담론의 역사적 변환의 과정에서 낭만주의가 상당히 조명받았음에도 그 관련 텍스트들이 밟아온 궤적이 제대로 탐구되지 않았음을 주목한다.
한편으로는 랄프 W. 에머슨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는 보들레르나 베르그송으로부터 연유하는 낭만적 자아의 어휘와 수사적 표현들은 이념•사조•유파의 차이를 떠나 한국 근대문학 텍스트에 편만해 있는 만큼 이를 통해 기존의 문학사적 경계를 재구획되어야 한다.
낭만주의 미학과 결합해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에 관여했던 또다른 요소는 기독교적 자아담론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한국 근대문학의 형성에 끼친 영향에 관해 기존의 연구자들이 보여준 문학사적 이해는 대개 평면적이었다. 기독교가 한글의 대중화에 공헌했다는 점, 교회 및 미션계 학교를 중심으로 서구문화와 제도의 실질적인 체험이 가능했고 또 신학문이 널리 확산될 수 있었다는 점 등을 조명하고 있지만, 정작 기독교체험이 개별 작가와 텍스트의 형성에 역동적으로 개입하는 양상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장덕수로부터 이광수를 거쳐 김동리에게까지 이어지는 ‘영혼’의 순례
이 책의 제1부 「영혼이라는 에피스테메」에서는 조선 후기 천주학이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수용되고 서구의 ‘아니마’라는 개념이 ‘영혼’으로 번역되어 전해진 이후, 인간의 ‘내적 원천’을 지칭하는 어휘들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그 역사적 궤적을 다룬다. 또한 장덕수 등 1910년대 청년세대가 일본의 키따무라 토오꼬꾸(北村透谷)를 매개로 에머슨의 초월주의 사상을 받아들이며 ‘영(靈)’이라는 단어에 경도되었던 사정과, 전통적인 수사학의 범주에서 벗어난 신조어로서의 ‘영혼’이 근대문학의 형성을 위한 토대가 되었음을 논증한다.
제2부 「생명담론의 권능과 기독교적 주체성」에서는 ‘영혼’과 ‘생명’에서 시작해 ‘인생’ ‘인격’ ‘생활’ ‘운명’ 등에 이르는 근대문학 담론의 역사적 변환과정을 이광수로 대표되는 20세기 초반 문학의 사례들을 통해 집중 조명한다. 제3장은 당대 문화담론에서 ‘영혼’과 ‘생명’이 호환되는 사정을 다룬다.
근대 초기 대표적 잡지인 『학지광』에 실린 전영택•최팔용 등의 글을 통해 생명담론의 국내 수용 양상을, 오상순과 전영택의 글을 통해 ‘생명’이 문학으로서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제4장은 기독교담론을 중심으로 이광수 문학의 문제성을 검토한다. 『무정』의 주요인물인 이형식이라는 낭만적 자아가 기독교담론에 힘입어 구성된 자아라는 것, 타이쇼오기의 생명주의 담론의 영향 아래에서 창출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소설이 이광수 개인의 독창적인 저작이기보다 한때 그가 속했던 『학지광』의 문화담론과 깊은 연관성을 지닌다는 점 등이 흥미진진하게 전개된다.
생명론을 수용한 이광수는 그것을 비틀어 민족주의적 기율을 불어넣었는데, 제5장은 ‘인격’이라는 어휘의 의미변화를 조망함으로써 그것이 1920년대 한국문학의 전개에 끼친 영향력을 재검증하고, 이광수 식의 인격이 본격적으로 극화된 사례로서 『흙』을 검토한다. 또한 기독교적 자아담론에 기반해 문학적 정체성을 형성한 작가 중 상당수는 서북계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지녔는데, 제6장에서는 이들이 자신의 작품 속에서 대동강 주변의 풍광과 안창호라는 실존인물을 통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함양한 원형적 공간으로서 평양을 재생산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제3부 「탈생명주의 미학과 그 계보」에서는 1910년대 이광수 등의 학지광 세대를 통해 수용된 생명주의 담론이 이후 상이한 문학 유파와 이념에 속하는 작가들에 의해 비판적으로 재수용된 사례를 크게 네가지로 계열화한다. 제7장에서는 그동안 저평가되었던 김동인과 나도향의 악마주의를 재조명하며, 이들이 기성의 문학제도나 관념에 맞서 자유로운 개인을 옹호하고 낭만적 자아에 대한 사회실천적 요구를 증대시키는 데 기여했으며, 종교적 자아관념을 전범으로 삼아 형성된 기성세대의 문학적 관행에 도전했음을 밝혀낸다.
20세기에 들어 베르그송과 아인슈타인 그리고 윌리엄 제임스의 학설이 국내에 소개되고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사정에 비추어 제8장에서는 이상의 「날개」 등 1930년대 모더니즘 소설이 이러한 세계적 조류를 반영해낸 ‘의식의 흐름’ 기법이 어떤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는지를 검토한다. 제9장에서는 1920년대 중반을 전후로 하여 유행한 ‘생활’이 ‘생명’의 사회주의적 판본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이 전개된다. 김기진과 박영희가 대표하는 당시의 신경향파 문학은 부르주아 문학의 전유물로 격하된 ‘생명’이나 ‘인생’을 물질적•경제적 함의를 지닌 ‘생활’로 대체함으로써 출현 가능했다는 지적이다.
라이프(life)의 번역어가 ‘생명’ 대신 ‘생활’로 교체되는 담론상의 변화는 1920년대 사회주의 문학의 출현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제4부 「생명주의 이후의 한국문학」은 한국문학에 수용된 생명주의 담론의 계보 속에서 염상섭 소설이 차지하는 의의와 한계를 제기하는 데 집중되었다. 『사랑과 죄』 『삼대』 등 염상섭의 장편소설 속 동정자(sympathizer), 즉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중간” “좌우합작”을 지지하는 중도주의자의 형상을 파헤치며, 여기서 드러나는 타이쇼오 생명주의의 흔적을 추적한다. 또한 염상섭이 재현한 중도주의의 마지막 판본에 해당하는 『취우』를 중심으로 염상섭 특유의 (신)여성 재현 방식을 확인하고, 염상섭 문학의 일상성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재검토한다.
20세기 한국 근대문학사를 재편하고자 하는 문제적 저작
이 책은 문학사의 이편과 저편을 가로지르면서 기독교나 유미주의는 물론이고 민중예술론, 사회주의, 모더니즘, 파시즘, 심지어 조르조 아감벤의 정치철학까지 언급하며, 흩어졌던 근대문학의 언어와 무의식의 원천들을 한자리에 소환한다. 그 지적 여정은 낭만주의와 기독교담론 내의 주체가 근대성을 갱신해나가는 주요 동력임을 밝히는 데 주력한다.
당대 식민지 청년지식인들의 궁핍한 내면을 매혹했던 ‘영혼’과 그것으로 대표되는 낭만주의 미학에 대한 풍부하고도 흥미로운 평가, 이와 더불어 기존 현장비평과 문화담론에 던지는 전복적 비판으로서, 한국문학사 연구의 중요한 이정표로 자리매김할 저작으로 손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