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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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이 이 시에 담겨서 영영 이 시로부터 탈출하지 못한다면 좋겠다” 단연 돋보이는 사유와 감각, 모두가 기다린 황인찬의 신작 2010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뒤 기존의 시적 전통을 일거에 허무는 개성적인 발성으로 평단은 물론이고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황인찬 시인의 세번째 시집 『사랑을 위한 되풀이』가 출간되었다. 시인은 등단 2년 만에 펴낸 첫 시집 『구관조 씻기기』(민음사 2012)로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고, 이어 두번째 시집 『희지의 세계』(민음사 2015)에서 ‘한국문학사와의 대결’이라는 패기를 보여주면서 동시대 시인 중 단연 돋보이는 주목을 받았다. 4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한결 투명해진 서정의 진수를 마음껏 펼쳐 보인다. 일상을 세심하게 응시하며 삶의 가치와 존재의 의미를 환기하는 “차가운 정념으로 비워낸 시”(김현, 추천사)들이 깊은 울림을 남긴다. 이토록 우리의 시는 다르다고 되풀이하는 시 이토록 읽기 전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 일상의 사건들을 소재로 하면서 평범한 일상어를 날것 그대로 시어로 삼는 황인찬의 시는 늘 새롭고 희귀한 시적 경험을 선사한다. 감각의 폭과 사유의 깊이가 더욱 도드라진 이번 시집은 더욱 그러하다. 특히 김동명(「내 마음」), 김소월(「산유화」), 윤동주(「쉽게 씌어진 시」), 황지우(「새들도 세상을 떠나는구나」)의 시와 대중가요, 동요 등을 끌어들여 패러디한 작품들이 눈길을 끄는데, 시 속에 숨어 있는 시구나 노랫말을 찾아 읽는 재미가 색다르다. 치밀하게 짜인 단어와 구의 반복적 표현, 대화체의 적절한 구사도 눈여겨볼 만하다. 시인은 고백하듯이 시를 쓴다. 세상을 앞에 두고 늘 “어떻게 말을 꺼내”고 “어떻게 말해야”(「불가능한 경이」) 할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시인은 “당신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이 이 시에 담겨 영영 이 시로부터 탈출하지 못한다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것을 미래라고 부를 수 있다면”(「그것은 가벼운 절망이다 지루함의 하느님이다」) 영영 탈출하지 못할 그 오래된 미래 속에서, 그리고 “이제 영원히 조용하고 텅 빈” 세상 속에서 “고독을 견뎌”(「부곡」)내며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랑을 되풀이하려는 것 같다. 시집을 펴내며 시인은 “나는 증오하는 것에 대해서만 생각할 수 있고, 의심스러운 것에 대해서만 말할 수 있다”(시인의 말)고 고백한다. 그렇다고 세상에 대한 증오와 의심의 감정만이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서로의 슬픔과 아픔에 대해 말하고, “생물들이 죽고 사는 것”(「영원한 자연」)과 반복되는 삶을 생각하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일상”(「물가에 발을 담갔는데…」)을 이야기하며 소박하고 진실한 순간의 실체를 찾아간다. “놀 거 다 놀고, 먹을 거 다 먹고,/그다음에 사랑하는 시”(「레몬그라스, 똠얌꿍의 재료」)들이 투명하게 빛나는 이 시집이 다가올 2020년대의 시단을 이끌어갈 것이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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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어떤 음악에 끌리시나요?” 음악과 버스킹, 소설가의 상상이 만나 빚어낸 열여섯개의 이야기 그로테스크한 상상력과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오랫동안 새로운 문학의 경향을 이끌어온 소설가 백민석이 짧은 소설과 음악 에세이를 결합한 새로운 형식의 소설 『버스킹!』을 출간했다. 작가가 이탈리아에서 접한 버스킹 공연에서 영감을 받아 쓴 흥미로운 글들을 묶은 책으로, 그 저변에 록 음악과 버스커에 대한 애정과 향수가 짙게 깔려 있다. 한 소설가를 탄생하게 한 음악적 취향에서 시작된 이 이야기들은 이상기후로 종말을 앞둔 미래사회, 할리우드 액션영화의 주인공들이 모인 협궤 열차, 성소수자를 검거하는 작전을 수행하는 군대, 귀가 어두운 노인들만이 들어주는 음악을 연주하는 재즈 뮤지션,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한 미국 등 등장인물과 배경이 다종다양하다. 작가가 직접 찍은 버스커들의 올컬러 사진 16컷과 작가가 사랑한 앨범에 대한 짧은 에세이가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나는 버스커를 마주칠 때마다 사진을 찍었고, 그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버스킹!』을 썼다. 사진 역시 소설의 일부이고, 일부로 만들려고 고심했다. 버스커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내가 버스커가 아닌데도) 이상하게도 나와 오래 함께해온 사람들인 양 친근함이 느껴지곤 했다. 그건 아마 내가, 인생의 많은 시간을 음악을 들으며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오랜 침묵 뒤 문단에 다시 등장한 이후 작가는 10년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다양한 작업을 선보여왔다. 특유의 파괴적인 에너지로 그로테스크한 종말의 세계를 가감없이 펼쳐낸 백민석은 『버스킹!』에서도 어느날 벌레로 변해버린 아내를 둔 미투사건의 가해자(「물곰 가족」), 자본전쟁 이후 더 극심해진 빈부격차 아래에서 매일 해고당하며 일하는 노동자(「악마를 향해 소리 질러라」) 등을 등장시키며, 이상기후로 종말을 앞둔 세계(「마지막 수업」), 디지털이 장악하여 지도도 양초도 라이터도 사라져버린 재난사회(「도망쳐라, 사랑이 쫓아온다」) 등을 배경으로 강렬한 디스토피아의 장면을 그려낸다. 하지만 이전 작품들과 확실히 다른 점은 그 현실 아닌 현실 속에 음악을 체험하는 순간이 자리한다는 것이다. 커브드 에어부터 지미 헨드릭스, 신 리지, 텔로니어스 멍크, 엘비스 프레슬리까지, 작가는 “나쁜 미래”의 한가운데 그들의 황홀한 음악을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을 마련해놓았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라는 장 제목처럼 음악이 멈추지 않는 한 우리의 인생은 불행 속에서도 짧은 볕이 드는 순간을 품은 채 계속될 것이다. 훌륭한 작품을 남긴 예술가가 가난하게 살거나 불행하게 산 경우는 많다. 우리는 그런 예를 꽤 알고 있다. 예술은 꼭 부나 당대에서의 성공과 함께 가지 않는다. 『버스킹!』은 바로 그런 예술가들에 대한 내 애정(과 슬픔과 존경)을 담은 책이다. ―‘작가의 말’ 중에서 최근 다양한 분야의 글쓰기로 영역을 확대하며 독자들에게 새로운 즐거움을 안겨주는 백민석 작가의 면모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이 책은 새로움과 기획력을 인정받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선정하는 2019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사업 대상작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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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의 세계는 어른들의 세계보다 시시했던가? 아파트키드의 「응답하라 1988」, 우리 모두의 유년시절을 고백하다 우리는 어떻게 어른이 되었을까. 그 기원을 탐색하며 서울 변두리에 살던 아파트키드 ‘민선’의 유년시절을 침착하게 돌아보는 박윤선 작가의 만화 『수영장의 냄새』가 출간되었다. 고도성장기였던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동네 스포츠센터의 수영반에 다니던 여덟살 민선의 치열하고 비릿한 성장 이야기를 담았다. 만화로 읽는 「응답하라 1988」의 아파트키드판인 셈이다. ‘만화계의 칸 영화제’라 불리는 앙굴렘국제만화축제 공식경쟁부문에 2019년, 2020년에 걸쳐 2년 연속으로 초청된 박윤선 작가는 모두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 유년의 한 장면을 보편적인 관점에서 담백하게 그려냈다. 주인공 민선은 교육열이 높고 돈에 관해서라면 억척스러운 엄마가 하라는 대로 수영센터에 다닌다. 뭐든 잘하는 언니를 따라 수영센터 상급반에 들어가라는 잔소리를 듣지만, 별다른 의지 없이 하급반에서 수영을 한다. 민선은 그래도 괜찮은 아이다. 관심 밖의 아이이기 때문이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약육강식 피라미드의 최하위에 놓여 있는 민선의 하루하루는 수영장의 소독약 냄새처럼 비릿하다. 힘센 친구에게 엉덩이를 까 보이고, 엄마가 하라는 대로 수영장과 학원을 오가며 부모가 맞벌이를 한다고 비웃는 있는 집 친구들의 조소를 견뎌야 한다. 작가는 보기만 해도 비릿한 파란색의 연출로 어른들의 세계 못지않게 비정한 여덟살들의 세계를 가감 없이 그리는 한편 살아남기 위해 지독하게 성장해야 했던 우리의 유년기를 보듬는다. 십여년간 프랑스에 거주하며 다양한 작품 활동을 통해 한국 만화를 세계에 알리고 있는 박윤선 작가의 작품 『수영장의 냄새』가 국내에 출간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2009년 잡지 『새만화책』에 연재를 시작했지만 다음 호를 출간하기도 전에 잡지가 폐간되었고, 완성된 작품을 Sous l’Eau, l’Obscurité 라는 제목으로 프랑스에서 출간했으나 한국 독자들이 접근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다 2019년 3월부터 10월까지 어린이교양지 『고래가그랬어』에 「물 아래서」라는 제목으로 연재되어 국내에 소개된 후 창비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이제 중견 작가로 입지를 굳힌 만화가 박윤선의 초기 작품 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지만, 최근 에코 세대, 밀레니얼 세대 등으로 호명되며 세대 담론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아파트키드의 유년기를 스스로 돌아본다는 점에서도 지금 한국사회에 시의적절하게 당도한 작품이다. 네모난 집과 반듯한 교차로를 오가는 아파트키드 민선의 하루하루 서울 변두리의 아파트에 살면서 ‘국민학교’를 다니고 아파트촌에 자리한 ‘어린이 스포츠센터’에서 수영을 배우는 주인공 민선은 오로지 아파트에서만 살아온 ‘아파트키드’다. 아빠는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가정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가사를 도맡으면서도 부동산과 주식 투자로 재산을 모아 값이 오를 만한 아파트를 산 엄마는 다른 학부모들과 경쟁하며, 공부도 운동도 빠짐없이 잘하는 언니 민진에게 온 신경을 쏟는다. 무심한 가족들 사이에서 민선은 엄마가 하라는 대로 셔틀버스를 타고 학원과 수영장을 전전한다. 그러다 배가 고프면 아파트 상가에서 혼자 김밥을 사먹으며 허기를 달래는 나날의 연속이다.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로서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부족함 없는 생활을 하는 듯하지만 네모반듯한 아파트와 교차로 사이를 오갈 뿐 고민을 털어놓을 어른도, 대화할 친구도 없는 민선의 하루하루는 한없이 무미건조하다. 작가는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 무렵의 서울 대치동 아파트 단지의 풍경을 참고하여 외롭고 쓸쓸한 민선의 일상을 서늘하게 연출했다. 무심한 듯 단순하게 당시의 분위기를 담아낸 그림은 ‘밀레니얼 세대’ ‘에코 세대’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여 지극히 일방적인 진단과 평가를 받는 이삼십대 독자들의 향수를 자극한다.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수난과 섬세한 감정의 결을 생생하게 되살려 당사자의 눈으로 돌아보게 한다는 점도 이 작품의 힘이다. 텔레비전 크기로 가난을 평가하던 시절 은밀하게 배워나가는 어른들의 세계 아이들의 세계에서 펼쳐지는 놀이와 친교 관계는 어른들의 정치와 사교만큼이나 비정한 구석이 있다. 『수영장의 냄새』는 유년을 미화하지 않는다. 친구 사이에 권력 관계가 생기면 과감히 서로의 호칭을 “주인님”과 “쫑”으로 바꾸어 부르는 민선의 모습과 친구 집 거실에 놓인 텔레비전 크기로 빈부를 저울질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림으로써 씁쓸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정면으로 다룬다. 이 작품에 그려진 여덟살들의 세계는 대답을 못하는 아이를 “찌질이”라고 욕하고, 조금 다른 행동을 하는 아이에게는 “지랄하네”라고 일갈하는 선생님,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겠다는 일념으로 서로를 견제하고 이기는 데 집중하는 부모들의 사회와 닮아 있다.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조리한 사회의 규칙을 은밀하게 배워나가야 했던 유년시절을 그린 이 작품에서는 앞으로의 경쟁을 위해 관리되고 소독된 수영장의 냄새가 난다. 무리에서 떨어지면 그야말로 지옥, 그때 우리는 치열하게 자랐다 이 작품에서 어른들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우연히 저지른 도둑질로 느낀 최초의 죄책감과, 비행을 들킬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에서 우러난 공포를 민선은 혼자 감당한다. 이 부정적인 감정들 속에서 민선은 그동안 해보지 않았던 행동을 한다. 친구를 도둑질에 끌어들이며 자신을 ‘주인님’이라고 부르게 하고, 권력을 확인하고 자존심을 채우기 위해 함께 병원놀이를 하는 친구에게 “너는 이제부터 왼발을 다친 거야. 왼발 절어”라고 서슴없이 명령하기도 한다. 또래 무리에서 배제되면 그야말로 지옥이므로, 어떻게든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욕망이 소심하고 무기력했던 민선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아이로 만든다. 작가는 불합리하고 모순적인 민선의 행동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어른 못지않게 복잡한 한 아이의 내면을 거짓 없이 그렸다. 덕분에 독자들은 민선이 이 모든 부조리와 편견을 마주하고 마침내 어른이 되기를 희망하게 된다. 오래된 성장의 지층을 돌아보고,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 않았음을 깨닫는다. 독자들은 잊힌 유년을 복원한 『수영장의 냄새』를 통해 한때 아이에 불과했던 자신과 만나 그 아이에게 따뜻한 포옹을 해줄 수 있을 것이다. 이 지독한 현실 속에서도 열심히 자라주어서, 조금 부족할지언정 드디어 지나온 과거를 돌아볼 줄 아는 어른이 되어주어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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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해서 더 반가운 야생 동물들! 동물원 수의사 최종욱, 뜻밖의 만남을 찾아 길을 나서다 동물원에서 700여 마리의 동물과 20년째 동고동락하고 하고 있는 최종욱 수의사가 색다른 여행을 떠났다. 길 위에 사는 야생 동물들을 만나러 간 것이다. 지리산 둘레길부터 시작해 담양, 경주, 우포늪까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동물들을 만나고 그 즐거운 여정을 기록했다. 오랫동안 동물과 함께해 온 수의사답게, 여행 내내 수의사의 온 감각은 동물들을 향해 열려 있다. 등 뒤에서 스르륵 지나가는 족제비의 움직임, 하늘 위에서 “까각” 하는 파랑새 소리, 겨울 산 눈길 위에 찍힌 산토끼 발자국까지 보통 사람이라면 무심히 스쳐 지나갈 동물들의 존재감이 수의사의 섬세한 관찰력과 풍부한 지식 덕분에 제대로 펼쳐진다. 사계절을 수놓는 여러 동물들의 살아 있는 몸짓은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동물이 함께 살고 있는지 새삼 깨닫게 하면서 동시에 잃어버린 생태 감수성을 일깨운다. 희생된 동물에 대한 안타까움에서 시작한 걷기 여행 약속도, 준비도 없지만 그래서 더욱 즐거운 야생 동물과의 만남 걷는 습관은 아주 우연히 시작되었다. 동물원을 떠나 도축 검사관으로 도축장에 파견되어 일하던 때, 최종욱 수의사는 일이 끝나는 오후가 되면 주변의 둑길을 무작정 걸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진정되고, 동물들을 위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을 위해 희생된 동물들을 추모하며 시작된 걷는 습관은 도축장을 떠난 뒤에도 계속되었다. 시간이 나는 날이면 길을 나서서 무작정 걸었고, 동물이라면 무엇 하나도 무심히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 덕분에 그 길은 자연스레 야생 동물들을 만나러 가는 여행이 되었다. 흔히 이런 여행을 생태 관광, 생태 여행이라 부르는데 최종욱 수의사는 그중에서도 멋진 풍광이나 식물이 아니라 야생 동물들을 찾아가는 여행을 떠난 셈이다. 동물을 만나러 떠난다지만 이런 만남은 미리 약속이나 예약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저 무작정 걷다 보면, 그 계절의 동물들이 어디선가 불쑥 나타날 뿐이다. 오랫동안 동물과 함께한 사람만이 체득한 예리한 감각으로, 수의사는 동물이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내는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 낸다. 곤충이 풀숲에서 바스락대는 소리부터 오묘한 똥 냄새까지 수의사에게는 어느 것 하나 예사로운 것이 없다. 수의사의 오감에 포착된 다채로운 생명의 몸짓들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동물들을 새롭게 보게 하면서 우리의 자연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깃들어 살고 있는지 깨닫게 한다. 그럼으로써 무뎌진 생태 감각을 되살려 낸다. 사계절을 수놓는 다채로운 생명의 몸짓 평범한 동물들이 일깨우는 생태 감수성 동물을 찾아 떠난 여정은 계절별로 기록되어 있다. 봄부터 여름, 가을을 거쳐 겨울까지 각 계절의 주인공들이 길 떠난 나그네와 조우한다. 봄에는 겨울잠에서 깨어난 숲속의 정원사 다람쥐가 멀찍이서 움직이고 강 위의 귀족, 왜가리와 백로도 날아다닌다. 오월이 되면 귀한 새 후투티도 만날 수 있다. 여름이면 짧고 굵게 사는 잠자리와 천천히 움직이는 무당개구리가 계절을 알린다. 물 위를 스케이터처럼 달려가는 소금쟁이와 멀티태스킹의 귀재 알락할미새도 여름의 주인공이다. 가을은 모두에게 분주한 계절이다. 메뚜기들은 짝짓기를 하려고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거미들도 여기저기 거미줄을 늘어놓느라 바쁘다. 전깃줄에 음표처럼 모여 앉은 제비들과, 블랙의 품격을 갖춘 까마귀, 최후의 발악인 양 울어 대는 말매미들도 가을을 장식한다. 겨울엔 살아 있는 동물을 만나기 어렵다. 눈 위에 남은 산토끼 발자국, 너구리와 족제비의 똥 같은 흔적으로 그들의 존재를 짐작할 뿐이다. 그래도 순천만과 우포늪에는 겨울의 진객들이 찾아온다. 순천만의 흑두루미, 우포늪의 큰기러기는 겨울에만 만날 수 있는 거대한 생명력이다. 사계절의 변화는 동물들과 함께하며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고, 평범한 동물들의 살아 있는 몸짓은 놀라운 감동을 전한다. 자연에는 무엇 하나 대단하지 않은 것이 없고, 또 그렇게 대단하지 않으면 자연에서 살아나갈 수 없다. 최종욱 수의사는 단지 동물들을 눈으로 관찰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을 마음으로 환대한다. 사소한 움직임에서도 의미를 찾고, 그들의 삶을 상상하며 어떻게 그들과 평화로이 공존할 것인지 조심스레 방법을 찾는다. 동물을 대하는 겸손한 태도와 자연을 아끼는 마음이 은은한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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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의 상징 베를린은 어떻게 세계 문화의 중심이 되었나 냉전을 무너뜨린 일상의 힘에서 분단 극복의 희망을 찾는다 베를린장벽 붕괴(1989) 및 독일 재통일(1990) 30주년을 맞아 ‘냉전체제의 상징’에서 ‘분단극복의 모델’이자 ‘세계문화의 중심’이 된 도시 베를린의 극적인 변모 과정을 복원해낸 『베를린, 베를린』이 출간되었다. 2차대전 이후 베를린은 냉전체제의 최전선으로서 40년을 보냈다. 당시 동독 영토 한가운데 떠 있는 섬과 같았던 서베를린은 동서독의 갈등 원인이기도 했지만, 양측 정부로 하여금 교류를 모색하게 만드는 이유이기도 했다. 저자 이은정(베를린자유대학교 한국학과 교수)은 1945년 2차대전 종료부터 2019년 현재까지 독일 통일의 역사적 순간을 두루 살피면서 이제껏 뚜렷이 드러나지 않았던 베를린 주민들의 생활상과 동서독 교류의 구체적 양상, 당국 간 협상의 막전막후를 생생하게 추적한다. 국내외의 기존 관련 도서가 대부분 베를린장벽 붕괴 전후의 지정학을 주목하거나 정치지도자의 관점에서 서술하는 데 반해, 이 책은 1984년부터 독일에서 생활해온 저자가 방대한 자료를 직접 살피고 관계자 인터뷰를 통해 분단된 베를린의 실상을 입체적이고 균형감 있게 집약해냈다. 베를린과 독일의 경험을 바탕으로 남북협력 방안의 구체적 로드맵을 연구하고 한반도 평화구축 문제를 세계정세 속에서 파악해온 저자는 대립하는 두 체제 간의 타협과 협력, 끊임없는 교류가 결국 독일 통일의 원동력이었음을 드러낸다. 촛불혁명의 힘으로 급진전을 이룬 남북관계를 소통과 교류의 방향으로 전환시킬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나침반 같은 의미를 제공할 책이라 기대한다. 분단도시 베를린을 둘러싼 다양한 힘의 경합을 그려내다 2019년 11월 9일은 베를린장벽이 붕괴된 지 30년이 되는 날이다. 베를린장벽 붕괴 11개월 뒤 독일은 전세계에 통일을 공식 선언했다. 통일 이후 독일은 유럽연합의 맹주이자 세계 4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고, 통일독일의 수도가 된 베를린은 문화와 예술이 가장 자유롭게 펼쳐지는 도시로 자리잡았다. 『베를린, 베를린』은 아픈 역사를 딛고 오늘날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문화도시가 된 베를린의 변화를 추적하면서, 이러한 변화가 과거와 현재의 단절이 아니라 연속선상에 있음을 밝혀낸다. 지금의 베를린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 이은정은 동독의 한가운데에 있는 베를린이 어째서 동독의 도시로 귀속되지 못하고 동서로 분단되었는지 그 과정을 1장 ‘독일의 분단과 베를린’에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베를린의 분단이 기정사실화되기까지 찾아온 두차례의 위기 ‘베를린 봉쇄’(1948.6~1949.5)와 ‘베를린 최후통첩’(1959.1)은 미국과 소련, 두 냉전세력의 대결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베를린 최후통첩 당시 베를린을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힘겨루기가 격화되어 ‘핵전쟁’까지 거론되었지만 실제 전쟁으로 이어지진 않았는데 베를린에서의 전쟁은 유럽 안보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고 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질 위험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베를린은 강대국의 타협 아래 분단을 맞았고, 이러한 맥락 속에서 형성된 동서베를린은 통일이 될 때까지 내내 갈등을 빚는 원인이기도 했지만 동독과 서독을 연결해주는 가교가 되기도 했음을 저자는 구체적 사례를 통해 증명해 보인다. 베를린 문제는 동독과 서독 간의 문제만이 아니었고 냉전 당시 세계정세를 주도하던 미국과 소련, 동서진영이 만들어내는 갈등 속에서 변화하고 발전했다. 하지만 그러한 세계정세의 체제에 종속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베를린에서 일상을 살아내던 주민들의 열망, 그리고 분단으로 겪는 주민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베를린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정치인들의 원칙 속에서 베를린은 독자적이고도 실용적인 해결 방법을 모색해냈다. 저자 이은정은 동독과 서독, 정부와 주민, 세계정세와 독일정치 등 베를린 문제를 둘러싼 여러 주체들을 균형 잡힌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이 각각의 주체가 만들어낸 동서베를린의 분단의 장면들을 풍성하게 그려낸다. 분단이라는 정치적 구획을 초월하는 일상과 생활의 힘 『베를린, 베를린』에서 특히 흥미로운 대목은 분단 당시 동서베를린 주민들이 어떻게 분단을 의식하며 살았는지 그 생활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 2장 ‘차단이 아닌 분단’ 3장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 저자는 분단도 막을 수 없었던 동서베를린 주민들의 출퇴근과 경제활동, 삼엄한 감시와 검열 속에서도 왕래하던 우편통신, 실무적·기술적 차원의 협력을 가능하게 한 하수도 시설, 일상적인 접촉과 교류를 만들어낸 대중교통 체계 등을 섬세하게 포착해 동서독 교류사를 흥미롭게 풀어낸다. 같은 일터에서 동서독 주민이 함께 일하는 광경을 묘사한 부분이나 도시철도를 타고 경계를 넘어 이동하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던 주민들의 경험을 읽다보면, 분단이라는 정치적 구획을 초월하는 일상과 생활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또한 19세기에 이미 베를린 전체에 구축되어 있던 인프라망(우편체계, 상하수도, 도시철도 등)은 분단되었다고 바로 폐기하거나 차단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에 분단 이후에도 적절한 방식으로 사용되었다. 물론 이러한 시설들이 반드시 탈정치적인 목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때로는 동독과 서독이 자신의 체제를 선전하는 도구로 이용했고, 동서독 간의 관계가 경색될 경우 사용이 통제되기도 했지만, 시설을 유지하고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실무자 간의 교류와 협상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작성된 협상문들과 논의 내용을 꼼꼼히 분석하면서 서베를린과 동독이 합리적인 접근 방법으로 문제를 풀기 위해 노력했고, 정치적으로 충돌할 수 있는 사안은 배제한 채 기술적 교류에 집중했음을 밝혀낸다. 이러한 최소한의 소통이 베를린장벽이라는 거대한 분단의 벽에 끊임없이 구멍을 내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냉전 속에서도 합의점을 만들어낸 협상의 기술을 파헤치다 이 책의 또다른 백미는 정치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긴장감 넘치는 협상 과정과 극적인 타협의 순간들이다. 저자는 4장 ‘장벽, 접근을 통한 변화의 시작’에서 네개의 협정을 맺는 과정을 다루고 있는데, 통행증협정‧4대국협정‧통과협정‧여행방문협정을 거치면서 동독과 서독(서베를린)이 합의가 불가능한 부분을 인지하고 합의가 가능한 사안부터 협상을 이끌어내는 과정이 인상적으로 펼쳐진다. 양측의 협상 과정에서 가장 합의하기 힘들었던 문제는 베를린의 법적 지위에 대한 부분이었다. 소련과 동독은 동베를린을 동독의 수도로 정하고 서베를린을 독립된 주권적 단위로 규정해 서독과 분리시키려 했다. 이와 달리 서독과 서방연합국은 동서베를린 전체에 대한 연합국의 공동관리 원칙을 고수하며, 서베를린을 서독 연방주의 하나로 간주했다. 이러한 명백한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협상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해관계가 대립하는 민감한 내용은 협상 테이블에 아예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베를린의 시장이었던 빌리 브란트는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정치인으로 꼽을 수 있다. ‘작은 걸음 정책’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처음부터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버리고, 한 걸음도 내딛지 않는 것보다는 작은 걸음이라도 내딛는 것이 좋다는 믿음 아래 추진한 브란트의 정책은 동서베를린, 더 나아가 동서독이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데 발판이 되어주었다. 독일 특유의 실용적 접근은 통일 이후에도 이어졌다. 현재 베를린에는 국립도서관, 국립대학, 예술극장 등이 모두 두개씩인데 이는 분단시절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의 대표 기관들을 한쪽으로 통합하거나 폐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원래의 역할을 유지하고 있는 여러 기관들 덕분에 베를린은 세계 그 어느 도시보다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도시가 되었다. 이는 분단이라는 어두운 경험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는 자양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적 태도, 실질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에 대한 합의점을 찾아나가는 실용적 관점은 분단체제 전환을 앞둔 우리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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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거장 똘스또이의 세계가 집약된 불멸의 고전 창비세계문학의 엄정한 번역으로 새롭게 만나는 ‘인생소설’ 1878년 출간된 이래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고 영화로 연극으로 뮤지컬로 발레로 끊임없이 변주되며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레프 니꼴라예비치 똘스또이의 대작 『안나 까레니나』(전3권)가 창비세계문학 70~72번으로 발간되었다. 농노제 붕괴 이후 급격한 변화를 마주한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현실이 어떻게 개인의 일상, 특히 가장 사적인 영역인 가정생활과 영향을 주고받는지 그린 작품이다. 당대의 시대상을 현미경처럼 재현하는 데서 나아가 인생의 모든 국면, 즉 탄생과 죽음, 성장과 쇠퇴, 일과 여가, 사랑과 결혼제도 등을 아우르며 시대를 초월해 의미를 더해왔다. 이야기의 큰 두 축은 정숙한 기혼 여성 안나와 젊은 백작 브론스끼의 불륜, 시골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귀족 레빈의 생활이지만, 10명이 넘는 중심인물과 150명이 넘는 주변인물의 이야기를 촘촘히 엮어낸 대가의 솜씨로 러시아 문학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똘스또이가 친구인 비평가 니꼴라이 스뜨라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진정한) 첫번째 소설’이라고 일컬었을 만큼 모든 것을 쏟아부은 작가의 ‘인생소설’이기도 하다. 국내 뿌시낀 권위자로 서정적이고 섬세한 번역을 선보여온 역자 최선(고려대 노문학과 명예교수)은 두가지 러이사어 판본(1963, 1981~82)과 영어판(1998, 2006), 독일어판(2009), 나보꼬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1981) 등을 참고하여 치밀한 번역에 입체적인 주석을 더해 텍스트를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작품해설’에서 각 부의 줄거리를 요약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들이 앞부분의 흐름을 잊지 않고 상기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창비판 『안나 까레니나』는 이 책을 처음 읽는 이들에게는 ‘인생소설’을 발견하는 기쁨을, 먼저 접했던 이들에게는 기존 판본과 다양한 해석을 비교하며 읽는 묘미를 선사할 것이다. 더불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성 주인공이자 오랜 세월 오도되어온 캐릭터이기도 했던 안나 까레니나를 새롭게 보기에 더없이 적절한 때이다. 시대의 공기를 포착하다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정수 소설 속에서 거론되는 실제 사건들은 러시아와 유럽 및 미국에서 1872년 2월부터 1876년 8월까지 일어난 일들이고, 소설 속 공간은 모스끄바, 뻬쩨르부르그, 러시아의 시골(레빈과 브론스끼의 영지), 독일의 온천도시, 이딸리아 소도시 등으로 당시 러시아인들에게 익숙했던 유럽을 포함한다. 소설은 19세기 후반 급변하는 러시아의 당면 문제들—농노제 폐지(1856) 이후 농촌의 경제적·사회적 상황, 새로운 경제구조와 함께 나타난 새로운 부유층의 부상, 새로이 도입된 지방자치의회 및 선거제도, 가정과 사회 속에서 여성의 위치 및 이혼, 당시의 관료사회 및 군대의 실상, 세르비아전쟁의 문제점 등을 다룰 뿐만 아니라, 러시아 귀족들의 일상—사교계 모습, 무도회, 클럽 활동, 경마, 사냥, 유행하던 학문, 음악, 미술, 종교, 사상과 주거형태, 음식, 교통수단, 심지어 의상과 머리모양까지 상세히 그려냈다. 사교계 생활, 군대 생활, 농지 경영, 자식의 죽음, 사냥, 유럽 여행 등 소설의 소재 대부분이 똘스또이가 직접 경험하거나 보고 들은 일에 바탕을 두고 있다. 기차에 몸을 던진 여자의 이야기는 그의 이웃의 일로, 똘스또이가 직접 그 시신을 보았다고 한다. 그밖에도 등장인물 중에는 그의 지인들의 특성을 반영한 인물이 많다고 한다. 이런 핍진성이 수많은 작가와 독자 들이 『안나 까레니나』를 ‘역대 최고의 소설’로 주저 없이 꼽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행복한 가정들은 모두 서로서로 닮았고 불행한 가정들은 각각 나름대로 불행하다” 가정생활을 중심으로 인생의 전모를 그리다 이 소설은 인간의 탄생에서 성장과정을 거쳐 연애 및 결혼,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생 전체를 그린다. 사건들이 인물들의 유전적 요소 및 교육, 지위, 일, 주거공간 등 환경적 요소와 빈틈없이 얽혀 생생하게 그려져, 독자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호감 가는 인물이든 그렇지 않은 인물이든 모두 마치 바로 옆에서 보고 듣고 겪는 것처럼 느끼며 그들의 인생 전체에 눈을 돌리게 된다. 『안나 까레니나』를 읽은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삶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똘스또이의 뛰어난 심리묘사가 등장인물 모두의 감정과 행동을 속속들이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주요인물뿐만 아니라 리지야 백작부인이나 벳시, 스비야시스끼, 레빈의 두 형, 심지어 외국에서 온 왕자, 유모나 하인 같은 주변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면서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성찰을 시작한다. 제2부 말미에 나오는 끼찌의 자기이해나, 처한 현실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용한 행동을 하는 것이 가장 알찬 삶이라는 레빈의 깨달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소설을 읽을 독자들도 마찬가지로 타인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자기이해와 성찰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자기성찰의 시간과 기회가 요원한 이 시대에 인생 전체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하는 이 소설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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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거장 똘스또이의 세계가 집약된 불멸의 고전 창비세계문학의 엄정한 번역으로 새롭게 만나는 ‘인생소설’ 1878년 출간된 이래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고 영화로 연극으로 뮤지컬로 발레로 끊임없이 변주되며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레프 니꼴라예비치 똘스또이의 대작 『안나 까레니나』(전3권)가 창비세계문학 70~72번으로 발간되었다. 농노제 붕괴 이후 급격한 변화를 마주한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현실이 어떻게 개인의 일상, 특히 가장 사적인 영역인 가정생활과 영향을 주고받는지 그린 작품이다. 당대의 시대상을 현미경처럼 재현하는 데서 나아가 인생의 모든 국면, 즉 탄생과 죽음, 성장과 쇠퇴, 일과 여가, 사랑과 결혼제도 등을 아우르며 시대를 초월해 의미를 더해왔다. 이야기의 큰 두 축은 정숙한 기혼 여성 안나와 젊은 백작 브론스끼의 불륜, 시골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귀족 레빈의 생활이지만, 10명이 넘는 중심인물과 150명이 넘는 주변인물의 이야기를 촘촘히 엮어낸 대가의 솜씨로 러시아 문학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똘스또이가 친구인 비평가 니꼴라이 스뜨라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진정한) 첫번째 소설’이라고 일컬었을 만큼 모든 것을 쏟아부은 작가의 ‘인생소설’이기도 하다. 국내 뿌시낀 권위자로 서정적이고 섬세한 번역을 선보여온 역자 최선(고려대 노문학과 명예교수)은 두가지 러이사어 판본(1963, 1981~82)과 영어판(1998, 2006), 독일어판(2009), 나보꼬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1981) 등을 참고하여 치밀한 번역에 입체적인 주석을 더해 텍스트를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작품해설’에서 각 부의 줄거리를 요약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들이 앞부분의 흐름을 잊지 않고 상기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창비판 『안나 까레니나』는 이 책을 처음 읽는 이들에게는 ‘인생소설’을 발견하는 기쁨을, 먼저 접했던 이들에게는 기존 판본과 다양한 해석을 비교하며 읽는 묘미를 선사할 것이다. 더불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성 주인공이자 오랜 세월 오도되어온 캐릭터이기도 했던 안나 까레니나를 새롭게 보기에 더없이 적절한 때이다. 시대의 공기를 포착하다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정수 소설 속에서 거론되는 실제 사건들은 러시아와 유럽 및 미국에서 1872년 2월부터 1876년 8월까지 일어난 일들이고, 소설 속 공간은 모스끄바, 뻬쩨르부르그, 러시아의 시골(레빈과 브론스끼의 영지), 독일의 온천도시, 이딸리아 소도시 등으로 당시 러시아인들에게 익숙했던 유럽을 포함한다. 소설은 19세기 후반 급변하는 러시아의 당면 문제들—농노제 폐지(1856) 이후 농촌의 경제적·사회적 상황, 새로운 경제구조와 함께 나타난 새로운 부유층의 부상, 새로이 도입된 지방자치의회 및 선거제도, 가정과 사회 속에서 여성의 위치 및 이혼, 당시의 관료사회 및 군대의 실상, 세르비아전쟁의 문제점 등을 다룰 뿐만 아니라, 러시아 귀족들의 일상—사교계 모습, 무도회, 클럽 활동, 경마, 사냥, 유행하던 학문, 음악, 미술, 종교, 사상과 주거형태, 음식, 교통수단, 심지어 의상과 머리모양까지 상세히 그려냈다. 사교계 생활, 군대 생활, 농지 경영, 자식의 죽음, 사냥, 유럽 여행 등 소설의 소재 대부분이 똘스또이가 직접 경험하거나 보고 들은 일에 바탕을 두고 있다. 기차에 몸을 던진 여자의 이야기는 그의 이웃의 일로, 똘스또이가 직접 그 시신을 보았다고 한다. 그밖에도 등장인물 중에는 그의 지인들의 특성을 반영한 인물이 많다고 한다. 이런 핍진성이 수많은 작가와 독자 들이 『안나 까레니나』를 ‘역대 최고의 소설’로 주저 없이 꼽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행복한 가정들은 모두 서로서로 닮았고 불행한 가정들은 각각 나름대로 불행하다” 가정생활을 중심으로 인생의 전모를 그리다 이 소설은 인간의 탄생에서 성장과정을 거쳐 연애 및 결혼,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생 전체를 그린다. 사건들이 인물들의 유전적 요소 및 교육, 지위, 일, 주거공간 등 환경적 요소와 빈틈없이 얽혀 생생하게 그려져, 독자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호감 가는 인물이든 그렇지 않은 인물이든 모두 마치 바로 옆에서 보고 듣고 겪는 것처럼 느끼며 그들의 인생 전체에 눈을 돌리게 된다. 『안나 까레니나』를 읽은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삶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똘스또이의 뛰어난 심리묘사가 등장인물 모두의 감정과 행동을 속속들이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주요인물뿐만 아니라 리지야 백작부인이나 벳시, 스비야시스끼, 레빈의 두 형, 심지어 외국에서 온 왕자, 유모나 하인 같은 주변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면서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성찰을 시작한다. 제2부 말미에 나오는 끼찌의 자기이해나, 처한 현실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용한 행동을 하는 것이 가장 알찬 삶이라는 레빈의 깨달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소설을 읽을 독자들도 마찬가지로 타인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자기이해와 성찰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자기성찰의 시간과 기회가 요원한 이 시대에 인생 전체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하는 이 소설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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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거장 똘스또이의 세계가 집약된 불멸의 고전 창비세계문학의 엄정한 번역으로 새롭게 만나는 ‘인생소설’ 1878년 출간된 이래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고 영화로 연극으로 뮤지컬로 발레로 끊임없이 변주되며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레프 니꼴라예비치 똘스또이의 대작 『안나 까레니나』(전3권)가 창비세계문학 70~72번으로 발간되었다. 농노제 붕괴 이후 급격한 변화를 마주한 19세기 후반 러시아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현실이 어떻게 개인의 일상, 특히 가장 사적인 영역인 가정생활과 영향을 주고받는지 그린 작품이다. 당대의 시대상을 현미경처럼 재현하는 데서 나아가 인생의 모든 국면, 즉 탄생과 죽음, 성장과 쇠퇴, 일과 여가, 사랑과 결혼제도 등을 아우르며 시대를 초월해 의미를 더해왔다. 이야기의 큰 두 축은 정숙한 기혼 여성 안나와 젊은 백작 브론스끼의 불륜, 시골에서 농장을 운영하는 귀족 레빈의 생활이지만, 10명이 넘는 중심인물과 150명이 넘는 주변인물의 이야기를 촘촘히 엮어낸 대가의 솜씨로 러시아 문학의 진수를 느낄 수 있다. 똘스또이가 친구인 비평가 니꼴라이 스뜨라호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진정한) 첫번째 소설’이라고 일컬었을 만큼 모든 것을 쏟아부은 작가의 ‘인생소설’이기도 하다. 국내 뿌시낀 권위자로 서정적이고 섬세한 번역을 선보여온 역자 최선(고려대 노문학과 명예교수)은 두가지 러이사어 판본(1963, 1981~82)과 영어판(1998, 2006), 독일어판(2009), 나보꼬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1981) 등을 참고하여 치밀한 번역에 입체적인 주석을 더해 텍스트를 더욱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작품해설’에서 각 부의 줄거리를 요약하여 오랜 시간에 걸쳐 이 책을 읽게 될 독자들이 앞부분의 흐름을 잊지 않고 상기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창비판 『안나 까레니나』는 이 책을 처음 읽는 이들에게는 ‘인생소설’을 발견하는 기쁨을, 먼저 접했던 이들에게는 기존 판본과 다양한 해석을 비교하며 읽는 묘미를 선사할 것이다. 더불어 역사상 가장 유명한 여성 주인공이자 오랜 세월 오도되어온 캐릭터이기도 했던 안나 까레니나를 새롭게 보기에 더없이 적절한 때이다. 시대의 공기를 포착하다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정수 소설 속에서 거론되는 실제 사건들은 러시아와 유럽 및 미국에서 1872년 2월부터 1876년 8월까지 일어난 일들이고, 소설 속 공간은 모스끄바, 뻬쩨르부르그, 러시아의 시골(레빈과 브론스끼의 영지), 독일의 온천도시, 이딸리아 소도시 등으로 당시 러시아인들에게 익숙했던 유럽을 포함한다. 소설은 19세기 후반 급변하는 러시아의 당면 문제들—농노제 폐지(1856) 이후 농촌의 경제적·사회적 상황, 새로운 경제구조와 함께 나타난 새로운 부유층의 부상, 새로이 도입된 지방자치의회 및 선거제도, 가정과 사회 속에서 여성의 위치 및 이혼, 당시의 관료사회 및 군대의 실상, 세르비아전쟁의 문제점 등을 다룰 뿐만 아니라, 러시아 귀족들의 일상—사교계 모습, 무도회, 클럽 활동, 경마, 사냥, 유행하던 학문, 음악, 미술, 종교, 사상과 주거형태, 음식, 교통수단, 심지어 의상과 머리모양까지 상세히 그려냈다. 사교계 생활, 군대 생활, 농지 경영, 자식의 죽음, 사냥, 유럽 여행 등 소설의 소재 대부분이 똘스또이가 직접 경험하거나 보고 들은 일에 바탕을 두고 있다. 기차에 몸을 던진 여자의 이야기는 그의 이웃의 일로, 똘스또이가 직접 그 시신을 보았다고 한다. 그밖에도 등장인물 중에는 그의 지인들의 특성을 반영한 인물이 많다고 한다. 이런 핍진성이 수많은 작가와 독자 들이 『안나 까레니나』를 ‘역대 최고의 소설’로 주저 없이 꼽는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행복한 가정들은 모두 서로서로 닮았고 불행한 가정들은 각각 나름대로 불행하다” 가정생활을 중심으로 인생의 전모를 그리다 이 소설은 인간의 탄생에서 성장과정을 거쳐 연애 및 결혼,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생 전체를 그린다. 사건들이 인물들의 유전적 요소 및 교육, 지위, 일, 주거공간 등 환경적 요소와 빈틈없이 얽혀 생생하게 그려져, 독자는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호감 가는 인물이든 그렇지 않은 인물이든 모두 마치 바로 옆에서 보고 듣고 겪는 것처럼 느끼며 그들의 인생 전체에 눈을 돌리게 된다. 『안나 까레니나』를 읽은 독자들은 이 소설을 읽고 나서 삶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가고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똘스또이의 뛰어난 심리묘사가 등장인물 모두의 감정과 행동을 속속들이 이해하도록 해주는 것이다. 주요인물뿐만 아니라 리지야 백작부인이나 벳시, 스비야시스끼, 레빈의 두 형, 심지어 외국에서 온 왕자, 유모나 하인 같은 주변인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타인을 이해하면서 비로소 자기 자신에 대한 이해와 성찰을 시작한다. 제2부 말미에 나오는 끼찌의 자기이해나, 처한 현실 속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용한 행동을 하는 것이 가장 알찬 삶이라는 레빈의 깨달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소설을 읽을 독자들도 마찬가지로 타인에 대한 이해와 더불어 자기이해와 성찰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자기성찰의 시간과 기회가 요원한 이 시대에 인생 전체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게 하는 이 소설은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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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로 사회를 깨운 어느 한 PD의 시대 증언 민주주의 암흑기, 시대를 울리고 시대와 함께 운 드라마를 돌아보다 「수사반장」「제1공화국」「땅」「간난이」… 1980~90년대, 사람들을 브라운관 앞으로 끌어모았던 화제작들을 탄생시킨 ‘스타PD 1세대’ 고석만 PD가 생각하는 TV드라마의 의의와 역할은 무엇일까? 민주주의가 억압당하던 시대에 드라마로 사회와 함께 호흡했던 고석만 PD의 시대 증언, 『나는 드라마로 시대를 기록했다』가 출간되었다. 군사독재정권은 수십년 동안 사회 전반에 걸쳐 억압과 통제를 자행했다. 가장 대중적인 언론매체인 TV도 통제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강요받았다. 하지만 ‘공영방송의 책무는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다’라는 독일 헌법재판소의 판결문을 마음속에 새기고 있던 저자는 드라마를 사회의 민낯을 비추는 거울, 시대를 고발하고 깨우는 도구로 사용하고자 했다. 그것이 스스로 ‘시대의 첨병’ 역할을 자임했던 그가 이 사회를 위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이었다. 책의 내용은 숱한 억압과 중단의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제작 중단과 조기종영, 대본의 사전 검열, 석연찮은 기획 무산 등의 굴욕과 고난을 거치면서도 저자는 드라마를 통해 사회의 어두운 곳을 비추며 시대를 울리는 일을 계속했다. 민주주의와 한국 사회를 위해 자신의 영역에서 굴하지 않고 싸우는 일은 외로운 길이었지만, 저자는 그 시간을 ‘순례길 같은 깨우침’을 얻게 된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엄혹했던 독재정권이 사라진 지금에도 아직 요원한 민주주의 사회를 바라보며 저자가 되짚는 ‘굴절시대’에 대한 증언은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저자가 연출한 드라마와 같은 시대를 관통하며 울분을 공유했던 이들, 점차 단순한 오락거리로만 소비되는 TV의 현재를 걱정하는 이들, 언론의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시민들과 언론인들에게 이 책은 공감과 울림을 주는 ‘또 하나의 드라마’로 다가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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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과 지혜를 선사하는 ‘인간’ 정약용의 말들 40년간 사랑받은 스테디셀러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개정판 출시 초판이 나온 1979년 이래 다산 정약용을 만나는 가장 친절한 통로 역할을 해온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가 초판 발간 40주년을 기념해 새롭게 정비된 모습으로 출간되었다. 정약용이 유배 시기 절절하고 따뜻한 마음을 담아 가족과 지인들에게 보낸 서신들을 엮은 이 책은 대학자 이전의 인간적인 다산의 면모를 만날 수 있어 오늘날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받는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지방관 이종영에게 주는 글을 새롭게 추가했고, 시대 변화에 맞추어 번역과 체제, 장정을 정비했다. 이제 막 고전을 접하기 시작하는 청소년과 정약용을 처음 읽는 독자들에게 더욱더 오래 사랑받는 입문서로 남기 위한 새 단장이다. 이 책의 편역자이자 대표적 다산학 연구자인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은 다섯 번째 개정판을 출간하면서 “세상에 공개하려고 저술한 책에서는 인간 다산의 속마음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지만 아들‧형님‧제자들에게 보낸 그의 사신(私信)에는 깊은 속마음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는 말을 남겼다. 불운한 환경 속에서도 생활인이자 소통하는 지식인으로서 아름다운 말들을 남겼던 다산의 자취를 이 책 전체에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40년간 4차례의 개정을 거치면서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를 끊임없이 가꿔온 박석무 이사장은 70년대에 이 책을 엮어냄으로써 ‘다산 전문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대학원 과정에서 다산의 법사상으로 졸업논문을 작성했으나, 정작 그가 가슴으로 다산을 받아들인 것은 자신의 삶이 격랑에 휩싸이면서부터였다. 4차례나 옥고를 치렀던 그는 어둡고 불안한 감옥생활에서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손에서 다산을 놓지 않았다. 18년 유배생활 속에서 학문을 성숙시킨 다산처럼 그의 다산 연구도 감옥 안에서 영글었던 것이다. 200년이라는 시차를 사이에 두고 각각 시대의 고뇌와 민중의 아픔을 껴안고 고민해온 두 학자의 소통이 이 책에 오롯이 담겨 있다. “한때의 재해를 당했다 하여 청운의 뜻을 꺾어서는 안 된다” 어려움을 이겨내는 기개, 진실한 마음 이 책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둘째형님께 보낸 편지/제자들에게 당부하는 말,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각 부에는 아들들이 좌절하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기를 입에 닳도록 이야기하는 모습(1~2부), 다산과 마찬가지로 귀양살이를 했던 둘째 형님 정약전을 안부를 물으며 깊고 넓게 학문을 토론하는 모습(3부), 제자들의 장래를 걱정하여 온갖 지혜를 전수하려는 모습(4부)이 각각 담겨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것은 단연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아들들에게 주는 편지글이다. 다산은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아들 학연(學淵)과 학유(學游)가 실의에 빠지지 않도록 늘 엄격하게 격려했다. 이 편지들에는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슨 공부를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빛나는 명언들과 함께, 불의와 조금도 타협하지 않는 다산의 매서운 선비정신이 담겨 있다. 편지를 읽다보면 참다운 길을 가도록 준엄하게 꾸짖는 다산의 음성이 귓전에 들리는 듯하지만, 그 속에는 애끊는 부정(父情)이 넘친다. 또한 어렵고 어두운 유배생활에서 자신의 고달픈 삶을 토로하지 않으면서도 아들들이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아버지의 바람을 자상히 기술하고 있어 마음을 울린다. 몰락했다 하여 자신의 일가를 스스로 ‘폐족’이라고 부르고, 그런 폐족일수록 독서와 공부에 더욱 노력해야만 함을 거듭 강조하는 대목에서는 아버지이자 주변부 선비인 다산이 느꼈을 인생의 쓴맛이 느껴지는 듯하다. 그러나 패배감에 그치지 않고 더 올곧은 삶을 살아가기로 결심하고 그것을 아들들에게 권하는 모습에서는 다산다운 강인한 기개가 느껴진다. 제2부 ‘두 아들에게 주는 가훈’에는 생계를 꾸리는 방법, 친구를 사귈 때 가려야 할 일, 친척끼리 화목하게 지내는 방법 등 다산의 생활철학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다산 자신의 저서를 후세에 전해달라는 전언과 함께 저술의 과정과 원칙을 정제해 제시하고 있어, 다산 사상의 큰 줄기를 압축해놓은 글로 읽기에 유익하다. 귀양살이 중에도 잃지 않은 선비의 자세 지금 더 절실하게 다가오는 200년 전의 가르침 제3부에는 정약용의 강진 유배와 비슷한 시기에 흑산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둘째형님 정약전에게 보낸 편지들을 실었다. 이들 형제는 유배 중에서도 서간을 주고받으며 변함없는 우애를 나누었다. 정약용은 자신보다 더 외로운 유배생활을 하고 있는 형님의 건강을 염려하고 지극한 마음을 전한다. 특히 두 형제는 심도있는 학문 주제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으며 유배지에서도 학자로서의 자세를 잃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성실함을 바탕으로 『목민심서』 등 정약용의 빛나는 저작들이 탄생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형과 아우가 동시에 불행한 유배생활을 하면서도 이에 굴하지 않고 서로 학문적 깊이에 탄복하며 인생을 토로한 높은 수준의 서간문학이다. 제4부는 정약용이 제자와 지인에게 써 보낸 글을 선별한 것으로, 자상한 스승의 마음씨와 더불어 다산의 넓고 깊은 학문세계가 드러난다. 학승 초의선사를 제자로 삼고 시와 선에 대한 깊은 담론을 펼친 것은 너무도 훌륭한 문학론이며, 19세의 어린 소년으로 해배 후 찾아온 이인영에게 해준 이야기는 뛰어난 문장론이다. 지방관 이종영에게 남긴 두 편의 글은 목민관의 자세를 다룬 내용을 담아 『목민심서』의 축약처럼 읽힌다. 특히 이 편지들은 다산이 실학자로서 얼마나 튼튼한 현실주의적 사고와 실학사상을 지녔는지 보여준다. 과거제도를 맹렬히 비판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런 제도를 통해서만 벼슬길로 나아갈 수 있는 현실을 감안하여 과거공부에 힘을 기울이라고 주장하거나, 애써 힘든 길로 가지 말고 현실적인 지름길로 가라고 조언하는 대목 등이 그렇다. 진정한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무엇인지 혼란스러운 오늘날 곱씹어볼 말로 가득하다. 실천하는 지식인 다산 정약용이 남긴 ‘국민 교양서’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역경과 고뇌의 이야기 200여 년 전 척박한 남도 땅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한 외로운 학자의 편지가 이렇듯 오랜 기간 생명력을 가진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다산 정약용은 오늘날 조선 후기 최고의 사상가로 평가된다. 경학(經學)과 경세학(經世學)에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만큼 빛나는 저술들을 남겼고, 짧지만 출세를 통해 뛰어난 재능을 실천한 바도 있다. 추사 김정희, 정인보 등 후대의 학자들도 다산을 최고의 학자로 평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배생활 이후 별세할 때까지 삶의 긴 기간 그에게는 괴롭고 어려운 일들이 더 많았을 것이다. 우리가 이 편지들을 통해 읽을 수 있는 인간 정약용의 고통, 그리고 역경을 견디며 극복하는 적극적인 자세, 가족과 제자들을 돌보는 진솔한 내면은 그 어떤 다산의 책보다 깊은 감동을 선사해준다. 그리고 이런 단련의 과정이 있었기에 다산의 업적이 더욱 빛나고 가치있게 여겨지는 것이 아닐까? 이 책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에 독자들의 사랑이 끊이지 않는 비결도 거기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