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많은 독자들로부터 꾸준히 사랑받아왔던 서경식의『나의 서양미술 순례』(1991년 일본에서 출간, 1992년 한국에서 번역본 출간)가 새로운 장정으로 꾸며져 개정판으로 나오게 되었다. 더욱 생생하고 세밀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40여컷의 흑백도판을 칼라도판으로 교체하고, 독자들이 읽기 쉽게 판형을 키운 것이 이번 개정판의 특징이다.
저자 서경식은 1951년 일본 쿄오또에서 태어난 한국인 2세이다. 와세다대학에서 프랑스문학을 공부한 뒤 자유기고가로 활동하며『어린이의 눈물』(일본 에쎄이스트클럽상 수상)『쁘리모 레비(Primo Levi)로의 여행』(마르코폴로상 수상)『분단을 살다』『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청춘의 死神』 등을 간행했고, 현재 토요꾜오 케이자이(東京經濟)대학 현대법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저자가 서양의 여러 미술관,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접하였던 미술품들에 대해 나름대로의 생각을 평이하고 유려한 문체로 자유분방하게 피력해놓은 일종의 연작 에쎄이다. 하지만 이 책은 ‘미술감상의 길잡이’라는 개념에 갇히지 않는다. 이 책에는 한국의 정치현실과 가족과 개인의 수난의 역사가 있고, 치열한 사색과 독특한 체험의 기록이 담겨 있다. 주지하듯이 서경식은 1971년 한국의 군사독재정권의 감옥에 두 형(서승, 서준식)을 빼앗기고, 20여년간 조국의 옥중에 갇혀 있는 형들을 석방시키기 위해 노심초사 통고의 세월을 산 재일동포 지식인이다. 서승, 서준식 형제가 감옥에서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 사형선고를 받고 단식투쟁을 벌이는 동안, 서경식과 일본의 가족들은 이들을 살려내고 구출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삶의 전부였다 한다. 형들을 돌보는 나날중에 훌쩍 떠난 첫 유럽여행길에서 마주친 미술작품 속에서 저자는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과 결코 순탄하지 않았던 자신의 가족사를 통감하며 그 의미를 읽어간다.
새로 붙인 개정판 후기에서 저자는 책을 출간할 당시 30대였던 자신이 50대가 되어 느끼는 소회를 밝힌다. 유신 이후 민주화과정이 진전되어 옥중에 갇혀 있던 두 형이 석방되고 문민정권 탄생과 역사적 남북정상회담이 있었지만, 여전히 일본의 우경화는 위험수위를 치닫고 있으며 미국은 얼마 전까지 세계 최빈국 아프가니스탄에 폭탄을 쏟아부었다. 저자는 전쟁과 대량학살, 난민의 시대가 세기를 넘어 계속되고 있음을 느끼며, 30대의 자신이 책에 적었던 “희망과 절망의 골짜기에서 역사 앞에 스스로가 감당해야 할 몫을 다할 뿐”이라는 말을 되새긴다.
프라 안젤리꼬, 쑤띤, 고야와 벨라스께스, 고흐, 레온 보나, 삐까쏘에 이르기까지 저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들은 고난으로 얼룩진 피흘리는 인간의 모습이 담긴 것들이었다. 저자는 정밀한 아름다움을 지닌 작품 속에서도 살아있는 인간의 모습을 읽고, 작품 밑바닥에서 솟구치는 저항의 예술혼을 캐올린다.
체험에 뿌리박은 진지한 시선과 예술과 인간을 둘러싼 깊은 사색이 돋보이는 이 독특한 미술기행서와 많은 새로운 독자들이 만나게 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