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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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름을 견딜 준비가 되었는가 물을 찾아 헤매는 워터좀비들 가뭄이 불러온 대재앙, 손에 땀을 쥐는 생존기! 어느 날 갑자기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어디에서도 물을 구할 수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 닐 셔스터먼과 재러드 셔스터먼의 『드라이』는 가뭄을 다룬 본격 재난소설이다. 수도꼭지가 마지막 물방울을 툭 내뱉고 멈춰 버리는 인상적인 장면에서 시작해, 재난 앞에서 취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10대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손에 땀을 쥐는 생존기를 펼쳐 보인다. 악화되는 혼란, 워터좀비가 되어 버린 사람들. 10대의 주인공들은 어떤 어른도 믿을 수 없고 그 어떤 도움에도 기댈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들을 통과해야 한다. 이들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돼야 할 때도 있다. 지금 나는 괴물이다.” 가뭄을 다룬 본격 재난소설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에 가뭄이 계속되었다. 사람들의 일상은 끝도 없는 금지 사항으로 채워졌다. 정원 살수 금지, 수영장 급수 금지, 장시간 샤워 금지. 그러나 탁상행정에 불과한 이런 주먹구구식 물 절약 정책이 효과가 있을 리 없었다. 설상가상 애리조나주 등 몇몇 주가 용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물길을 차단하면서 캘리포니아에는 단수가 야기된다. 6월 4일 오후 1시 32분. 열여섯 살 얼리사는 수도꼭지에서 물이 멈춘 시각을 확인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수도꼭지가 말라 버린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될지도 몰라. 대통령이 암살된 순간을 기억하듯이.’(15면) 얼리사의 예감처럼 단수는 하루 이틀 일로 끝나지 않는다. 마트에서 생수와 음료가 동나고, 갓난아기가 있는 집은 물이 없어 분유도 먹이지 못하며, 처리되지 못한 배변들로 집집마다 고약한 냄새가 퍼진다. 인간이 짐승이 되기까지는 사흘이면 족하다고 했던가. 오랜 시간 인간과 함께해 온 반려견이 물을 구하기 위해 집을 버리고 떠나듯, 사람들은 그동안 품어 왔던 인간성을 하나둘 저버리기 시작한다. 한 모금의 물을 위해서라면 어떤 아귀다툼도 불사하는 ‘워터좀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얼리사의 옆집 켈턴네만은 사정이 다르다. 켈턴의 가족은 프레퍼족, 즉 지구 종말을 대비해 생존법을 익히고 준비해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정전이 된 상황에서도 켈턴의 가족은 자체 전력 시스템으로 불을 밝히고 비축해 둔 물로 생활을 이어 간다. 얼리사의 부모님은 물을 구하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다. 자기 목도 타는 마당에 얼리사는 열 살밖에 안 된 동생 개릿의 안전까지 책임져야 한다. 켈턴은 이 위기를 기회 삼아 그동안 좋아해 온 얼리사와 친해지려 하며, 틈틈이 얼리사를 돕는다. 평소 재수 없는 괴짜로 생각했던 켈턴이지만, 얼리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도움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얼리사와 개릿이 켈턴의 집으로 잠시 몸을 피한 그날 밤, 사건이 벌어진다. 워터좀비가 되어 버린 이웃들이 섬뜩한 얼굴로 켈턴의 집 앞에 모여든 것이다. 누구에게도 물을 나눠 주지 않았던 이기적인 켈턴의 아버지가 워터좀비들의 공격 대상이 된 건 인과응보일까? 그렇다면 부모를 골라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켈턴이 이런 고통을 겪는 것도 괜찮은 걸까? 무엇보다 얼리사와 동생 개릿의 운명은? 워터좀비들을 피해, 자신만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달아나는 아이들의 운명이 위태롭다! 우리 앞에 충분히 있을 법한 재앙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 끝없는 갈증! 스스로 살아남기를 선택한 이 아이들의 운명은? 『드라이』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법한 ‘가뭄’이라는 재앙을 다루면서 독자를 단숨에 몰입시킨다. 실제 미국 서남부 지역의 단수 사태는 허황된 미래상이 아니다. 캘리포니아주는 2018년 기록적인 가뭄과 산불을 겪었으며, 우리나라 또한 가뭄과 전력난 등 매해 자원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드라이』는 「그 시각」이라는 별도 장을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주인공들 외에 여러 사람에게 찾아온 고난을 입체적으로 그린다. 유독 실감 나는 묘사로 물이 사라진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절박할지를 생생히 느끼게 한다. 또한 그 재앙 앞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이 가장 약자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전한다. 제 몸만 사리는 주지사 및 관계자들, 대규모 시위와 폭동을 경계하며 계엄령을 내리는 정부 당국, 힘이 약한 아이들을 이용하고 약탈하려는 어른 등 기존의 세계는 잔인하고 냉혹하다. 정부는 고작 재난 위기 문자로 ‘추가 공지 대기 바람’이라고 읊을 뿐이지만, 얼리사와 켈턴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스스로 살길을 찾으려 분투한다. 어쩔 수 없이 총을 쓰고, 워터좀비와 싸우며, 재키와 헨리 등 다른 이들과 합류해서도 협력과 배신을 거듭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독자는 이 가뭄이 도대체 언제 끝날지 예상할 수 없다. 주인공들이 과연 살아남을지, 가뭄이 끝나기는 할지, 읽는 내내 조마조마한 스릴과 긴장감이 감돈다. 한편 어떤 이들은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자신도 몰랐던 내면의 양심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들은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혹은 상부의 명령을 거스르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구할 것인지 고민한다. 죽어 가는 타인을 외면하지 않고 조건 없는 선행과 이타주의를 실천하는 시민 영웅들의 모습이 희망을 전한다. 어쩌면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잃었을 때조차 서로를 구할 힘은 기어이 우러나오는 것이다.”(421면)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에 대한 경고는 물론 황폐한 땅을 뚫고 샘솟는 인간성에 대한 탐구까지, 마지막까지 놀라움을 멈출 수 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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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수도꼭지가 말라 버린 이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가뭄이 불러온 대재앙, 손에 땀을 쥐는 생존기! 어느 날 갑자기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지 않는다면, 어디에서도 물을 구할 수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작가 닐 셔스터먼과 재러드 셔스터먼의 『드라이』는 가뭄을 다룬 본격 재난소설이다. 수도꼭지가 마지막 물방울을 툭 내뱉고 멈춰 버리는 인상적인 장면에서 시작해, 재난 앞에서 취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는 10대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삼아 손에 땀을 쥐는 생존기를 펼쳐 보인다. 악화되는 혼란, 워터좀비가 되어 버린 사람들. 10대의 주인공들은 어떤 어른도 믿을 수 없고 그 어떤 도움에도 기댈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들을 통과해야 한다. 이들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돼야 할 때도 있다. 지금 나는 괴물이다.” 가뭄을 다룬 본격 재난소설 미국 남부 캘리포니아에 가뭄이 계속되었다. 사람들의 일상은 끝도 없는 금지 사항으로 채워졌다. 정원 살수 금지, 수영장 급수 금지, 장시간 샤워 금지. 그러나 탁상행정에 불과한 이런 주먹구구식 물 절약 정책이 효과가 있을 리 없었다. 설상가상 애리조나주 등 몇몇 주가 용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물길을 차단하면서 캘리포니아에는 단수가 야기된다. 6월 4일 오후 1시 32분. 열여섯 살 얼리사는 수도꼭지에서 물이 멈춘 시각을 확인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수도꼭지가 말라 버린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될지도 몰라. 대통령이 암살된 순간을 기억하듯이.’(15면) 얼리사의 예감처럼 단수는 하루 이틀 일로 끝나지 않는다. 마트에서 생수와 음료가 동나고, 갓난아기가 있는 집은 물이 없어 분유도 먹이지 못하며, 처리되지 못한 배변들로 집집마다 고약한 냄새가 퍼진다. 인간이 짐승이 되기까지는 사흘이면 족하다고 했던가. 오랜 시간 인간과 함께해 온 반려견이 물을 구하기 위해 집을 버리고 떠나듯, 사람들은 그동안 품어 왔던 인간성을 하나둘 저버리기 시작한다. 한 모금의 물을 위해서라면 어떤 아귀다툼도 불사하는 ‘워터좀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얼리사의 옆집 켈턴네만은 사정이 다르다. 켈턴의 가족은 프레퍼족, 즉 지구 종말을 대비해 생존법을 익히고 준비해 온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정전이 된 상황에서도 켈턴의 가족은 자체 전력 시스템으로 불을 밝히고 비축해 둔 물로 생활을 이어 간다. 얼리사의 부모님은 물을 구하러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다. 자기 목도 타는 마당에 얼리사는 열 살밖에 안 된 동생 개릿의 안전까지 책임져야 한다. 켈턴은 이 위기를 기회 삼아 그동안 좋아해 온 얼리사와 친해지려 하며, 틈틈이 얼리사를 돕는다. 평소 재수 없는 괴짜로 생각했던 켈턴이지만, 얼리사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도움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얼리사와 개릿이 켈턴의 집으로 잠시 몸을 피한 그날 밤, 사건이 벌어진다. 워터좀비가 되어 버린 이웃들이 섬뜩한 얼굴로 켈턴의 집 앞에 모여든 것이다. 누구에게도 물을 나눠 주지 않았던 이기적인 켈턴의 아버지가 워터좀비들의 공격 대상이 된 건 인과응보일까? 그렇다면 부모를 골라서 태어난 것도 아닌데 켈턴이 이런 고통을 겪는 것도 괜찮은 걸까? 무엇보다 얼리사와 동생 개릿의 운명은? 워터좀비들을 피해, 자신만은 괴물이 되지 않기 위해 달아나는 아이들의 운명이 위태롭다! 우리 앞에 충분히 있을 법한 재앙 반전을 거듭하는 전개, 끝없는 갈증! 스스로 살아남기를 선택한 이 아이들의 운명은? 『드라이』는 현실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법한 ‘가뭄’이라는 재앙을 다루면서 독자를 단숨에 몰입시킨다. 실제 미국 서남부 지역의 단수 사태는 허황된 미래상이 아니다. 캘리포니아주는 2018년 기록적인 가뭄과 산불을 겪었으며, 우리나라 또한 가뭄과 전력난 등 매해 자원 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드라이』는 「그 시각」이라는 별도 장을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주인공들 외에 여러 사람에게 찾아온 고난을 입체적으로 그린다. 유독 실감 나는 묘사로 물이 사라진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절박할지를 생생히 느끼게 한다. 또한 그 재앙 앞에서 어린이와 청소년이 가장 약자라는 점을 설득력 있게 전한다. 제 몸만 사리는 주지사 및 관계자들, 대규모 시위와 폭동을 경계하며 계엄령을 내리는 정부 당국, 힘이 약한 아이들을 이용하고 약탈하려는 어른 등 기존의 세계는 잔인하고 냉혹하다. 정부는 고작 재난 위기 문자로 ‘추가 공지 대기 바람’이라고 읊을 뿐이지만, 얼리사와 켈턴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고 스스로 살길을 찾으려 분투한다. 어쩔 수 없이 총을 쓰고, 워터좀비와 싸우며, 재키와 헨리 등 다른 이들과 합류해서도 협력과 배신을 거듭한다. 그러는 와중에도 독자는 이 가뭄이 도대체 언제 끝날지 예상할 수 없다. 주인공들이 과연 살아남을지, 가뭄이 끝나기는 할지, 읽는 내내 조마조마한 스릴과 긴장감이 감돈다. 한편 어떤 이들은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자신도 몰랐던 내면의 양심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들은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혹은 상부의 명령을 거스르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구할 것인지 고민한다. 죽어 가는 타인을 외면하지 않고 조건 없는 선행과 이타주의를 실천하는 시민 영웅들의 모습이 희망을 전한다. 어쩌면 “살고자 하는 의지를 잃었을 때조차 서로를 구할 힘은 기어이 우러나오는 것이다.”(436면) 지구 온난화와 기후 변화에 대한 경고는 물론 황폐한 땅을 뚫고 샘솟는 인간성에 대한 탐구까지, 마지막까지 놀라움을 멈출 수 없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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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너를 만나러 갈게. 내가 꼭 너에게 갈게.” 이제야 말할 수 있는, 끝낼 수 없고 끝나서는 안 되는 이야기 신동엽문학상,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고, 섬세한 감수성과 거침없는 서사로 한국문학에서 주요한 자리를 획득한 작가 최진영이 창비가 새롭게 선보이는 경장편 시리즈 ‘소설Q’의 첫번째 작품으로 신작 소설 『이제야 언니에게』를 출간했다. 주인공 ‘이제야’의 일기 형식으로 전개되는 이번 소설은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내밀한 의식과 현실을 정면으로 주파한다. 『문학3』 온라인 지면을 통해 연재할 당시, 독자들로부터 ‘이 소설을 통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가 조금이나마 바뀌었으면 한다’ ‘가해자 중심의 언어를 되살려서 보여주는 끔찍하고 슬픈 이야기에 감탄한다’ 등의 찬사를 받았던 작품을 완전히 새롭게 탈고하였다.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외면하지 않고, “삶이 무서워서 얼어붙은 사람에게 서슴없이 다가가서”(황현진 발문) 그들의 입장에서 발화하는 최진영의 빛나는 용기가 소설을 읽는 내내 독자의 마음을 등대처럼 비춘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 내가 나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폭력의 그늘 속에서 지금도 견디고 있을 우리의 ‘이제야’들을 위해 비가 내리던 2008년 7월 14일, 제야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며 동생 ‘제니’와 사촌동생 ‘승호’와의 아지트인 버려진 컨테이너로 향한다. 제니와 승호가 오기를 기다리던 제야는 뜻밖에도 같은 동네에 살면서 늘 다정하고 친절하게 굴던 당숙을 맞닥뜨리고 당숙은 거기서 돌변하여 제야를 성폭행한다. 그날 이후 당숙이 자신이나 제니에게 또다시 같은 일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제야는 산부인과와 경찰서를 홀로 찾아가며 침착하게 대응하지만, 부모를 비롯한 일가친척들의 소극적인 태도와 전염병에 걸린 듯 취급하는 친구들의 냉소적인 행동으로 인해 결국 버려지듯이 멀리서 혼자 사는 이모와 함께 지내게 된다. 제야가 직접 발화하는 일기 형식과 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번갈아 서술되는 『이제야 언니에게』는 제야의 시간을 3부로 나누어 진행한다. 1부에서는 제니와 승호와 집 옥상에 올라 밤하늘의 카시오페이아 성좌를 구경하며 ‘개똥벌레’를 부르던 조용하고 평범하던 제야의 유년을, 2부에서는 어떻게든 제야를 감싸 안으려는 이모와 함께 살며 부딪히고 넘어지는 제야의 모습을, 3부에서는 검정고시에 합격한 후 대학에 진학했지만, 과거로부터 계속되는 고통과, 미래를 생각할수록 극심해지는 두려움 속에서 자신의 현재를 찾아나가는 제야를 보여준다. 독자가 제야의 인생을 제야와 같은 시선으로 목격하게 하는 최진영의 이러한 방식은 일기장을 보여주듯 인물의 세밀한 내면을 독자와 공유하고 나아가 제야의 이야기를 모두의 이야기로 확대함으로써 우리가 자각하지 못한 채 누군가에게 행하거나 방관하고 있는 일상의 폭력을 대면하게 한다. 작품을 집필하면서 여성인 자신조차도 내면에 축적된 가해자의 언어와 행동방식이 얼마나 농후했는지 새삼 발견하고 깊은 반성과 슬픔으로 제야의 마음을 상상했다는 최진영은 “방관과 의심 속에서 홀로 버티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기에, 제야에게 위로가 될지도 모를 장면을 쓸 때는 제야의 고통을 묘사할 때만큼 주저했다”(‘작가의 말’)라고 집필 후기를 밝히며, 소설 곳곳에서 뭉근하지만 단호한 진심을 깊이 있는 문장으로 전달한다. “나를 견디지 않고, 나와 잘 살아보고 싶다” 1980~90년대 학창시절을 겪었던 ‘여성 유년서사’의 뜨거운 등장 ‘페미니즘’ ‘여성’ ‘퀴어’ 등의 키워드는 이미 핵심적인 주제가 되었다. 단순히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일시적인 호기심을 넘어서서 문학이 시대와 인생을 본뜨는 기능을 수행한다면, 그동안 문학조차도 은폐했던 존재들에게 이제야 주목하기 시작했다는 방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최진영의 『이제야 언니에게』는 쉽게 볼 수 없었던 1980~90년대 학창시절을 겪었던 보편적인 ‘여성’의 유년서사와 더불어 남성에 의한 폭력에서 살아남은 피해생존자 여성의 언어를 날것으로 문학의 자장 안으로 옮겨왔다. 이러한 성취는 문학이 과거의 야만을 고백하는 일을 넘어서 현재 20~30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여전히 존재하는 내면의 불안과 분노를 밀도 있게 증언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편 이 책에는 지난여름 최진영 작가와 몽골 여행을 하며 최진영을 경험하고 바라보았던 황현진 소설가의 아름다운 여행 산문이 발문으로 수록되었다. 황현진은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를 떠올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 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가 가능한 독서 앞에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면서 “최진영은 끝까지 우리 삶의 전부를 써낼 것”이라는 말과 함께 몽골의 사막을 걷는 동안 제야의 이야기를 구상하면서 스스로도 제야와 같은 마음이 되었을 최진영을 반추했다. 그동안 작품마다 사회나 관계의 외진 곳에서 삶을 버티고 있는 인물들을 등장시키며 소외된 이들을 끈기 있게 소설의 자리로 초청해온 작가 최진영. 이 소설을 읽으며 누군가는 불편해할 것이며 누군가는 슬프도록 공감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두려울 것이다. 삶을 계속 살아나가야 하는 여성이자 피해생존자의 언어를 생생하게 옮겨오는 동안, 그 고통들을 자신의 것으로 감당했을 최진영의 끈기는 작가와 문학이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용기 있는 질문이자 위로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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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월, 아베 정부는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표명한 후, ‘백색국가’ 제외 조처를 발표하였다. 강제징용배상 판결을 경제적 문제로 치환한 일본정부의 대응방식은 전쟁범죄의 책임을 부정하고 은폐하는 데 그 핵심이 있다. 일제의 식민지배가 합법적이고 그로 인해 조선이 근대화되었으며, 일본군 ‘위안부’도 자발적 선택이었다는 제국주의의 논리가 민낯을 드러낸 것이다. 이 시점에서 3·1운동 이후 우리 시민들이 오랜 기간 실천하고 심화해온 민주·평화혁명의 정신이 남기는 메시지를 돌이켜볼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평화와 상생의 촛불정신”(백지연 「책머리에」)이 그 어느때보다 절실하다. 실제로 한일 갈등과 무역 보복에 대응하는 시민들의 자발적 행동은 그동안 단련되어온 촛불시민혁명의 저력을 실감케 한다. 더불어 촛불정신이 현재의 상황을 헤쳐나가는 데 진정한 동력이 되려면 불평등과 적폐를 개선하려는 사회정치 개혁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이에 『창작과비평』 2019년 가을호는 ‘불평등’에 대한 논의를 시작으로 새 계절을 맞이하고자 한다. 당분간 지속될 한일 갈등의 문제를 현명하게 풀어나가려면 공동체의 협력과 지혜가 긴요한 이때에 『창작과비평』 역시 성심을 다해 노력할 것을 약속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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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날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려만 갔다” 잊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역사, 사라진 이름들을 불러낸 시 시는 물론 분야를 넘나드는 다양한 창작·연구 작업을 통해 문학계에 굵직한 족적을 남겨왔으며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인 이동순 시인의 신작 시집 『강제이주열차』가 출간되었다.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한 이래 시인은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우리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으로 입지를 굳혀온 한편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전집』을 발간한 것을 비롯하여 분단으로 매몰된 많은 시인을 발굴하여 문학사에 복원하는 등 연구자로서도 뚜렷한 성과를 남겼다. 1989년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비평가로서도 활동해온 시인은 대중가요사에도 조예가 깊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번 시집 『강제이주열차』는 시인의 열여덟번째 시집으로 구소련 시절 스탈린 정권이 자행한 고려인 강제이주사를 다룬 연작 성격의 작품집이다. 강제이주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슬픈 영혼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인 이 시집에는 “머나먼 동쪽 끝에서 쫓겨와/평생을 물풀처럼 떠돌다 마감한”(「고려인 무덤」) 고려인들의 한 맺힌 삶과 죽음이 눈물겹게 그려져 있다. 고려인 강제이주 문제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의의 자체가 각별한 동시에 희생당한 이들과 살아남은 이들, 그 모두의 애끓는 목소리를 담아내고자 한 시인의 정성과 내공이 문학적으로도 빛을 발하는 귀한 성과다. 고려인 강제이주사를 다룬 가장 생생하고 뜨거운 노래 제1부 ‘강제이주열차’에서는 부제 그대로 강제이주사를 집중적으로 천착했다. 이 시집에서 단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목이다. 시인은 80여년의 세월 동안 소외와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왔던 강제이주 문제를 자기 문학의 화두로 삼고서 그 시절 “인간이 아니고 짐승이었”(「우리는 무엇인가」)던 고려인들의 처절한 수난의 역사를 세세하고 실감나게 복원해낸다. 삶의 터전이던 연해주에서 하루아침에 수만 킬로 떨어진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으로 내몰려야 했던 장삼이사들의 숱한 사연이 담겨 있다. 제2부 ‘슬픈 틈새’에서는 사할린 한인들을 주로 다루었다. 역사학자 반병률 교수의 해설에 언급된 바와 같이 사할린은 오랫동안 러시아와 일본 간 분쟁의 장이었던 곳으로서 무수한 일제 강제징용자들의 아픔이 서려 있다. 시인은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채 “만리타향에 뼈를 묻은”(「강제징용자」) 사할린 한인들의 기구한 세월을 그려냈다. 제3부 ‘두개의 별’에는 2018년 카자흐스탄을 방문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이 담겨 있다. 시인은 “낯설지 않은 얼굴들”(「바자르」)의 고려인들을 만나면서 “말은 안 통해도/굳게 잡은 두 손으로 전해오는 힘”(「크질오르다에서」)에서 동포로서의 애틋한 정을 느끼기도 하고, 고려인 묘지에 나란히 묻힌 두 혁명가 홍범도와 계봉우를 기리기도 한다. 특히 시인은 전10권에 이르는 서사시 『홍범도』(국학자료원 2003)를 집필하기도 했던바, 홍범도 장군이 대한독립군을 창건하면서 공포했던 ‘유고문’의 형식을 빌린 「신 유고문(新諭告文)」은 오늘날 한반도 상황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으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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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자 진중권의 새로운 첫걸음 잃어버린 절반의 철학사, ‘감각학’의 역사를 복원하다! 고대 그리스의 감각생리학부터 들뢰즈의 현대미학까지, 이성이 진리의 근원으로 여겨지면서 철학의 변방으로 밀려났던 감각학의 역사를 야심차게 복원한 미학자 진중권의 『감각의 역사』가 출간되었다. 인공지능, 복합현실, 디지털 예술 등 각종 기술과 매체의 발달로 인한 감각지각의 대변동을 준비해야 하는 지금, 우리 시대의 미학자 진중권은 물질이 스스로 감각하고 사유한다고 생각했던 고대의 물활론부터 중세 아랍의 광학, 감각을 이성 아래 포섭한 근대철학, 그리고 새로운 학문의 원천으로서 인간의 몸과 감각체험이라는 주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현대미학의 여러 논의를 폭넓게 아우른다. 『감각의 역사』는 진중권이 야심차게 선보이는 ‘감각학 3부작’의 시작이다. 미학에서 감각학으로의 전환을 준비하는 대기획의 첫걸음으로서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까지 감각의 탄생과 망각, 부활을 아우르는 인류의 지적 여정을 밝히는 이 책은 『감각의 미술사』 『감각의 사회학』으로 이어질 후속 연구의 이론적 단초를 제공한다. 이 작업의 바탕에는 그동안 폄하되었던 감각의 위상을 복원하는 한편, 예술의 가치와 정의를 관념적으로 정리하는 것을 넘어 미학적 탐구의 범주를 사회현상 전체로 확장하려는 저자의 원대한 기획이 깔려 있다. 그동안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감각의 역사, 새로운 철학사의 대장정을 보여주는 이 책의 등장은 일찍이 예견된 것이었다. 2005년 이래로 저자는 ‘감각학으로서의 미학사’를 주제로 지속적인 대중강연을 펼치는 한편 꾸준히 관련 분야의 연구에 매진했다. 2015년 12월부터 2016년 9월까지 창비 블로그에 ‘다섯가지 감각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36회에 걸쳐 연재한 글들이 이 책의 몸통이 되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약 3년에 달하는 집필기간 동안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집중해 절반가량을 새로 쓰고 다듬었으며 총 80여장의 도판을 직접 선별하여 독자들이 더 쉽고 생생하게 감각의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 눈부신 결실인 『감각의 역사』는 인류 지성사의 발전과 함께 변천을 거듭해온 감각학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총 10부 35장에 걸쳐 간결하고 명료하게 정리한다. 저자는 주요 논문과 고전들을 방대하게 인용하고 가로지르며 그 장대한 철학사의 흐름을 한 호흡으로 써내려가는 쉽지 않은 작업을 완수해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인간의 감각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한편 감각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안목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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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알지도 못하는 것 때문에 도대체 난 인생을 얼마나 허비한 거냐.” 삶과 죽음이 펼치는 아름답고 차가운 그림자극, 오래 기다려온 정소현 소설의 품위 있는 귀환 삶의 어둡고 적나라한 민낯을 진정성 있는 태도로 대면해온 작가 정소현이 첫 소설집 이후 7년 만에 신작 소설집 『품위 있는 삶』을 들고 돌아왔다. 기발한 상상력과 우리사회를 꿰뚫는 깊이 있는 시선으로 2019이효석문학상 최종심에 오른 「품위 있는 삶, 110세 보험」을 비롯해 총 여섯편의 단편이 실렸다. 이들 작품은 각기 다채로운 이야기와 반전으로 한순간에 독자를 사로잡으면서도 종국에는 묵직하고 진한 여운을 남긴다. 예기치 못한 죽음, 혹은 미리 준비하거나 설정해놓은 죽음 앞에서 허덕이는 인간을 다룬 이 작품집은, 우리의 삶 아래 묻혀 있던, 뒤에 숨어 있던, 외면하고 싶던 비참한 현실을 매끄러운 문장과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를 통해 낱낱이 드러낸다. “주변을 둘러싼 세계를 괴로울 정도로 정확하게 느끼게 될 것을 각오하고 읽기 시작”(정세랑 추천사)해야 할 이 소설들은, 어정쩡한 위로나 되다 만 공감 같은 것이 아닌, 지금 여기를 직시하게 하는 힘, 날카로운 현실 감각을 선사할 것이다. “살아 있어 다행이다.” 비참한 세계를 두 발로 딛고 버티는 힘 죽은 상태에 있는 「지옥의 형태」의 화자는, 끔찍했던 과거의 기억을 계속해서 되풀이한다. 부모님, 친구들, 이후에는 남편과 딸에게까지 버림받았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는 화자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처럼 영원히 돌고 도는 불행의 기억 속에 갇힌다. 화자는 학창시절 사랑받지 못한다는 자격지심으로 친한 친구의 안 좋은 소문을 지어내어 결국 친구가 자살을 시도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 소설 속 ‘화자’와 ‘친구’는 이어지는 작품 「어제의 일들」에서 ‘율희’와 ‘상현’으로 다시 등장하는데, 이 둘의 모습은 사뭇 다르다. 사랑하는 남편과 딸을 얻어 잘 살고 있는 듯한 ‘가해자’ 율희는 불안, 질투, 자격지심 등 스스로 만든 지옥 속에 살아가는데, 자살 시도로 몸이 망가져 장애를 얻은 채 비참하게 살고 있는 듯한 ‘피해자’ 상현은 오히려 자신만의 단단한 내면을 갖추었다. 선생님과 불륜을 저질렀다는 소문, 그로 인한 따돌림과 자살 시도, 가족들의 외면은 상현에게 이미 지나간, “어제의 일들”일 뿐이다. 그림책 작가가 된 상현은 그림을 통해 ‘이전과는 다른’ 세계에 들어갈 수 있었고 비참해 보이는 현실을 두 발로 딛고 버티며 살아간다. 「엔터 샌드맨」의 지수는 폭발 사고로 건물 잔해에 깔리면서 친구는 죽고 자신만 살아남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애써 외면하려고 한다. 폭발 사고의 유일한 생존자인 지수와 지훈은 서로를 버팀목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끝내 함께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지훈의 죽음 이후에야 지수는 비로소 지훈과 함께했던 구체적인 현실, “사고 이후 처음 느낀 아주 명징하고 단단한 고통”을 실감한다. “그러니까, 제발 나 좀 살려줘. 이쁜 내 새끼들아.” 어느날 죽음이 우리에게 던지는 서늘한 질문 「그 밑, 바로 옆」과 「꾸꾸루 삼촌」은 죽음을 다소 환상적인 방식으로 그린 소설들이다. 도시의 철거민, 노숙자, 실종자들이 모여 있는 땅 밑 마을 ‘개미촌’에서 할머니와 단둘이 살던 ‘견’은, 어느날 할머니의 죽음을 맞닥뜨린다. 죽은 할머니는 견에게 이것저것 지시를 하고, 그것들을 하나씩 수행하며 견은 태생의 비밀과 할머니의 과거를 알게 된다. 그토록 꿈꾸던 ‘깨끗한 신축 아파트’에서 살 기회를 얻지만, 견은 자신이 진짜 가족이라고 생각했던 존재, 자신이 안심하는 세계를 찾아 죽은 할머니 곁으로 돌아온다. 「꾸꾸루 삼촌」에서는 지하 음악실에서 곡 작업을 하며, 죽은 혼과 흡사한 ‘그것’들을 맞아주는 철완이 등장한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한풀이처럼 쏟아놓는 ‘그것’들에게 자신이 만든 음악을 위로삼아 들려주며 지내던 철완은 뜻밖에도 행방불명된 자신의 삼촌을 만나게 된다. 삼촌과 함께 지내면서 철완은 삼촌의 과거와 자신의 현재 상황에 대해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표제작 격인 「품위 있는 삶, 110세 보험」은 삶과 죽음에 대해 가장 서늘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다. 치매를 앓았던 아버지를 겪었던 윤승은 인간다운 죽음을 선택하고 싶어 ‘치매안락사 보험’에 가입한다. 일단 치매 판정이 내려지면 계약을 파기할 수 없는 조건의 보험인데, 치매가 진행될수록 윤승은 더욱 살고 싶어한다. 마침내 “제발 나 좀 살려줘”라고 외치는 윤승을 통해 독자는 윤리적 삶과 죽음의 문제를 정면으로 대면하게 된다. 죽음을 다채롭게 변주하고 유려하게 다루는 『품위 있는 삶』은, “재난과 타자의 죽음을 빈번히 만나게 되는 우리 시대에 삶다운 삶이라는 이상에 우리가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신샛별 해설)를 묻는다. 삶과 죽음이라는 보편적이지만 가장 난해한 문제, 외면하고 싶지만 결국 우리 곁에 존재하는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자꾸 들추면서 작가는 이 시간과 세계를 함께 견디는 우리에게 작은 손을 내미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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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달한 서사, 아픔을 가로지르는 입담 우리 시대 가장 믿음직한 작가 공선옥, 12년 만의 신작 소설집 아픔을 가로지르는 생생한 입담으로 우리 사회 소외된 이웃을 보듬어온 작가 공선옥이 『명랑한 밤길』 이후 12년 만에 신작 소설집 『은주의 영화』를 선보인다. 표제작인 중편소설 「은주의 영화」를 비롯, 2010년부터 2019년까지 발표한 작품 8편을 묶은 이번 소설집은 약자의 아픔을 농익은 필치로 풀어내는 솜씨가 여전하거니와 옛 가족이 해체되며 느끼는 불안과, 폭력의 시대가 여성에게 남긴 상처, 나이 들어가며 느끼는 고독을 공선옥 특유의 활달한 서사로 들려준다. 작품활동을 시작한 지 올해로 28년, 우리 시대의 모순을 정면으로 돌파해온 작가는 여전히 우리에게 ‘이야기’가 있어야 하는 이유를 여실히 보여준다. 야만의 시대가 남긴 상처, 그 속에서 침묵을 깨고 피어난 이야기는 공선옥 소설의 활력을 다시금 증명해낼 것이다. 이 소설들이 지금 세상의 어느 누구에게 가닿아서 그에게 어떤 식으로 말을 걸까. 말을 걸 수나 있을까? 혹은 누가 이 소설들에 말을 걸어오기나 할까? 소설이라는 물건이 세상에 의미가 있기는 할까? 나는 혹시 노래를 익혀 ‘밤무대 가수’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 그렇게 사는 것이 ‘존재 의의’로서는 좀더 윗길이지 않았을까? 소설이 세상에서 그리 유용한 물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는 해도 어쨌거나 그럼에도 아랑곳없이 나는 앞으로 사는 동안은 소설을 쓰면서 살게 될 것이다. 내가 ‘소설’로밖에는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 ―‘작가의 말’ 중에서 내 영화는 그 오랜 침묵의 끝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야기였고 울음이었고 끝내 노래가 된 낮은 목소리 표제작 「은주의 영화」는 영화감독이 꿈인 취업준비생 은주가 카메라 한대로 이모의 이야기를 촬영하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광주에서 대구탕집을 하는 이모는 5·18 때 어떤 장면을 본 이후로 다리를 절게 되었는데 카메라를 통해 그런 이모의 이야기를 무심히 듣던 은주는 어느새 카메라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카메라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 카메라가 숨을 쉰다. 카메라가 큰 숨으로 나를 빨아들인다. 나는 저항하지 못하고 카메라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카메라 속에서 카메라를 찾는다. 그리고 나는 알았다. 카메라 속에서는 카메라가 필요 없다는 것을. 카메라 속에서는 내가 카메라이고 카메라가 이모다. 나는 이제 이모가 되었다.(83면) 은주가 되어버린 카메라 앞에서 이모는 남성의 폭력에 무방비하게 놓였던 아픈 과거를 털어놓는다. 카메라는 마치 영매처럼 죽은 사람까지 불러들이는데, 종내에는 이모와 은주가 얽힌 한 소년의 비극적인 죽음이 떠오르고 그 소년의 죽음이 1989년 실제 있었던 조선대 학생 이철규의 의문사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침묵함으로써 감춰두었던 각자의 상처는 영매가 되어버린 카메라 앞에서 이야기가 되고 한바탕 울음이 된다. 폭력의 시대에서 학대받은 여성은 「어머니가 병원에 간 동안」 「읍내의 개」에도 등장한다. 「어머니가 병원에 간 동안」의 ‘언니’는 남의집살이, 버스 차장,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번 돈으로 집에 소를 사주지만 소는 병들어 죽고 결국 언니도 병들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엄마와 언니가 병원에 있느라 며칠 집을 비운 사이 아직 어린 ‘나’는 혼자 동네를 돌아다니다 폭력적인 상황에 노출되고 허공을 향해 엄마를 불러보지만 응답은 들려오지 않는다. 「읍내의 개」에는 지긋지긋한 집을 떠나 먼 곳으로 가려는 ‘나’가 읍내 차부에서 전두환 대통령의 취임식을 라디오 뉴스를 통해 듣는 장면이 나오는데, 공선옥은 ‘작가의 말’에서 “내가 스무살을 향해 가던 무렵 세상에는 ‘큰 개’ ‘작은 개’들이 곳곳에서 ‘발광’을 했다”라고 그 시대를 떠올린다. 「순수한 사람」은 착취당하는 어머니의 삶이 세대가 지나도 끊어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는 비극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땅도 집도 소도 전부 자식들에게 내어주느라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어머니는 “느그 어매 젖은 진작에 보타져불고 수중에 일전 한닢이 없다”라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리는 대신 목청을 돋워 노래를 부른다. 그런 어머니의 딸인 ‘나’는 중학생 아들의 요구로 이혼한 남편을 향해 양육비 청구 소송을 시작해 내키지 않는 재판을 이어가는 중이다. 옛 가족이 허물어진 뒤에 오는 외로움과 불안을 서늘하게 그려낸 「염소 가족」 또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나의 염소 가족들은 언제쯤 한마리도 빠짐없이 모일 수 있을까”라는 말로 전통적인 가족의 해체를 보여주는 이 소설은 어린 시절 사라진 염소처럼 뿔뿔이 흩어져버린 가족들의 저녁식사를 아스라한 시선으로 그려낸다. 한편 소설은 쓰지 못한 채 강연으로 먹고사는 ‘행사작가’로 전락한 소설가 K의 이야기와, ‘쌍용자동차 사태’를 바깥에서 지켜보는 여성화자의 목소리를 통해 사는 일의 서러움을 그려낸 「설운 사나이」도 잊지 못할 감동을 준다. 다섯살 아이의 납치 계획을 세우는 퇴임교수 ‘윤’의 고요한 일상을 그린 「오후 다섯시의 흰 달」은 아내와 아들이 사고로 죽고 하나 남은 딸마저 독립을 해 집을 나가면서 혼자 남게 된 ‘윤’이 우연히 알게 된 다섯살 아이를 통해 묘한 생기를 찾게 되는 과정이 스산하게 그려진다. 낮도 밤도 아닌 시간인 오후 다섯시는 그 끝에 고요한 밤이 올지 불안한 밤이 올지 모른다는 의미에서 경계에 있는 애매한 시간이다. 어쩌면 작가는 그 시간 뒤에 ‘흰 달’을 둠으로써 희미하게나마 비치는 빛의 자리를 남겨두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야기가 된 슬픔은 더는 슬픔의 자리에만 머물지 않는다. 은주의 카메라 앞에서 말 못했던 가슴 아픈 사연을 다 풀어놓은 이모는 밤새 내린 비로 말개진 봄날 아침, 날아가는 노랑나비를 쫓는다. 이제는 다음 세대인 은주가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할 차례다. 긴 침묵의 끝에서부터 시작될 그 이야기는 비로소 ‘은주의 영화’가 되어 흰 달빛처럼 독자들 곁을 오래도록 비출 것이다. 언제나 우리 곁 가장 아픈 자리를 써온 작가 공선옥, 우리를 대신해 울어주고 노래해주는 그의 소설이 있는 한 곧 다가올 밤이 어둡지만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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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재판, 판사 뒷조사, 청와대 유착… 한국사회를 뒤흔든 ‘양승태 코트 사법농단’의 진실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사건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재판 지연은 ‘양승태 코트 사법농단’이라는 거대한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다. 2012년 대법원에서 역사적인 강제징용 손해배상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2013년 일본 전범기업의 재상고가 접수된 뒤 2018년 확정 판결이 나오기까지 사건이 5년간 대법원에 묶여 있는 사이 원고 9명 중 8명이 숨졌다. 베일이 벗겨진 순간 적나라한 내막이 드러났다. 법원행정처에서 판사들이 법관의 양심을 저버린 채 재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건들을 만드는 사이 행정처 간부들과 청와대, 정부 사이에는 은밀한 만남과 전화통화들이 이어졌다. 그 결과 전직 대법원장이 구속돼 재판을 받는 초유의 일이 벌어졌다. 법원에는 대체 무슨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베테랑 기자 권석천의 책 『두 얼굴의 법원: 사법농단, 그 진실을 추적하다』는 ‘사법농단’에 대한 최초의 심층 기록이다. 부당한 지시에 저항해 사표를 냄으로써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의 베일을 벗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탄희 전 판사와의 심층 인터뷰를 시작으로 오랜 법조기자 생활에서 만났던 다양한 취재원의 증언을 듣고, 법정에서의 재판을 취재하고, 방대한 관련 자료를 검토했다. 그 작업들을 통해 사건이 처음 불거졌던 당시의 상황과 세 차례에 걸친 대법원의 자체 조사, 검찰 수사와 재판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충실하고도 입체적으로 담을 수 있었다. 그 과정을 읽다보면 판사 이탄희가 왜 두 번 사표를 내야 했는지 알게 되는 동시에 한국 법원이 어떤 문제를 안고 있는지 생생하게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7장의 강제징용 재판 사례는 한일 간의 마찰 차원을 넘어 시민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법농단의 본질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저자는 ‘사법농단’이 단지 양승태 코트 몇몇 인물들의 일탈이 아니라 대법원장 중심의 법원 시스템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될 수밖에 없는 조직논리에서 비롯됐음을 설득력 있게 증명해낸다. 나아가 조직의 존재 이유인 공적 가치를 배신하고 조직원들―구체적으론 고위조직원―의 사사로운 이익에 충성하는 조직논리가 세월호참사부터 각종 부정부패 사건, 박근혜정부 국정농단에 이르기까지 한국사회의 전반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지적하고 경고한다. ‘사법농단’이라는 사건 앞에 서 있는 지금이 한국사회의 중요한 갈림길이라는 것이다. 바닥으로 추락한 법원의 신뢰를 회복하고 주권자인 시민을 위한 재판이 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국사회가 조직논리를 넘어 한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그 소중한 키워드들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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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용히 네게 맥주를 권하고 초록의 유품인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았다” 재일 조선인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김시종의 계절 시편 까칠까칠한 언어, 찢어진 호흡, 낯선 서정을 만나다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고 재일 조선인으로서의 운명에 맞서며 평생 치열한 작품활동을 펼쳐온 김시종 시인의 시집 『잃어버린 계절』이 번역 출간되었다. 철학자 이진경과 한국문학 연구자 카게모또 쓰요시의 공동 번역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완역본이다. 김시종 시인은 제주 4·3항쟁에 휘말려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1949년 일본으로 탈출하여 오오사까의 재일 조선인 거주지 이까이노에 정착한 뒤 줄곧 일본어로 시를 써왔다. 시인에게 일본어는 자신의 감성과 의식 체계의 밑바탕이 되는 모국어나 다름없는 언어였다. 그러나 스스로 ‘일본어에 대한 보복’으로 문필 생활을 하고 있다고 밝혔듯이, 그의 시는 일본식 문체가 아닌 데다가 반일본적 서정이 담겨 있다. 그런 까닭에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일본 문단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기도 했으나, 이후 마이니찌출판문화상(1986), 오구마히데오상 특별상(1992), 타까미준상(2011), 오사라기지로오상(2015) 등을 수상하고 최근 ‘김시종 컬렉션’이라는 제목의 저작집이 출간되는 등 주목받고 있다. 『잃어버린 계절』의 옮긴이들은 ‘일본식 서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낯선 어법을 구사하는 저자의 일본어를 우리말로 제대로 옮기기 위해 각별히 애를 썼으며, 해설에 가까운 ‘옮긴이의 말’을 통해 김시종의 문학적 삶과 독특한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자 했다. 김시종을 읽는다는 것은 그것을 읽는 나의 서정과 대면하는 일이다 『잃어버린 계절』은 2010년에 출간된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으로, 계절별로 8편씩 모두 32편의 시가 실려 있다. 제41회 타까미준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시집은 원서에 붙은 ‘사시(四時) 시집’이라는 부제만 보면 사계절을 제재로 하여 자연을 노래하는 서정시로 읽히기 쉽다. 그러나 실제 안에 담긴 것은 자연을 찬미하는 부드럽고 평화로운 서정이 아니다. 시인은 “삶의 밑바닥에 앙금처럼”(「구멍」) 남은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살려내어 자연과 인간을 다른 무엇으로 대면하고자 비극적 삶과 타인의 고통을 성찰하는 서정, 곧 ‘서정에 반하는 서정’(옮긴이의 말)에 가닿는다. 여기서 우리는 평생 서정과 대결해온 시인이 이 시집의 제목을 ‘김시종 서정 시집’이라고 하려다 민망해서 그만두었다는 말을 또렷이 이해해야 한다. 시인은 녹슬어가는 일상의 시간을 바림질하며 빛바랜 영상으로 남아 있는 ‘멈춘 시간’들을 현재 속으로 불러내어 “스스로 시간의 출구”(「녹스는 풍경」)가 되어간다. 돌아갈 곳을 잃었으나 “어디서 살든 죽지 않는 한 사람은 살게 마련이다”(「잃어버린 계절」)라는 시인의 외침은 자못 처연하게 들려온다. 갈 곳 없는 삶에도 계절은 어김없이 피고 질 것이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나라일지라도/도달할 수는 있을 터”(「귀향」), 그리하여 시인은 고요한 마음의 지평, “끝없는 꿈의 대지”(「여름 그후」)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구순(九旬)의 나이에 “지금 나는/부도덕할 만큼 살찐 놈”(「어금니」)이라는 깨달음 속에서 시인은 “이제야 알게 된 나의 어리석은 60년”(「여름 그후」)을 곱씹어본다. 그리고 거기에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사소한 존재들에게 촉촉한 시선을 던지면서, 아득하게 멀리 있고 이제는 오지 않게 된 것들과 우리가 매일 잃어버리지만 “결코 미미하다 할 수 없”(「봄에 오지 않게 된 것들」)는 것들에 대해 쓴다. 파편처럼 깊이 박힌 쓰라린 기억들을 되새기며, 조국을 빼앗았던 식민 종주국의 언어로 시를 써온 노시인의 회한과 “누구도 밀쳐낼 수 없는/깊은 우수”(「마을」)가 서린 시들이 오래도록 가슴을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