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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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지 못할 뿐, 꿈이 없는 밤은 없다. 그 꿈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긴다면. 시인 신해욱이 선보이는 첫 소설 신비로운 언어로 그려내는 한편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꿈 정제된 언어와 독창적인 시세계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시인 신해욱이 처음으로 발표한 소설 『해몽전파사』가 출간되었다. 창비에서 새롭게 선보인 젊은 경장편 시리즈 ‘소설Q’의 다섯번째 책이다. 미스터리하면서도 아름다운 꿈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언어로 옮겨놓은 듯한 환상적인 소설로, 꿈을 교환하고 공유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비 오는 날 우연히 ‘해몽전파사’에 들르게 된 ‘나’는 주인에게 간밤에 꾸었던 꿈을 팔게 되고, 이를 계기로 해몽전파사에서 열리는 갖가지 꿈 모임에 참석하게 된다. 삶을 재료로 삼지만 삶보다 풍부하고 충만한 감각을 선사하는 꿈을 통해, 등장인물들은 더 넓은 지구와 더 깊은 우주를 체험하고 꿈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연대한다. “모든 꿈의 문학이 독자에게 요청하는 바는 결코 ‘나를 해몽하라’가 아니다. ‘너 역시 꿈꾸라’이다”(해설 윤경희)라는 말처럼, 이 책은 독자가 스스로 꿈꾸기를 바라며 건네는 초대장이다. “거래를 하자. 내가 죽기 전에 천개의 꿈을 모으면 이 가게를 줄게.” 이상하고 아름다운 꿈이 모이는 곳, 해몽전파사 비 오는 날 우연히 들른 해몽전파사, 충동적으로 주인인 진주씨에게 보낸 문자, 그리고 어쩐지 진주씨에게 이끌려 간밤의 꿈을 팔게 된 ‘나’. 소설은 꿈속의 한 장면처럼 신비롭게 시작된다. 해몽전파사에서는 꿈을 공유하거나 꿈에 대한 텍스트를 읽는 여러 모임이 열리고 ‘나’는 모임의 일원이 되어 스스로 꿈을 의식하고 기록하기 시작한다. 어느날 진주씨는 자신의 병을 고백하며 자신이 죽기 전에 천개의 꿈을 모아오면 가게를 넘기겠다는 제안을 하고, ‘나’는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꿈을 모으기 시작한다. 해몽전파사에 모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소설의 한 축이라면, 또다른 한 축은 바로 꿈 그 자체다. 신해욱은 꿈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낯설면서도 언젠가 만난 듯하고 기괴하면서도 아름다운 꿈속 이미지를 감각적인 언어로 생생하게 포착해낸다. 소설에 등장하는 46개의 꿈들은 각각 한편의 짧고 독창적인 동화 같기도 하고, 형체를 알 수 없지만 강렬한 감각을 전달하는 추상화 같기도 하다. 꿈을 소재로 삼은 글이 아닌, 꿈 그 자체를 옮겨보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다양한 꿈속을 직접 경험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꿈은 돌멩이처럼 가라앉는다. 어떤 꿈은 아스피린처럼 녹는다. 어떤 꿈은 페이스트리처럼 부서지고. 어떤 꿈은 낙엽처럼 쓸려가고. 쓸려갔다가 밀려오는 잔해. 가라앉았다가 떠오르는 조각. 다 녹고 난 다음의 마른 자국. (112면) “기다려라. 뿔과 뿔 사이에 통로가 열릴 때까지.” 나의 꿈과 당신의 꿈이 이어지는 세계 소설 초반에는 ‘나’의 꿈이 주로 소개되지만, 소설 중반부터는 진주씨, 설아씨, 삼월씨의 꿈이 주로 소개된다. 그러면서 서로의 꿈과 꿈은 겹치기도 하고 이어지기도 하며 증폭된다. 마치 ‘나’가 설아씨의 꿈속에 있던 것처럼, 처음 보는 삼월씨를 이미 오래전 꿈속에서 만난 적 있던 것처럼. 진주씨의 병과 설아씨 어머니의 병은 피 흐르는 꿈으로 이어지고, 설아씨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나’가 꿈에서 어머니를 만나는 꿈으로 현현된다. 꿈은 등장인물들을 엮고 이어주며, 서로는 꿈을 통해 위로를 건네고 쉽게 말하지 못하는 고통을 나눈다. 결국 해몽전파사가 바라는 세계는 ‘함께 꿈꾸는 세계’다. 개인의 꿈을 해몽하는 것이 아닌, 꿈을 그저 꿈으로 기록하여 그 자체를 공유하는 세계, 꿈을 통해 타인에게 다가가는 세계. 꿈을 나누며 연대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독자들은 신해욱이 그리는 ‘꿈의 지표면으로 이루어진 다른 지구’에 접속할 수 있을 것이다. 해몽전파사 사람들은 꿈 이야기와 삶의 이야기를 공유하면서 그것을 재료로 꿈꾸기를 지속한다. 무엇인지 모를 욕망을 실현하는 잠 속의 꿈뿐만 아니라 현실의 삶을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려는 꿈. (…) 우리는 고립되지 않았다. 꿈으로 연대한다. 덧없는 허상이 아니라 염려하고 북돋는 동료애의 꿈으로. (해설, 260-6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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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염된 세계, 끔찍한 벙커에서도 삶은 계속된다 한국문학의 독보적인 스타일리스트 강영숙의 신작 한국일보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하며 불안과 피로, 권태가 상존하는 현실을 감각적으로 그리고 특유의 과감한 필치로 생의 누추를 탐구해온 소설가 강영숙의 네번째 장편소설 『부림지구 벙커X』가 출간되었다. 일찍이 가뭄, 해일, 황사, 바이러스 등의 소재를 예민하게 포착하고 여러차례 다뤄온 작가는 이번 장편소설에 이르러 지진이 휩쓸고 간 도시의 모습과 벙커 속에서도 끈질기게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선보인다. 매번 새로운 모습의 재난‧재해 앞에서 속수무책인 채 집단적 공포에 휩싸여 갈등과 혐오를 증폭시키는 최근 세태 속에서, 소설의 디스토피아적 풍경은 우리에게 멀지 않은 미래를 경고하듯 생생하게 다가오고 긴장감 넘치는 서사의 끝에는 벼락처럼 찾아와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놓은 재난, 그 이후에 대한 질문이 강렬하고 묵직하게 남는다. 부림지구의 모든 것을 파괴해버린 지진 압도적인 디스토피아적 풍경과 벙커에서의 삶 부림지구를 완전히 파괴해버린 지진 ‘빅 원’ 이후 일년이 지난 지금, 유진은 벙커에서 살고 있다. 화분에 꽂힌 풀처럼 땅속에 박혀 있다가 구출된 뒤 몇군데의 대피소를 전전하다가 정착한 곳이다. 무겁고 축축한 기운이 가득한 벙커 안에는 유진을 포함해 열명 남짓의 사람들이 외부로부터 간간히 보급되는 생존키트와 벙커 밖 쓸 만한 잔해에 의지하며 살고 있다. 『부림지구 벙커X』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지진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부림지구의 잿빛 가득한 풍경과 벙커에서의 삶이다. 도시와 재해라는 주제를 작품 속에서 꾸준히 다뤄온 강영숙은 이번 소설에서 재해의 면면을 한층 치열하고 생생하게 그려낸다. 특히 미세먼지, 대형 지진, 원전 사고 등 최근 몇년간 우리에게 트라우마로 남은 실제 재난의 기억들이 소설 속 풍경과 함께 뒤섞여 압도적인 장면들로 남는다. 유진을 비롯한 지진 ‘빅 원’의 생존자들이 벙커에 모여 살게 된 것은 지진 이후 정부가 부림지구를 오염지역으로 판단하고 고립시킨 탓이다. 오염지역의 이재민들이 부림지구를 떠나 근처의 N시로 이주하기 위해서는 몸에 생체인식 칩을 주입하고 ‘관리 대상’이 되어야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 그러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계속 벙커에 남아 있다. 부림지구에 사람 키 만한 기계장치를 들고 흰색 방역복 차림을 한 사람들이 돌아다니면서 벙커 사람들이 하나하나 사라지고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는데, 의지하던 사람들을 하나씩 N시로 떠나보낸 유진이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소설은 결말을 향해 빠르게 달려간다. 한편 작가는 탁월한 솜씨로 부림지구의 역사를 직조하며 ‘평범한 일상’이라는 표면 아래 이미 존재하던 균열과 격차를 끄집어내고, 사회적 계급과 약자의 자리를 한순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사건으로서의 지진을 사유한다. ‘빅 원’ 이전에 이미 쇠락의 길을 걷고 있던 부림지구는 한때 제철단지로 잠깐의 번영을 누렸지만 폐쇄, 재개발 계획 중단으로 버려진 성처럼 남아, 대도시에서 실패한 어중이떠중이, 몸이 아픈 사람, 갈 곳 없는 사람들만 모인 지역이다. 그 어느 지역보다도 크게 무너지고, 누구 하나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이 살던 부림지구를 빠르게 오염지역으로 고립, 방치하는 소설 속 정부의 모습은 허구의 설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적으로 다가오며 우리 사회 도처의 불평등을 환기한다. 부서진 일상은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살아 있다는 감각 이후에 오는 것들 그럼에도 삶은 계속된다. 벙커 안에서도 사람들은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하고, 우연히 발견한 와인을 마시며 파티를 한다. 어떻게 생활을 꾸려나갈지 고민하고, 벙커 밖으로 나가 생존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며 바쁘게 하루를 보낸다. 부림지구와 끔찍한 벙커의 삶을 버리고 N시로 가는 방법은 있다. 동시에 유진과 벙커 사람들에게는 삶의 방식을, 모습을 선택할 권리도 있다. 유진은 어떤 삶을 선택하게 될까. 끔찍한 재난 이후에 살아 있다는 감각은 순간의 기쁨처럼 찾아오지만 무너진 일상을 누가, 어떻게 재건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은 하나하나 천천히, 절박하고 끈질기게 인간을 찾아온다. 작가는 지진 다발 지역인 샌프란시스코에 체류했던 2014년부터 이번 장편을 붙들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고, 이야기를 쌓아올리던 지난 7년간 재난‧재해는 매번 다른 얼굴을 하고 우리를 찾아왔다. 그 누구보다 오랫동안 천착해온 주제를 앞에 두고 작가는 “재해란 무엇인가, 재해가 과연 기회가 될 수 있을까”(작가의 말) 묻는다. 우리의 일상이 그 어느 때보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지금, 『부림지구 벙커X』는 멀지 않은 미래를 감지하고 긴요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강렬하게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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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무시하다 그리움이여 지워지지 않은 눈빛이여” 세상의 모든 눈빛들과 일상의 먼지들조차 감싸 안는 손택수의 신작 시집 등단 20여년 동안 네권의 시집을 상재한 중견 시인으로, 탄탄한 시세계를 펼쳐 보이는 손택수 시인의 신작 시집 붉은빛이 여전합니까가 출간되었다. 농경사회적 상상력과 민중적 삶의 풍경을 담금질해냈던 손택수는 이번 시집에서 현실의 간난신고나 일상의 먼지 같은 순간들조차 빛나게 하는 따뜻하고 살뜰한 시선을 보내는데, 단순히 세월과 연륜의 결과로만 해석할 수 없는 시적 경지에 이르렀다 평가할 만하다. 여백의 아름다움, 간결함의 미학, 풍성한 시적 리듬의 실험 등 다채로운 시적 향취를 선보이면서도 현실과 시인의 삶, 혹은 삶다운 삶에 대한 궁구를 게을리하지 않는 시정신이 돋보이는 시집의 탄생을 목도할 수 있다. 세월과 일상, 여유와 넉살로 빛난 손택수가 터득한 시적 경지 한 시인의 시세계를 한마디로 규정하기도 힘들겠지만, 시집을 펴낼 때마다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독자의 즐거움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손택수 시인의 경우 앞선 네 시집을 소개하는 문구들을 살펴본바 ‘가족과 고향’(호랑이 발자국) ‘민중적 시정과 대지의 삶’(목련 전차) ‘도시적 삶의 애환’(나무의 수사학) ‘삶의 안팎을 성찰하는 사유’(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였다. 강약의 변화와 시정의 폭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표현들이다. 그 여정을 거쳐, 다섯번째 시집에 이른 손택수는 한결 여유롭되 넉살이 늘었고, 힘은 빼되 간결함은 더한 시편을 써내려갔다. 시인의 여유와 넉살을 두고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송종원은 ‘무구함’으로 읽어낸다. “냉이꽃 뒤엔 냉이 열매가 보인다/작은 하트 모양이다 이걸 쉰 해 만에 알다니/봄날 냉이무침이나 냉잇국만 먹을 줄 알던 나”(「냉이꽃」)가 나이 쉰이 되어서 깨달은 것은 비록 하잖을지라도 그때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일 터이다. “벗의 집에 갔더니 기우뚱한 식탁 다리 밑에 책을 받쳐놓았다/주인 내외는 시집의 임자가 나라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차린 게 변변찮아 어떡하느냐며/불편한 내 표정에 엉뚱한 눈치를 보느라 애면글면”(「시집의 쓸모」)하는데, 시인은 책을 슬쩍 밀어버려 ‘고소한 복수’를 하는 짓궂은 상상을 하지만 결국 뜨끈한 된장국처럼 ‘상한 속’을 달래주는 시집의 ‘쓸모’에 공감한다. 송종원은 이번 손택수의 시집을 설명하는 몇가지 키워드 중에 ‘기쁨도 슬픔도 아닌, 아슴아슴 있는 일’이라는 표현을 택하기도 했다. 치열한 삶의 현장을 묵직하고 진지하게만 바라보던 시선이 한결 가벼워진 덕이라고 해석한다. “못물에 꽃을 뿌려/보조개를 파다//연못이 웃고/내가 웃다//연못가 바위들도 실실/물주름에 웃다”(「연못을 웃긴 일」)와 같은 시구들은 시각적인 단출함뿐 아니라 독자들조차 슬며시 웃게 만드는 상상력을 보이되 시로써 ‘삶의 풍요를 배울 기회’를 제공하는 미학적 경지를 보여준다. 시인이 터득한 경지에 은근슬쩍 독자들을 청하는 시인의 ‘너스레’와 ‘여유’가 느껴진다. 그 경지를 표현하는 다양한 형식과 끝을 알 수 없는 소재들은, 중견에 이르러 으레 도달한 ‘먼 곳’을 가리키는 수사학이 아니라 손택수 특유의 유순하지만 당당한 시선을 증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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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사람들은 인간과 세상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선사시대부터 삼국시대까지, 우리 고대에 뿌리내린 생각들 고분벽화와 암각화 연구의 권위자 전호태 교수의 안내로 우리 고대사상의 탄생을 돌아보는 『고대에서 도착한 생각들』이 출간되었다. 구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는 수만 년 동안 축적된 고대 한국인의 생각과 신앙을 일반 독자의 눈높이에 맞춰 담아냈다. 중요한 유물, 유적, 개념을 친절하게 소개하고, 동서양의 신화, 미술, 종교를 넘나들며 우리 고대의 사상을 입체적으로 설명해낸 이 책은 고대사 공부의 기본서로서는 물론, 가족이 함께하는 역사기행의 길잡이로도 안성맞춤이다. 특히 이 책은 아버지와 아들을 비롯해 여러 인물이 등장해 같이 유물을 살펴보고 대화를 나누는 형식을 취해 재미를 더했다. 또한 중간중간 유물과 사상이 생겨날 당시의 상황을 고대인의 시각으로 서술해 생동감 있는 1인칭의 시점으로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고대의 유물을 지금의 삶과 문화에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시대를 관통하는 문화적 통찰을 선사할 것이다. 유물이 전하는 선사시대 사람들의 삶과 신앙 1~4장은 구석기-신석기-청동기-(초기)철기시대로 이어지는 선사시대의 역사를 되짚는다. 문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물과 유적을 보며 역사적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 진석은 박물관의 전시실에서 각 시대별 대표적 유물을 차례로 살피며 선사시대의 삶을 만나고 상상한다. 여기서 이 책의 큰 장점이 드러나는데, 역사를 단순히 결과로서, 평면적으로 소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배우는 고대사 명제들이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기까지 학자들이 거쳐왔던 유추의 과정을 친절하게 보여준다. 고대사 전문가인 아버지의 목소리를 통해 박물관 진열장 속 ‘돌덩어리’들은 고대인들의 생활과 제의에 쓰인 도구로서 생생하게 다가온다. 문장 몇 마디로 정리되는 지식이 아니라 풍부한 자료, 합리적 유추와 상상력을 통해 고대인의 생각을 접할 수 있는 것이다.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청동기시대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고대인은 몇 가지 새로운 개념을 발견한다. 토기 제작과 농경으로 대표되는 신석기시대로 넘어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사고의 도약을 보여준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은 보이지 않지만 있다고 믿게 되는 존재, 즉 ‘신’을 발견한 것이다. 이들은 신전과 신상을 만들어 숭배의 제의를 수행하고, 세계의 근원을 탐구하며 내린 잠정적 결론으로서 신화를 만들었다. 죽은 뒤의 ‘내세’ 개념을 발명해 장례를 치르며 신에게 죽은 자의 내세를 지켜줄 것을 바라기도 했다. 신과 인간이 만나기 시작하며 그 과정에서 절대적 존재와 직접 소통하는 구별된 사람, 즉 ‘제사장’ 개념이 형성된다. 이러한 변화의 일련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고대인의 시각과 목소리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서 독자는 직접 신석기시대의 농사꾼, 청동기시대의 제사장이 되어 고대의 생각과 만난다. 한반도에 종교가 들어오다 후기 철기시대부터 삼국시대로 이어지는 후반부(6~14장)에서는 현대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종교와 사상이 본격적으로 소개된다. 청동기시대 이후 부족국가의 형성에 따라 현실의 권력관계가 중요해지면서, 창세신화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영웅신화의 시기가 도래한다. 고구려, 백제, 신라, 부여, 가야는 각자의 지배층이 지니는 우월함과 신성성을 부각하기 위해 시조의 영웅신화와 건국신화를 백성들에게 전파했다. 6~7장은 삼국시대가 형성되면서 만들어진 각 나라의 건국신화에 얽힌 이야깃거리들을 풀어낸다. 특히 영웅과 하늘이 신성시되는 이유, 동명왕신화와 가야 건국신화가 여러 갈래의 내용으로 전해지는 이유 등 피상적인 지식으로 신화를 접했을 때는 무심코 지나치게 되는 대목들을 짚어내며 신화의 목적과 상징성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8장에서는 샤먼이 가지는 사회적 영향력의 부침을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설명하며 샤머니즘의 원리와 흥망에 대해 말한다. ‘신과 만나는 사람’의 전통이 지금도 남아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떠올리며 읽어내려가다보면, 인간이 가진 근원의 두려움이나 한계가 시대나 문명과 큰 상관이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된다. 세계의 운행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등장한 음양오행론은 9장에서 설명된다. 저자는 음양오행론에 대해 그 단어 자체의 익숙함에 비해 이론의 내용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는 점을 지적하며 기본원리를 소개한다. 특히 음양오행론이 역사시대에 한반도에 자리 잡은 종교와 사상에 흡수되어 각각의 이론적 토대를 이루는 일부가 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10~14장에서는 한반도에 전파된 불교, 도교, 유교 사상의 주요한 가르침, 삼국에 유입되던 배경과 그에 따른 당시 사회상의 변화 등을 두루 살핀다. 특히 종교의 유입 과정과 그 흐름을 살핌으로써 삼국시대 당시 동아시아 외교의 단면까지 엿볼 수 있다. 불교, 도교, 유교는 같은 시기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종교라는 이유로 함께 묶이곤 하지만, 각각의 관심사나 시각은 판이하게 다르다. 하지만 중국 남조로부터 온 유불선 삼교 융합의 관념은 삼국시대 한반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삶의 길을 찾는 데 유불선을 가릴 것이 무엇이냐’라는 태도로 각 종교의 가르침을 깨달음의 도구로 사용하며 공존을 도모했던 당시의 모습을 보면, 여러 종교가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오늘날을 반성하게 된다. 인간과 하늘의 매개, 벽화 고대인들이 자신의 삶터와 죽음터에 그림을 남긴 것은 역사에서도 유독 흥미로운 대목이다. 저자는 교과서나 여러 역사책을 통해 단편적으로만 소개되어온 이 그림 미술을 전문가로서 자세히 설명한다. 알타미라, 라스코 등 구석기시대 동굴의 벽화는 당시 사람들의 생존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생존은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에만 달린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그림을 통해 강한 존재와 ‘함께 있기’를 원했고, 그 바람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리고 이러한 욕구는 자연스레 보이지 않는 존재와 초자연적 힘에 대한 동경과 두려움으로 연결됐다. 자연만물에 대한 숭배, ‘여신’ 개념과 형상화, 개인과 세상에 대한 고대인의 관점을 차례로 접하다보면, 고대인과 우리가 공히 자연이나 보이지 않는 존재 앞에서 약해지는 동시에 그것들을 해석하고자 애쓴다는 점을 발견하며 묘한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 저자는 전공분야인 암각화와 고분벽화에 대해서 각각 별도의 장을 마련해 더 깊은 이해를 돕는다. 구석기시대 동굴벽화에서 시작된 벽화미술의 흐름은 신석기~청동기시대의 암각화로 이어진다. 5장에서는 암각화가 남겨진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두 가족의 대화를 통해 암각화의 의미를 탐구한다. ‘암각화는 어디에 남겨질까’ ‘암각화는 무엇을 표현한 것일까’ 같은 질문을 던지며 선사시대 사람들이 제의와 그림을 통해 무엇을 추구하려 했는지 탐구해간다. 역사시대로 넘어가면서 그림은 무덤 안으로 자리가 옮겨졌다. 15장에서 설명하는 고분벽화는 역사시대 사람들의 내세관을 형성한 불교, 도교, 신선신앙 등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형태로 곳곳에 남겨졌다. 삼국시대 사람들은 죽은 사람이 내세에 강한 존재들의 보호를 받고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림의 내용을 정했다. 저자는 고분벽화를 살피며 단순히 내용을 돌아보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종교와 사상이 혼재되어 다양한 형태의 내세관이 제시되던 당시 사회 모습을 재구성한다. 아주 먼 사람들, 아주 가까운 생각들 현대인이 고대의 사상과 종교를 공부하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옛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들여다보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수천 년의 시간이 무색하리만큼 그들의 고민이 지금 우리의 것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저자는 “선사시대나 지금이나 논리적 전개 과정이 더 복잡해진 것 말고 사람이 세상을 보는 눈, 우주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이 질적으로 얼마나 크게 달라졌는지 확신하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고대의 생각들이 이렇듯 긴 생명력을 유지하는 힘은 어디서 나올까? 살아남는 것 이상을 생각할 여유가 많지 않던 고대부터 인간 삶을 근본적으로 성찰해온 것은, 그러한 행위가 실은 생존과 긴밀히 연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일 것이다. 당장 책에서 소개되는 종교와 사상은 오늘날 한국인의 의식 깊숙하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고대의 사상을 살펴보는 일은 저자가 말하듯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동아시아의 한반도와 그 인근에 정착해 주변 집단과 교류하고 환경을 감당하며 긴 시간 살아왔던 고대 한국인의 생각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자는 것이 이 책이 마지막으로 남기는 메시지다. 멀게 느껴졌던 고대의 생각들은 이미 우리에게 도착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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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했던 나에게 찾아온 마법 같은 공간, 게스트하우스 Q 『편의점 가는 기분』으로 학교 현장에서 많은 사랑을 받아 온 박영란 작가의 신작 장편소설 『게스트하우스 Q』가 창비청소년문학 94번으로 출간되었다. 갑작스레 가족의 파산과 해체를 겪은 고등학생 오정성이 고모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잠시 지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로, 주변 어른들의 사연을 곁에서 지켜보며 성숙해 가는 과정을 담백하게 그려 냈다. 박영란 작가는 그간 『편의점 가는 기분』과 『다정한 마음으로』 『못된 정신의 확산』 등 청소년소설을 활발히 펴내며 청소년과 우리 사회의 소외된 인물들에 주목해 왔다. 이번 작품에서는 ‘게스트하우스’라는 새로운 공간을 배경으로, 낯모르는 사람들이 오가는 장소 특유의 설렘과 불안을 포착한다. 작가는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일상이 어느 한 순간 예기치 않게 무너질 수 있음을 말하며, 그러나 실패했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실망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서로 보듬고 한 발짝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전한다. 지치고 실망한 마음들이 깃드는 공간, 게스트하우스 아버지의 죽음을 겪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열일곱 살 오정성. 정성이는 할머니와 함께 고모의 게스트하우스에 잠시 머무르게 되었다. 엄마와 언니는 작은 원룸에 두고 자신만 떨어져 지낸다는 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방학만 지내고 돌아갈 계획이다. 하지만 탐험가였다는 둥, 호텔 경영자였다는 둥 무성한 소문이 있는 기라 고모와 함께하는 일상은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 매일 아침 조식 준비를 돕고 날마다 새로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며 혼자만의 다락방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생활에 스며든다. 그런데 한 장기 투숙자가 두고 간 캐리어가 잔잔한 일상에 파문을 만들기 시작한다. 위험한 물건이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의심은 더욱 커지고, 고민 끝에 열어 본 캐리어에서는 금괴와 총이 발견된다. 이런 물건을 갖고 다니는 장기 투숙자는 대체 누구이고, 그는 왜 캐리어를 두고 갔을까? 장기 투숙자와 그를 쫓는 낯선 자, 그리고 고모의 숨은 과거 이야기가 펼쳐지면서 작품은 누구나 마주할 수 있는 실수와 실패를 담담히 조망한다. “우리는 조금 이상한 사람들일지는 몰라도 위험한 사람들은 아니에요.” 전작 『편의점 가는 기분』이 한밤의 편의점을 배경으로 소외된 존재들이 서로를 보듬는 공간을 담았다면, 이번 작품은 각기 사연을 품은 이들이 모인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상을 가까스로 유지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린다. 마치 여행지에서 먹는 달콤한 팬케이크 조식처럼 게스트하우스는 설렘을 품은 공간이기도 하지만, 매일 낯선 사람들이 오가기 때문에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위험이 도사린 공간이기도 하다. 다락 창고에 보관된 의심스러운 캐리어처럼. 그러나 불안은 사실 게스트하우스만이 아닌 모두의 삶 속에 녹아 있다. 별스럽지 않은 어떤 선택의 결과로, 또는 타인의 행동에 따른 결과를 받아 안은 사람들은 너도나도 큰 비용을 치르게 된다. 작가는 기라 고모와 할머니, 장기 투숙자 등 인물들의 사연을 통해 누구나 처할 수 있는 위험과 불안을 조명한다. 특히 지방 호텔에서 근무했던 기라 고모의 과거 사연은 ‘세상이 권한 선택지에서 벗어난 이들’의 삶을 반영한다. 세상에서 기대하는 역할과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이상한’ 삶이 되어 버리고, 이상한 것은 곧 위험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 『게스트하우스 Q』는 이상하고도 위험한 사람들을 모아 놓은 공간이다. “위험한 짓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보다 어떤 처지에 빠져 있는지가 더 중요한 거니까.” “우리는 조금 이상한 사람들일지는 몰라도 위험한 사람들은 아니에요.” “이상하다는 것과 위험하다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아.” (본문 72면) 정성껏 살아 내는 일상, 덤덤하지만 묵직한 위로 그러나 실망한 마음들이 모인 이곳 게스트하우스 Q에서 사람들은 소소하지만 묵직한 위안을 찾아낸다. 매일 아침 새로 짓는 도미밥처럼, 정성껏 사는 즐거움은 그런 위안의 원천이다. 할머니가 빈터에 심는 해바라기도 그런 즐거움과 멀지 않다. 공사가 임박해 곧 파헤쳐질 땅임을 알지만, 할머니의 해바라기밭은 사람들의 마음에 햇살을 밝혀 주는 공간이 된다.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둘러앉은 매일 아침의 식사처럼, 우리가 ‘함께’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적당한 온기로 몸과 마음을 채운 사람들은 다시 혼자의 시간을 살아갈 단단한 힘을 얻는다. “고모.” “응.” “아침에 계속 도미밥 지을 거예요?” “그래야지.” “아침마다 이렇게 정성을 들이는 이유가 있나요?”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매일매일 정성껏 사는 게 더 재미있어서가 아닐까?” “더, 요?” “정성 없이 사는 것보다 더!” (본문 197~98면) 『게스트하우스 Q』는 특히 아무렇지 않은 듯하게 그려진 연대가 무척 아름답다. 게스트하우스의 임시 직원인 미농 씨는 어느 날 돌봐줄 사람이 없어 네 살배기 아이와 함께 출근한다. 며칠간은 아이를 데리고 출근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미농 씨는 “불편하시면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덧붙이지만, 고모는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겨 주고, 할머니는 그동안 아이를 돌봐주기로 약속한다. 미농 씨는 이들 곁에서 제빵 기술을 익혀 빵집을 여는 꿈을 꾼다. “전에 우리 제빵 선생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 밀가루 반죽이 잔뜩 묻은 손바닥을 보면서 말이야. 손바닥이 텅 빈 듯 보이지만 이 텅 빈 손바닥 안에는 한없는 무엇이 가득하다고 했거든. 기라 씨도 그걸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본문 175면) “텅 빈 손바닥 안의 한없는 무엇”은 흩어진 재료들에서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 내고 버려진 땅에 꽃을 피워 낸다. 게스트하우스는 작은 것들을 보살피며 “이만하면 좋다.” 하고 말할 온기를 준다. 지친 삶에 쉼표가 되어 주는 게스트하우스 Q에서 주인공 정성이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젠가 단단해진 어른이 되어 홀로 설 준비를 한다. ‘정성껏 살아가는 마음’이 정성 없이 사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는 고모의 경쾌한 고백이 독자에게 담백한 감동과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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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끼호떼』로 서양 근대소설을 창조한 작가 세르반떼스가 선보이는 현대적 단편소설의 ‘모범’ 귀족에서 시정잡배까지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 17세기 ‘에스빠냐 사람들’ 『돈 끼호떼』의 생생한 웃음과 감동을 다시 만난다! 저는 이 책에 ‘모범’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잘 보시면 어느 것 하나 인생에 유익하지 않은 예를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_세르반떼스, 「책머리에」에서 서양 근대소설의 효시라 불리는 『돈 끼호떼』의 작가 미겔 데 세르반떼스의 ‘현대적’ 단편소설 12편을 모은 『모범소설집』이 창비세계문학 76, 77번으로 출간되었다. 단편소설은 세르반떼스 자신에게도 처음이었을 뿐 아니라 에스빠냐에서도 전례 없던 최초의 장르로, 제목의 ‘모범’은 말 그대로 하나의 전형을 제시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보까치오의 『데까메론』에 이어 세르반떼스의 이 작품들로 우리는 비로소 역사와 신화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갖게 되었으니, 그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기 실린 작품들은 『돈 끼호떼』 1권으로 소설가로서의 독창성과 완성도를 보여준 작가가 한껏 자유롭고 풍성한 문체를 구사하던 시기의 것들이다. 특유의 활달한 필치와 생생한 입담, 재치 넘치는 유음이의어(類音異義語) 말놀이로 귀족부터 시정잡배까지 17세기 에스빠냐 사람들의 생활상이 손에 잡힐 듯이 그려진다. 출간 400주년을 맞아 『돈 끼호떼』의 에스빠냐어판 완역본을 선보인 바 있는 고려대 민용태 명예교수가 구성진 우리말로 세르반떼스 문체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르네상스적 이상을 품은 사랑과 용감한 여성들의 이야기 1613년에 출간된 『모범소설집』은 크게 귀족을 주인공으로 이상주의적 교훈을 담은 소설과 도시 서민과 날품팔이, 떠돌이 악사, 건달, 도둑 같은 하층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로 나뉜다. 두 부류의 문체와 소설의 짜임새 및 완성도에서 보이는 차이는 이들이 긴 시간에 걸쳐 쓰인 작품들임을 알려준다. 여러 우여곡절이 얽혀 전개되며 르네상스적 사랑을 주제로 하는 전자에 비해 리얼리즘적 시각에서 생동감 넘치는 문체로 펼쳐지는 후자가 더 나중에 쓰인 작품들이다. 이는 세르반떼스가 작가로서 보이는 발전 양상일 뿐 아니라 소설이라는 장르의 발전상을 드러내주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집시 소녀에 관한 소설」 「에스빠냐 태생 영국 여자에 관한 소설」 「핏줄의 힘에 관한 소설」 「고명한 식모 아가씨에 관한 소설」 「두 아가씨에 관한 소설」 「꼬르넬리아 아씨에 관한 소설」 등이 전자에 속하는 작품들로, 귀족 여성이 우연한 일로 신분에 걸맞지 않게 살다가 사랑을 통해 신분을 회복하는 줄거리가 주를 이룬다. 신분의 급격한 추락과 상승은 이야기를 극적으로 만드는 요소이자 때로는 이 과정에서 다른 계급 사람들과 섞이며 이들의 생활상을 전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들 작품은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귀족 여성의 사랑 이야기로, 그녀를 사모하는 귀족 남성이 구원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엄격한 사회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이들 여성이 마냥 수동적 존재로만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집시 소녀에 관한 소설」에서 집시로 키워진 소녀 쁘레시오사는 뛰어난 미모와 춤과 노래 솜씨에 반해 그녀와 결혼해서 그녀를 자신과 동등한 ‘고귀한’ 신분으로 높여주고 싶다는 귀족 청년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집시로서의 자존심을 내세워 그에게 자신과 함께 2년간 집시로 생활한다면 그 사랑을 믿겠노라는 조건을 내건다. 「두 아가씨에 관한 소설」에서 두 여성은 자신들을 한때의 즐거움으로 삼다가 떠나버린 연인을 찾아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용감하게 길을 나서며, 갖가지 모험을 겪은 끝에 결실을 쟁취한다. 여성이 가문과 남성에 종속된 존재이던 시절에 소설 속 여성들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사랑 앞에서 주저하지 않는다. 갖가지 금기를 어기고 사랑을 나누며, 그로 인한 시련을 자신의 의지로 헤쳐나가는 모습은 한결같이 흥미진진하다. 뒤틀린 일은 바로잡히며 악행은 선행으로 구제된다는 교훈과 더불어 귀족의 도덕률로 제시되는 신분에 걸맞은 의무와 명예심, 예의 바름과 선행 등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이상적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매력적인 악한(惡漢)들의 세계 사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세르반떼스 리얼리즘의 묘미 이에 비해 떠돌이 악사, 날품팔이 일꾼, 도둑과 건달 무리 등이 등장하는 소설들은 한층 무르익은 필치로 다양한 인간상을 그려낸다. 사소한 속임수와 다툼이 일상인 세계, 투박한 말투와 거친 생활 속에서 피어나는 왁자한 활기, 때로는 무시당해서 눈물짓고 때로는 작은 재주에 환호하며 춤과 노래가 끊이지 않는 모습이 400여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생생하다. 이들을 통해 신화와 역사 속 상상의 존재가 아니라 심장이 뛰고 온기가 느껴지는 살아 있는 사람의 세계가 세르반떼스의 손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그때까지 답습해오던 고전문학의 전통을 거부하고 “지금 나의 이 단편소설들은 내 스스로 창조한 것이며, 어디서 모방하거나 표절해온 것들이 아니”라는(2권 434면) 자부심 가득한 그의 발언의 진짜 의미다. 「린꼬네떼와 꼬르따디요에 관한 소설」은 악자(惡者)소설풍이면서도 특정 인물의 일대기가 아니라 세비야 건달패의 집단적 생활을 묘사한 점에서 세태소설의 성격도 갖는 작품이다. 희한한 미신들에 둘러싸여 그들만의 규범을 만들고 지키며 살아가는 ‘도둑놈’들의 모습이 위트와 유머로 그려진다. 「유리 석사에 관한 소설」은 자신을 유리로 만들어진 존재라 생각하는 광기를 보이는 석사(碩士)의 이야기다. 세상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천재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현대사회 작가(예술가)의 존재를 연상시킨다. 광증을 보일 때 그토록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유리 석사가 막상 광증에서 해방되자 세상에서의 쓸모가 없어져 무사로 전장에 나간다는 결말은 존재의 아이러니를 곱씹게 한다. “반쯤은 진실이고 반쯤은 거짓”이라는(2권 446면) 평을 듣는 세르반떼스의 소설세계는 그의 독특한 리얼리즘 덕분이다. 그는 전능한 존재로서 소설 속 모든 인물과 구성을 통제하는 작가의 자리에 있지 않다. 스스로 만든 이야기의 뼈대를 흔들고 불쑥불쑥 이야기 중간에 작가의 목소리로 끼어들기도 한다. ‘열린 소설’로서 독자들이 주어진 상황을 마주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게 이끄는 것이다. 우연히 사람처럼 말하는 능력을 얻게 된 개들이 밤새 나눈 대화를 한 사람이 엿듣는 형식으로 서술된 「개들의 대화」는 그런 특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여기에는 이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그대로’ 받아 적은 이야기꾼이 등장하며, 그 이야기를 읽고 그것이 허구인지 사실인지 판단을 내리는 ‘독자’가 존재한다. 소설, 즉 이야기가 순전한 허구인가 혹은 허구를 통해 창조된(발견된) 진실인가의 문제는 소설의 본질에 닿아 있는 질문이며, 현대 작가의 존재를 예비한 듯한 이 소설 속 이야기꾼의 존재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세르반떼스는 거짓 같은 사실, 사실 같은 허구의 세계를 창조하면서 소설의 개념을 새로이 연 것이다. 『모범소설집』은 소설사적 의의만으로도 충분히 빛나는 작품이지만 다채로운 인간들의 흥미로운 인생 이야기, 교묘한 언어유희, 넘치는 익살과 유머로도 소설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세르반떼스의 문체적 특성을 평생 탐구해온 역자의 번역이 그 재미를 더한다. 400여년 전 작품으로서 몇몇 풍습과 여성관 등은 오늘의 독자들이 공감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겠지만, 그 한계 안에서도 놀랍도록 모던한 사고를 보여주는 여성들과 세상의 금기를 유희하는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사람들의 입체적인 삶을 통해 이야기의 참맛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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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끼호떼』로 서양 근대소설을 창조한 작가 세르반떼스가 선보이는 현대적 단편소설의 ‘모범’ 귀족에서 시정잡배까지 손에 잡힐 듯 그려지는 17세기 ‘에스빠냐 사람들’ 『돈 끼호떼』의 생생한 웃음과 감동을 다시 만난다! 저는 이 책에 ‘모범’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잘 보시면 어느 것 하나 인생에 유익하지 않은 예를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_세르반떼스, 「책머리에」에서 서양 근대소설의 효시라 불리는 『돈 끼호떼』의 작가 미겔 데 세르반떼스의 ‘현대적’ 단편소설 12편을 모은 『모범소설집』이 창비세계문학 76, 77번으로 출간되었다. 단편소설은 세르반떼스 자신에게도 처음이었을 뿐 아니라 에스빠냐에서도 전례 없던 최초의 장르로, 제목의 ‘모범’은 말 그대로 하나의 전형을 제시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보까치오의 『데까메론』에 이어 세르반떼스의 이 작품들로 우리는 비로소 역사와 신화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인간의 이야기를 갖게 되었으니, 그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기 실린 작품들은 『돈 끼호떼』 1권으로 소설가로서의 독창성과 완성도를 보여준 작가가 한껏 자유롭고 풍성한 문체를 구사하던 시기의 것들이다. 특유의 활달한 필치와 생생한 입담, 재치 넘치는 유음이의어(類音異義語) 말놀이로 귀족부터 시정잡배까지 17세기 에스빠냐 사람들의 생활상이 손에 잡힐 듯이 그려진다. 출간 400주년을 맞아 『돈 끼호떼』의 에스빠냐어판 완역본을 선보인 바 있는 고려대 민용태 명예교수가 구성진 우리말로 세르반떼스 문체의 특성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르네상스적 이상을 품은 사랑과 용감한 여성들의 이야기 1613년에 출간된 『모범소설집』은 크게 귀족을 주인공으로 이상주의적 교훈을 담은 소설과 도시 서민과 날품팔이, 떠돌이 악사, 건달, 도둑 같은 하층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로 나뉜다. 두 부류의 문체와 소설의 짜임새 및 완성도에서 보이는 차이는 이들이 긴 시간에 걸쳐 쓰인 작품들임을 알려준다. 여러 우여곡절이 얽혀 전개되며 르네상스적 사랑을 주제로 하는 전자에 비해 리얼리즘적 시각에서 생동감 넘치는 문체로 펼쳐지는 후자가 더 나중에 쓰인 작품들이다. 이는 세르반떼스가 작가로서 보이는 발전 양상일 뿐 아니라 소설이라는 장르의 발전상을 드러내주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집시 소녀에 관한 소설」 「에스빠냐 태생 영국 여자에 관한 소설」 「핏줄의 힘에 관한 소설」 「고명한 식모 아가씨에 관한 소설」 「두 아가씨에 관한 소설」 「꼬르넬리아 아씨에 관한 소설」 등이 전자에 속하는 작품들로, 귀족 여성이 우연한 일로 신분에 걸맞지 않게 살다가 사랑을 통해 신분을 회복하는 줄거리가 주를 이룬다. 신분의 급격한 추락과 상승은 이야기를 극적으로 만드는 요소이자 때로는 이 과정에서 다른 계급 사람들과 섞이며 이들의 생활상을 전하는 장치이기도 하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들 작품은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귀족 여성의 사랑 이야기로, 그녀를 사모하는 귀족 남성이 구원자로 등장한다. 그러나 엄격한 사회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이들 여성이 마냥 수동적 존재로만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집시 소녀에 관한 소설」에서 집시로 키워진 소녀 쁘레시오사는 뛰어난 미모와 춤과 노래 솜씨에 반해 그녀와 결혼해서 그녀를 자신과 동등한 ‘고귀한’ 신분으로 높여주고 싶다는 귀족 청년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집시로서의 자존심을 내세워 그에게 자신과 함께 2년간 집시로 생활한다면 그 사랑을 믿겠노라는 조건을 내건다. 「두 아가씨에 관한 소설」에서 두 여성은 자신들을 한때의 즐거움으로 삼다가 떠나버린 연인을 찾아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 용감하게 길을 나서며, 갖가지 모험을 겪은 끝에 결실을 쟁취한다. 여성이 가문과 남성에 종속된 존재이던 시절에 소설 속 여성들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사랑 앞에서 주저하지 않는다. 갖가지 금기를 어기고 사랑을 나누며, 그로 인한 시련을 자신의 의지로 헤쳐나가는 모습은 한결같이 흥미진진하다. 뒤틀린 일은 바로잡히며 악행은 선행으로 구제된다는 교훈과 더불어 귀족의 도덕률로 제시되는 신분에 걸맞은 의무와 명예심, 예의 바름과 선행 등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이상적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매력적인 악한(惡漢)들의 세계 사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세르반떼스 리얼리즘의 묘미 이에 비해 떠돌이 악사, 날품팔이 일꾼, 도둑과 건달 무리 등이 등장하는 소설들은 한층 무르익은 필치로 다양한 인간상을 그려낸다. 사소한 속임수와 다툼이 일상인 세계, 투박한 말투와 거친 생활 속에서 피어나는 왁자한 활기, 때로는 무시당해서 눈물짓고 때로는 작은 재주에 환호하며 춤과 노래가 끊이지 않는 모습이 400여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생생하다. 이들을 통해 신화와 역사 속 상상의 존재가 아니라 심장이 뛰고 온기가 느껴지는 살아 있는 사람의 세계가 세르반떼스의 손에서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그때까지 답습해오던 고전문학의 전통을 거부하고 “지금 나의 이 단편소설들은 내 스스로 창조한 것이며, 어디서 모방하거나 표절해온 것들이 아니”라는(2권 434면) 자부심 가득한 그의 발언의 진짜 의미다. 「린꼬네떼와 꼬르따디요에 관한 소설」은 악자(惡者)소설풍이면서도 특정 인물의 일대기가 아니라 세비야 건달패의 집단적 생활을 묘사한 점에서 세태소설의 성격도 갖는 작품이다. 희한한 미신들에 둘러싸여 그들만의 규범을 만들고 지키며 살아가는 ‘도둑놈’들의 모습이 위트와 유머로 그려진다. 「유리 석사에 관한 소설」은 자신을 유리로 만들어진 존재라 생각하는 광기를 보이는 석사(碩士)의 이야기다. 세상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천재는 주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현대사회 작가(예술가)의 존재를 연상시킨다. 광증을 보일 때 그토록 사람들의 사랑을 받던 유리 석사가 막상 광증에서 해방되자 세상에서의 쓸모가 없어져 무사로 전장에 나간다는 결말은 존재의 아이러니를 곱씹게 한다. “반쯤은 진실이고 반쯤은 거짓”이라는(2권 446면) 평을 듣는 세르반떼스의 소설세계는 그의 독특한 리얼리즘 덕분이다. 그는 전능한 존재로서 소설 속 모든 인물과 구성을 통제하는 작가의 자리에 있지 않다. 스스로 만든 이야기의 뼈대를 흔들고 불쑥불쑥 이야기 중간에 작가의 목소리로 끼어들기도 한다. ‘열린 소설’로서 독자들이 주어진 상황을 마주하고 생각하고 판단하게 이끄는 것이다. 우연히 사람처럼 말하는 능력을 얻게 된 개들이 밤새 나눈 대화를 한 사람이 엿듣는 형식으로 서술된 「개들의 대화」는 그런 특성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여기에는 이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그대로’ 받아 적은 이야기꾼이 등장하며, 그 이야기를 읽고 그것이 허구인지 사실인지 판단을 내리는 ‘독자’가 존재한다. 소설, 즉 이야기가 순전한 허구인가 혹은 허구를 통해 창조된(발견된) 진실인가의 문제는 소설의 본질에 닿아 있는 질문이며, 현대 작가의 존재를 예비한 듯한 이 소설 속 이야기꾼의 존재는 신비롭기까지 하다. 세르반떼스는 거짓 같은 사실, 사실 같은 허구의 세계를 창조하면서 소설의 개념을 새로이 연 것이다. 『모범소설집』은 소설사적 의의만으로도 충분히 빛나는 작품이지만 다채로운 인간들의 흥미로운 인생 이야기, 교묘한 언어유희, 넘치는 익살과 유머로도 소설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세르반떼스의 문체적 특성을 평생 탐구해온 역자의 번역이 그 재미를 더한다. 400여년 전 작품으로서 몇몇 풍습과 여성관 등은 오늘의 독자들이 공감하기 어려운 대목도 있겠지만, 그 한계 안에서도 놀랍도록 모던한 사고를 보여주는 여성들과 세상의 금기를 유희하는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사람들의 입체적인 삶을 통해 이야기의 참맛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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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상 가장 고립된 나라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의 일상과 내면을 생생하고 다채롭게 풀어내는 실천적 문화인류학자의 북한문화 심층탐구 문화이해를 통해 분단시대 남북 문화교류의 발판을 제공하는 책 『고난과 웃음의 나라: 문화인류학자의 북한 이야기』가 출간되었다. 문화인류학자이자 구호활동가, 탈북 청소년 교육자이기도 한 저자 정병호(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약 20년 동안 10여 차례 방북해 기근 구호활동을 펼치고 조–중 접경지역에서 탈북민과 교류하는 등 활동가로 활약하며 현장연구를 진행해왔다. 이 책은 이러한 저자의 풍부한 대북접촉 경험을 기반으로 북한주민의 삶을 다채롭게 풀어냄과 동시에 북한체제에 대한 이론적 분석을 균형 있게 서술한 책이다. 2013년 출간되어 국내외에서 화제를 일으킨 저자의 전작 『극장국가 북한: 카리스마 권력은 어떻게 세습되는가』가 주로 김일성–김정일체제에 대한 문화인류학적 분석으로 권력의 작동방식을 다룬 학술서라면, 이번 책은 김정은체제의 변화와 전망을 타진하면서도 권력체제에 포함되지 않는 주민의 일상과 의식까지 담아낸 생생한 현장기록이다. 책은 작금의 북한주민의 삶과 내면이 어떻게 형성되어왔으며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그에 따라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할 것인가를 설명해준다. 궁극적으로는 남과 북이 문화적 이질성을 극복하고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데 꼭 필요한 상호이해의 밀알을 제공하는 저작이다. 이념국가에서 발전국가로 김정은 시대 사회주의 문명국의 꿈과 현실 김정은 시대의 권력연출과 국가경영은 ‘반복과 변화의 메시지’를 통한 ‘사회주의 문명국’ 건설로 설명할 수 있다. 국제적 고립과 오래 기근으로 배급제를 비롯한 국가제도가 사실상 무너진 상황에서 김정은은 개방과 경제부흥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직면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기존의 위계질서와 체제안정의 기반 위에서 진행되어야 했다. 이에 따라 김정은은 선대 지도자들의 통치 방식을 계승함과 동시에 그 내용과 양식에는 시대상황의 변화를 반영해 현대적‧물질적 욕망을 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김일성을 쏙 빼닮은 외모와 스타일, 장엄한 예술공연, 산업현장 현지지도 등 기존의 권력연출 방식을 재현하면서도 팝 음악과 모란봉악단 등 파격적인 공연, 스키장과 놀이공원 같은 화려한 오락시설, 서양음식점과 종합백화점, 고층건물과 네온사인이 즐비한 도시경관이 쏟아져 나오는 데에는 이러한 정치적‧문화적 배경이 자리한다. 사회주의 문명국이라는 목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사회주의 문명국은 이념국가의 용어(사회주의)로 발전국가로의 국가목표(문명국) 전환을 명시한 것이다. 저자는 성공적인 권력세습을 통해 체제방어에 성공한 김정은이 본격적인 발전국가로의 전환에 착수했다고 분석한다. 또한 여러 차례 실패를 거듭했던 북한의 발전국가 노선들을 되짚으며 앞으로의 변화를 타진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나올 것인지, 북한의 ‘사람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그들이 핵을 포기하지 않는 이유 공화국의 내면과 핵협상의 심리구조 실제로 북한 사람들의 심리와 문화를 이해하면 핵폭탄이라는 극단적인 카드를 놓지 않는 북한체제의 의도와 전략을 파악할 수 있다. 저자는 기근 구호활동을 위해 실제 실무자들과 직접 협상테이블에 앉아 지난한 밀고 당기기를 반복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북한 사람들의 협상의 문화패턴을 발견해냈다. 당장 구호물품이 필요한 북한이 아쉬운 입장이지만, ‘당혹스럽게도’ 그들은 ‘효율’과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태도를 취한다. 덕담을 나누다가도 돌연 도덕적 우위에 서서 트집을 잡으며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 하고, 뜻대로 되지 않으면 감정적으로 대화를 끝내버린다. 이 모든 과정을 계속 반복하면서 그들은 협상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자신들의 도덕적인 원칙과 자존심을 지켜낸다. 저자는 이렇게 빈한한 사정에도 도움의 손길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결기와 도덕주의적 주장, ‘단숨에’ 뜻을 이루고자 하는 태도, 자존심과 결사항전의 의지가 북한 당국과 엘리트집단뿐 아니라 주민들의 의식에도 담겨 있는 문화적 ‘아비투스’라고 분석하며, 이 연장선상에서 핵폭탄은 상대를 위협할 만한 무기를 쥔 채 국제무대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관철시키겠다는 사회적 생존전략이라고 말한다. 결국 핵폭탄은 북한체제가 우리를 인정해달라는 절박한 외침인 것이다. 저자는 북한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 속내를 헤아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교시된 행복과 가족국가의 소속감 북한의 문화예술 공연에서 일사불란한 모습으로 숨가쁘게 활짝 웃는 아이들의 미소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어린 아이들에게 가혹한 훈련을 강요하고 지도자에 대한 충성을 세뇌한다는 식의 냉전적 사고틀을 넘어서면 그 미소의 문화적 배경을 한층 깊게 파악할 수 있다. 저자는 방북 당시 여러 유치원과 탁아소, 학교를 둘러보며 만났던 아이들과 교육환경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이들과 인민의 웃음을 문화인류학적으로 분석한다. “우리는 행복해요” 슬로건이 걸린 유치원에서 ‘세상에 부럼 없어라’ 노래를 부르는 굶주린 원생들을 보며 저자는 놀랍게도 아이들이 진심으로 행복해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참혹한 현실과 동떨어진 표어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이 느끼는 행복은 단순한 세뇌의 산물이나 연출된 모습이 아니다. 북한사회는 치밀한 상징작업과 권력연출을 통해 ‘행복을 교시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북한 사람들은 ‘아버지’ 지도자의 시혜에 감읍하며 공동체적 행복을 공유한다. ‘어린이는 나라의 왕입니다’라는 김일성의 교시와 아이들 간식 콩우유(두유) 공급에 총력을 펼치는 장군님의 온정, 아이들을 위해 밥상 높이를 낮추도록 명령했다는 ‘낮아진 밥상’ 덕성실화, 집집마다 걸어두는 ‘장군님 식솔’ 족자 등 인민의 일상 곳곳에서 가족국가의 관계와 소속감을 발견할 수 있다. 온 인민이 지도자를 어버이로 의식하고 그의 보살핌 속에 살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이런 의미연결 체계는 오랜 시간 역사적‧사회적‧문화적으로 거듭 다져져온 표현이다. 북한 특유의 과장된 극장국가적 연출과 가족국가적 국민의식이 결합되어 지도자는 ‘신 없는 나라의 신’이 되었고 수령을 사모하고 찬양하는 음악은 찬송가로 울려퍼진다. 남과 북이 함께 웃기 위해서는 이처럼 서로가 느끼는 행복이 전혀 다른 층위에 있음을 먼저 알아야 한다. 물질적 풍요가 아닌, 정서적 풍요와 소속감에서 오는 북한 사람들의 웃음을 이해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지금 북한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시장경제의 대두와 과학기술의 강조, 불평등의 심화 저자는 북한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실제로 만나며 문화인류학자 특유의 기민한 감각으로 디테일한 문화적 현상과 일상의 변화를 감지해낸다. “교수 아들은 교수가, 농부 아들은 농부”가 되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말은 뜻밖에도 저자가 북한에서 만난 김일성종합대학 출신 당일꾼의 입에서 나온 말이다. 지도자의 권력세습 덕분에 북한에서는 다양한 직종의 세습과 계급의 재생산이 장려되고 있다. 이념적으로 ‘사회주의’와 ‘혁명’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 북한은 자본주의사회와는 다른 방식의 불평등한 사회주의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서울의 강남 8학군 엄마들의 치맛바람 못지않은 평양 엄마들의 교육열, 김일성종합대학과 김책공업대학 교수들과 과학자들이 입주한 평양판 ‘SKY캐슬’은 계층구조의 심화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지역차별도 빼놓을 수 없다. 평양–지방의 철저한 구분과 차별은 북한 사람들의 중심지향성을 강화하고 중심과 주변의 격차는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 조부모 또는 증조부모의 사회적 계급성분에 따라 출신성분이 서열화되고 핵심–동요–적대계층이라는 정치적인 계급구분도 존재한다. 우생학을 바탕으로 인종적 우월성을 강조하며 배타적인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같은 맥락에서 ‘평양은 나라의 얼굴’이라는 기치 아래 장애를 가진 평양시민을 평양 밖으로 내쫓는 등 장애차별도 노골적이다. 가부장적 가족국가 질서 속에 여성과 남성 간의 위계서열과 성역할 고정관념 또한 고착화되었다. 변화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남과 북이 하나되는 그날을 꿈꾸며 하지만 사회 전반에 스며든 불평등과 차별의 틈바구니에서는 억눌려왔던 목소리가 흘러나오며 새로운 문화가 탄생하기도 한다. ‘고난의 행군’시기 이래 주민들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살길을 모색해왔다. 공식적인 배급체계가 무너지고 비공식경제가 이를 대체하면서 ‘남한보다 더 자본주의 같은’ 면모가 싹트기 시작했다. 저자는 조–중 접경지역에서의 연구와 경험을 바탕으로 해외파견노동자의 삶, 밀수와 뇌물이 횡행하며 역동적으로 진행되는 무역 현장을 생생하게 그리고, 장마당과 시장이 확장되면서 여성들이 생활경제의 주역으로 활약함에 따라 가부장적 성별 위계질서에 생기고 있는 균열에도 주목한다. 그러나 저자는 다양한 북한사회의 변화를 체제붕괴의 조짐으로 성급하게 해석하거나 아예 무시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공식적인 제도와 비공식적인 일상 간의 괴리는 지금도 커지고 있지만 두 흐름 모두 현실이고 그 둘이 서로 상호보완적으로 공존하며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분석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데에도 같은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오랜 세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남과 북은 서로의 경험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감수성을 연마해야 진정한 공존을 꿈꿀 수 있다. 북한에 대한 편견과 고정관념의 안개를 걷어내고 공감을 이끌어내는 이 책이 분단의 상처를 치유하는 작은 한걸음이 되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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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장하고 쓸쓸한 나의 편협이 굉장하고 쓸쓸한 너의 편협을 다정히 사랑해서” 이질적인 언어로 치열한 사랑을 구축해내는 새로운 시인의 등장 2014년 세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영재 시인의 첫 시집 『나는 되어가는 기분이다』가 출간되었다. 등단 당시 “언어에 대한 민첩하고 세련된 감각”과 “존재의 미세한 기척들에 대한 민감함”이 어우러진다는 호평을 받았던 시인은, 그동안 개성적인 화법으로 시의 음역을 넓히며 독자적인 시세계를 꾸려왔다. 등단 6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에서 시인은 세상을 바라보는 색다른 관점과 발랄하면서도 묵직한 시적 사유가 돋보이는 매혹적인 시편들을 선보인다. 기존의 문법을 거침없이 뒤흔드는 참신한 언어 형식과 “형이상학인 동시에 흥미진진한 서사”가 “독특한 재미”(이원, 추천사)를 선사한다. 자주 길을 잃게 하는 낯선 문장과 형식 무너뜨린 언어를 통해 만나는 새로운 가능성 이영재의 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관습적인 의미 체계를 뛰어넘는 모호한 언어와 일상의 어법을 허무는 낯선 문장 속에서 자주 길을 잃게 된다. 시인은 기존의 익숙한 문법을 무너뜨리고 능동의 언어를 비틀어 “생각되되/생각될 것”(「생각되되 생각될 것」)이라는 극단적인 피동형의 언어를 자유로이 구사함으로써 존재의 능동성에 대한 회의를 드러낸다. 치밀하게 짜인 문장 안에 논리적 질서와 상식을 넘어서는 새로운 형태의 언어가 돌올하다. “생각된 생각을 생각”(「검열」)하고, “적을 수 없는 너머의/너머”(「위하여」)를 관통하는 그의 시를 읽다보면 미로 속을 걷는 듯하면서도 무언가 “되어가는 기분”(「슬럼」)이다.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에 관해 골몰하는 시인은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 알기 위해”(「지나가면서」) 의도적으로 기존의 언어 체계를 허물어뜨린다. 그렇다고 비단 언어에 대한 탐구에만 관심이 머무는 것은 아니다. 시인은 “무엇 하나 다행스러운 것이 없”(「지나가면서」)고 “누군가 행복하다면 누군가 불행”(「청사진」)할 수밖에 없는 ‘지금, 이곳’의 삶의 고통과 슬픔을 절실한 언어로 담아내면서 현실을 비판하기도 한다. 이처럼 삶의 구체성에 뿌리를 둔 작품들은 뒤틀린 세월과 어긋나버린 시간을 환기하면서 “오랜 교육으로 축조된 희망과 기대”(「청사진」)라는 허울에 가려진 사회 구조의 본질을 드러내 보인다. 이영재의 시적 사유는 언어와 실존에 대한 인식에 깊숙이 닿아 있다.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의 가능성을 탐구하면서도, 자신의 세대가 경험하는 삶의 문제에 대해 뚜렷이 인식한다. 시인은 “가능성의/가능성을 향해”(「위하여」) 움직이고,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내가 알던 A의 기쁨」)을 더듬으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묵묵히 시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한다. 그것이 바로 허위가 아닌, “우리가 연 가능성”(「미지」)이 아닐까. “자라지 않는 걸 키우기 위해 나는 멀리를 걸어왔다”(「먼 밭」)는 이 젊은 시인의 첫 시집은, 확실히 독자에게 “다른 시집”(이원, 추천사)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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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곳을 생각보다 쉽게 사랑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열정의 시절을 통과하는 청춘들, 그 사랑을 향한 예의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일상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시대상을 빼어난 통찰과 흥미로운 서사로 담아내는 금희 작가의 첫번째 장편소설 『천진 시절』이 출간되었다. 최근 창비가 새롭게 선보인 젊은 경장편 시리즈 ‘소설Q’의 신작이다. 중국 길림성 출신으로 2007년 『연변문학』에서 주관하는 윤동주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활동을 시작한 금희 작가는 『창작과비평』 2014년 봄호에 조선족 사회의 탈북 여성 이야기를 다룬 단편 「옥화」를 발표하며 한국 문단에 처음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출간한 소설집 『세상에 없는 나의 집』이 2016년 신동엽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될 정도로 단숨에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주목받았다. “자본주의 세계체제로서의 근대라는 폭넓은 범주 속에서 사람들의 다양한 욕망을 형상화”한 작가, “생존을 위한 절박한 선택을 포함하여 ‘더 잘살기 위해서’ 여러 나라를 가로지르는 자발적인 이동의 삶”을 포착하는 작가라는 평가(백지연)에 걸맞게 『천진 시절』 역시 생존과 꿈, 그리고 욕망을 주된 주제로 삼아 너른 시공간을 종횡무진하며 활달한 에너지를 뿜어낸다. 생동하는 시공간, 먼 곳에서 전해지는 보편 한국문학의 외연을 넓히는 강렬한 개성 중국 동북 지방 출신으로 한국에서 만난 남편과 살림을 꾸린 주인공 ‘상아’는 남동생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상해를 찾았다가 뜻밖에도 20년 전 가깝게 지낸 정숙 언니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는다.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지난날을 묻어둔 채 평범하게 살고 있던 상아는 정숙 언니의 연락을 계기로 그 열정의 시기, 꿈과 포부로 가득해 대도시 천진으로 올라왔던 1998년의 한 시절을 돌이켜보게 된다. 상아는 어릴 적 동창 ‘무군’을 고향 마을에서 재회한 뒤 부지불식간에 그와 약혼 관계에까지 이른다. 그것은 일자리를 찾아 무군과 함께 천진으로 향하게 된 상아가 어쩔 수 없이 감당하게 된 선택이기도 하다. 상아는 ‘회사’라는 곳에 발을 디딘 기대감으로 무군과의 생활에 익숙해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것이 사랑일까’를 계속해서 자문한다. 일상의 작은 행복을 알아가면서도 그보다 더 크게 다가드는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은 상아의 존재를 점차 뒤흔든다. 작품은 중년에 이르러 삶의 관조를 얻게 된 현재의 상아와 대도시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동경하게 되면서 진정한 사랑과 행복이 무엇인지 그 답이 보이지 않는 고민에 좌충우돌하는 청춘의 상아를 계속해서 교차해 보여주면서 흥미를 자아낸다.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천진 시절’은 말 그대로 천진(天津)이라는 공간에서 보낸 한때를 가리키는 동시에 노동과 돈을 둘러싼 애환을 절감하고, 사랑의 의미 혹은 효능에 대해 고뇌하면서 통과하게 되는 보편적인 청춘의 시절을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1998년 무렵의 천진이라는 시공간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1990년대 개혁개방시대를 맞이한 중국의 당시 생활상, 그리고 그 속에서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해가는 조선족 청년들의 모습이 핍진하게 그려진다. 우리 소설에서는 보기 드물었던 장면인바, 그 자체로 흥미롭고 귀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 속에서 상아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는 인물들의 다양한 개성 또한 유별나다. 그런가 하면 문화혁명기부터 개혁개방 시기를 맞이하기까지 상아가 나고 자란 중국 동북부 ‘남산촌’의 풍경은 우리에게도 공감될 고풍스러움을 간직한 동시에 중국 특유의 정취를 뿜어냄으로써 대도시 천진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흥미를 선사한다. 요컨대 이 소설은 중국에 앞서 급격한 산업화를 경험한 우리에게 익숙함과 신선함을 함께 느끼게 해준다. 돌아서서 사람들의 머리 위로 높이 솟은 ‘천진역’이란 글자를 올려다본다. 로켓 모양의 짧은 원기둥 사면으로 까만색 시계가 붙어 있는 조형물이었다. 마중을 나온 무군의 큰누나는 두 사람을 이끌고 천진역 광장에 있는 영안백화점 안으로 질러간다. 낮은 천장, 우아하고 여성스러운 정장을 입은 마네킹들, 은은한 음악이 흐르는 편안한 분위기…… 무군의 누나를 따라 영안백화점 뒷문을 빠져나올 때 나는 내가 그곳을 생각보다 쉽게 사랑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83면) “한번도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이제 안다.” 사랑의 의미를 묻는 이들, 시대와 역사의 표정을 닮다 일상에 안주하며 누리는 소박한 행복에 만족하지 못한 채 고뇌하던 상아는 끝내 어떤 결단을 내린다. 그로부터 20여년, 상아는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천진 시절을 다시 꺼내게 만든 정숙과 재회한다. 상아에게 그 시절은 어떤 의미였을까. 그는 묻는다. “만약이라는 게 없다는 거 아는데, 그래도 다시 한번 그 시간이 주어진다면 어떨 것 같아요?”(175면) “미래를 향해 흐르는 삶의 물결에서 봉인된 과거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걸”(한영인 해설) 이 소설은 말해준다. 시대 현실과 인물들이 함께 호흡하는 가운데 사랑과 인생을 강물 같은 이야기로 풀어낸 『천진 시절』은 격동하는 청춘의 시절을 담아낸 또 하나의 아름답고 깊이 있는 이야기로 남을 것이다. 그토록 붐비는 광장에서 나의 귓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의 심장이 툭툭 뛰고 있다는 것만 느껴졌다. 그것은 끝난 사랑에 예의를 표하는 진실한 고백이었다. 한번도 사랑을 해본 적이 없었지만, 나는 이제 안다. (19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