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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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시, 다시 열린 세계 새로 만나는 한국시의 역사, ‘창비시선_다시봄’ 시리즈 40여년간 한결같이 독자들과 함께해온 ‘창비시선’이 또 하나의 의미있는 기획을 선보인다. 기존에 간행됐던 시집 중에서 그 주제의식과 언어의 현재성이 여실한 시집을 가려 뽑아 지금의 독자들과 새롭게 나누는 시리즈‘창비시선_다시봄’이다. 1975년 3월 신경림 시집 『농무(農舞)』를 시작으로, 창비시선은 2019년 10월 현재 436권에 달하는 시집을 출간하며 우리 시의 문학적 고투와 성과를 오롯이 담아내왔다. 서정의 언어로, 저항의 외침으로, 다양성의 목소리로 이어져온 창비시선은 유장하고 넓은 한국시의 강물이 되었다. ‘창비시선_다시봄’의 출간은 이 문학적 물길과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지금 여기로 이어진 한국 현대시의 본류를 살피는 일이자 아직 그곳에 온전히 머무르고 있는 맑고 다채로운 미감을 현재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기획이다. 시리즈의 시작을 함께한 시인들은 오래전에 선보인 작품을 펼쳐두고 애정과 고심으로 퇴고를 거듭하며 시간의 더께를 털어내었고 그 소회를 책에 밝혀두었다. 아울러 표지 디자인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포부를 담아 1966년 발간된 계간 『창작과비평』 창간호의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만들었다. 시인 강은교, 언어를 통해 사랑을 실현하다 ‘창비시선_다시봄’ 시리즈는 강은교 시집 『벽 속의 편지』(창비시선 105, 1992)로 시작된다. 이 시집은 1968년 『사상계』로 등단한 강은교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으로 세상의 작고 사소한 기척들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세련된 언어로 그려져 있다. 이러한 애정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그에 머무르지 않고 언어를 통한 사랑의 실현으로 발전되게끔 한다. 세상의 억압이나 억울한 희생 따위의 소멸을 바라며, 동시에 하찮게 여겨지는 가치들의 혁명을 꿈꾸었던 시인의 좌절 섞인 열망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아프게 읽힌다. 우리를 위로하듯 시인은 다시 쓰는 ‘시인의 말’을 통해 “저물녘이면 언제나 희망의 연둣빛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일몰 옆엔 일출이 서 있으리니/아직 젊은이여/내부는 언제나 외부의 내부/이 고단한 행성 위에서”라 적는다. 우리 곁으로 돌아올 한국시의 얼굴들 ‘창비시선_다시봄’ 시리즈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발간을 통해 켜켜이 쌓인 한국시의 지층을 탐지해나갈 것이다. ‘여성’ 서정시‘ ‘첫 시집’ ‘작고 시인’ 등 다양한 주제에 맞는 시집들을 엄선해 순차적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지성과 예술이 한데 깃든 한국 대표 시인들의 시집을 다시 살펴보며, 우리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삶의 비의(秘意)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창비시선_다시봄’을 통해 우리가 지녀온 시의 유산이 얼마나 풍요롭고 또한 현재적인지를 다시금 발견하고, 이전의 시와 지금의 시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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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시, 다시 열린 세계 새로 만나는 한국시의 역사, ‘창비시선_다시봄’ 시리즈 40여년간 한결같이 독자들과 함께해온 ‘창비시선’이 또 하나의 의미있는 기획을 선보인다. 기존에 간행됐던 시집 중에서 그 주제의식과 언어의 현재성이 여실한 시집을 가려 뽑아 지금의 독자들과 새롭게 나누는 시리즈‘창비시선_다시봄’이다. 1975년 3월 신경림 시집 『농무(農舞)』를 시작으로, 창비시선은 2019년 10월 현재 436권에 달하는 시집을 출간하며 우리 시의 문학적 고투와 성과를 오롯이 담아내왔다. 서정의 언어로, 저항의 외침으로, 다양성의 목소리로 이어져온 창비시선은 유장하고 넓은 한국시의 강물이 되었다. ‘창비시선_다시봄’의 출간은 이 문학적 물길과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지금 여기로 이어진 한국 현대시의 본류를 살피는 일이자 아직 그곳에 온전히 머무르고 있는 맑고 다채로운 미감을 현재의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기획이다. 시리즈의 시작을 함께한 시인들은 오래전에 선보인 작품을 펼쳐두고 애정과 고심으로 퇴고를 거듭하며 시간의 더께를 털어내었고 그 소회를 책에 밝혀두었다. 아울러 표지 디자인은 새로운 시작에 대한 포부를 담아 1966년 발간된 계간 『창작과비평』 창간호의 디자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만들었다. 고통에 맞서는 신실한 싸움과 견딤 ‘창비시선_다시봄’ 시리즈는 천양희 시집 『마음의 수수밭』(창비시선 122, 1994)으로 시작된다. 이 시집은 196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천양희 시인의 네번째 시집으로 실존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갖는 한계와 고독을 깊이있게 성찰해온 시인이 1970년대 말부터 발표해온 시편들이 묶여 있다. 일찍이 이 시집을 두고 김사인 시인은 “처절한 고통과 외로움의 시들이 있다. 누군들 제 몫의 운명에 덜미를 잡히지 않으랴. 욕망과 운명의 그 낯설고 공포스런 어긋남을 누군들 면할 수 있으랴. 그러나 그 절망적인 어둠에 헐벗은 손으로 맞서 스스로를 방기하지 않고 이처럼 신실한 싸움과 견딤을 보일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이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한다”라고 평한 바 있다. 천양희 시인은 “한편은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을 위해 다른 한편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마지막 한편은 우리를 외면한 사람들을 위해 바쳐졌으면 좋겠다”라고 『마음의 수수밭』을 25년 만에 재출간하는 소회를 밝힌다. 우리 곁으로 돌아올 한국시의 얼굴들 ‘창비시선_다시봄’ 시리즈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발간을 통해 켜켜이 쌓인 한국시의 지층을 탐지해나갈 것이다. ‘여성’ 서정시‘ ‘첫 시집’ ‘작고 시인’ 등 다양한 주제에 맞는 시집들을 엄선해 순차적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지성과 예술이 한데 깃든 한국 대표 시인들의 시집을 다시 살펴보며, 우리는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삶의 비의(秘意)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창비시선_다시봄’을 통해 우리가 지녀온 시의 유산이 얼마나 풍요롭고 또한 현재적인지를 다시금 발견하고, 이전의 시와 지금의 시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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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돌아선 곳에서 나를 달빛 든 눈으로 바라보던 사람” 내면의 고스란한 슬픔을 끊임없이 달래고 어르는 시인, 박경희 2001년 등단한 시작한 박경희 시인의 신작 시집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이 출간되었다. 첫 시집 『벚꽃 문신』(실천문학사 2012)으로 ‘새로운 교감적 이야기꾼 시인의 등장’이라는 호평을 받았으며, 그동안 장르를 넘나들며 꾸준한 창작활동을 해왔다. 애잔한 서정과 떠나간 이들을 향한 그리움이 가득한 일상의 푸근하고 평범한 장면과 그 이면에 미지근하게 남아 있는 죽음의 기척들을 감싸 안고, 삶을 넉넉하게 받아들이면서 “능청과 해학, 시원시원한 몸짓과 사투리”들로 풀어내는 박경희의 이번 시집은 “슬픔을 걷어내는 방식이 가히 독보적”(안상학, 추천사)이다. “손바닥 깔짝 뒤집으면 이승과 저승이 바뀌는겨, 암만, 다 그런겨” 세상과 현실의 고통을 아파하는 ‘이야기 시’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은 박경희 시인이 7년 만에 펴내는 두번째 시집이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고향 마을을 배경으로 질박한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 “인간사가 절기 속에 녹아 있는 핍진한 시편들이 구성지던”(김해자, 발문) 첫 시집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공생과 공유의 세계관을 펼쳐 보인다. 고향의 생생한 입말을 살린 걸쭉한 입담과 정감어린 언어 속에 삶의 애환이 오롯이 서린 시편들이 뭉클한 감동을 자아낸다. 남다른 눈썰미와 따듯한 시선으로 농촌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서사적 사건을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박경희의 시는 무엇보다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호미 대신 펜 쥐라”(「경칩」)는 말을 남기고 “산 넘어 가신 지 팔년”(「청명(淸明)」)째인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 “저승과 문턱이 같은”(「하늘 깃털」) 나이에 든 ‘욕쟁이’ 어머니와 “한번씩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아버지를 찾는”(「참말로 벨일이여」) 치매 걸린 할머니에 대한 곡진한 사랑으로 천연덕스럽게 풀어놓는 가족 서사에는 유머러스한 화법 속에서도 애잔함이 스며 있다. 시인에게 가족은 삶의 동력이며, 서로 부대끼며 ‘기냥저냥’ 살아온 삶의 풍경은 아련한 추억 속에서 고스란히 한편의 시가 된다. 세상의 진실을 말하고 강파른 현실의 고통을 아파하는 사람으로서 시인의 시선은 비단 가족 서사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인의 마음은 “집도 학교도 다리도 붕어 집이” 되고 만 이웃들의 “금지된 삶”(「물속의 집」)과 “짧은 대나무 마디로 살다 간 사내의 빈 곳”(「내 마음 기우는 곳」)에 기운다. 한편 “개발인지 게발인지” “굴착기 돌아가는 소리 요란”(「엄지손가락」)하게 삶의 터전이 파괴되어가는 농촌의 그늘진 이면을 짚어내고, 4·3 제주항쟁과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4·16 세월호 참사 등 “아리고 쓰려서 쓸쓸한”(「그대들의 마디 꺾이는 소리」) 고통의 역사를 되돌아보기도 한다. 김해자 시인은 발문에서 “박경희는 느린 사람이지만 일견 촌스럽고 시대착오적으로 보일 만한 시를 쓸 만큼 용기 있고 진실”한 시인이라고 평하면서 “농경문화의 자식으로서 대지적 감수성이 몸에 밴” 그의 시는 “글자 이전에 말이, 말 이전에 마음이 있었음을 실감케 한다”고 적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좀처럼 쉽게 곁을 줄 수 없는 냉엄한 시대에 재미와 감동이 어우러진 그의 시는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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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날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달려만 갔다” 잊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역사, 사라진 이름들을 불러낸 시 시는 물론 분야를 넘나드는 다양한 창작·연구 작업을 통해 문학계에 굵직한 족적을 남겨왔으며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 중인 이동순 시인의 신작 시집 『강제이주열차』가 출간되었다.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한 이래 시인은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우리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 중 한 사람으로 입지를 굳혀온 한편 분단 이후 최초로 『백석 시전집』을 발간한 것을 비롯하여 분단으로 매몰된 많은 시인을 발굴하여 문학사에 복원하는 등 연구자로서도 뚜렷한 성과를 남겼다. 1989년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이 당선되어 비평가로서도 활동해온 시인은 대중가요사에도 조예가 깊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번 시집 『강제이주열차』는 시인의 열여덟번째 시집으로 구소련 시절 스탈린 정권이 자행한 고려인 강제이주사를 다룬 연작 성격의 작품집이다. 강제이주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슬픈 영혼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인 이 시집에는 “머나먼 동쪽 끝에서 쫓겨와/평생을 물풀처럼 떠돌다 마감한”(「고려인 무덤」) 고려인들의 한 맺힌 삶과 죽음이 눈물겹게 그려져 있다. 고려인 강제이주 문제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의의 자체가 각별한 동시에 희생당한 이들과 살아남은 이들, 그 모두의 애끓는 목소리를 담아내고자 한 시인의 정성과 내공이 문학적으로도 빛을 발하는 귀한 성과다. 고려인 강제이주사를 다룬 가장 생생하고 뜨거운 노래 제1부 ‘강제이주열차’에서는 부제 그대로 강제이주사를 집중적으로 천착했다. 이 시집에서 단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대목이다. 시인은 80여년의 세월 동안 소외와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왔던 강제이주 문제를 자기 문학의 화두로 삼고서 그 시절 “인간이 아니고 짐승이었”(「우리는 무엇인가」)던 고려인들의 처절한 수난의 역사를 세세하고 실감나게 복원해낸다. 삶의 터전이던 연해주에서 하루아침에 수만 킬로 떨어진 중앙아시아 허허벌판으로 내몰려야 했던 장삼이사들의 숱한 사연이 담겨 있다. 제2부 ‘슬픈 틈새’에서는 사할린 한인들을 주로 다루었다. 역사학자 반병률 교수의 해설에 언급된 바와 같이 사할린은 오랫동안 러시아와 일본 간 분쟁의 장이었던 곳으로서 무수한 일제 강제징용자들의 아픔이 서려 있다. 시인은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끝내 돌아오지 못한 채 “만리타향에 뼈를 묻은”(「강제징용자」) 사할린 한인들의 기구한 세월을 그려냈다. 제3부 ‘두개의 별’에는 2018년 카자흐스탄을 방문했던 경험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이 담겨 있다. 시인은 “낯설지 않은 얼굴들”(「바자르」)의 고려인들을 만나면서 “말은 안 통해도/굳게 잡은 두 손으로 전해오는 힘”(「크질오르다에서」)에서 동포로서의 애틋한 정을 느끼기도 하고, 고려인 묘지에 나란히 묻힌 두 혁명가 홍범도와 계봉우를 기리기도 한다. 특히 시인은 전10권에 이르는 서사시 『홍범도』(국학자료원 2003)를 집필하기도 했던바, 홍범도 장군이 대한독립군을 창건하면서 공포했던 ‘유고문’의 형식을 빌린 「신 유고문(新諭告文)」은 오늘날 한반도 상황에 대한 메시지를 전하는 작품으로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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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조용히 네게 맥주를 권하고 초록의 유품인 젓가락을 가지런히 놓았다” 재일 조선인 문학을 대표하는 시인 김시종의 계절 시편 까칠까칠한 언어, 찢어진 호흡, 낯선 서정을 만나다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고 재일 조선인으로서의 운명에 맞서며 평생 치열한 작품활동을 펼쳐온 김시종 시인의 시집 『잃어버린 계절』이 번역 출간되었다. 철학자 이진경과 한국문학 연구자 카게모또 쓰요시의 공동 번역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완역본이다. 김시종 시인은 제주 4·3항쟁에 휘말려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1949년 일본으로 탈출하여 오오사까의 재일 조선인 거주지 이까이노에 정착한 뒤 줄곧 일본어로 시를 써왔다. 시인에게 일본어는 자신의 감성과 의식 체계의 밑바탕이 되는 모국어나 다름없는 언어였다. 그러나 스스로 ‘일본어에 대한 보복’으로 문필 생활을 하고 있다고 밝혔듯이, 그의 시는 일본식 문체가 아닌 데다가 반일본적 서정이 담겨 있다. 그런 까닭에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일본 문단의 주류에서 벗어나 있기도 했으나, 이후 마이니찌출판문화상(1986), 오구마히데오상 특별상(1992), 타까미준상(2011), 오사라기지로오상(2015) 등을 수상하고 최근 ‘김시종 컬렉션’이라는 제목의 저작집이 출간되는 등 주목받고 있다. 『잃어버린 계절』의 옮긴이들은 ‘일본식 서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낯선 어법을 구사하는 저자의 일본어를 우리말로 제대로 옮기기 위해 각별히 애를 썼으며, 해설에 가까운 ‘옮긴이의 말’을 통해 김시종의 문학적 삶과 독특한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길잡이 역할을 하고자 했다. 김시종을 읽는다는 것은 그것을 읽는 나의 서정과 대면하는 일이다 『잃어버린 계절』은 2010년에 출간된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으로, 계절별로 8편씩 모두 32편의 시가 실려 있다. 제41회 타까미준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시집은 원서에 붙은 ‘사시(四時) 시집’이라는 부제만 보면 사계절을 제재로 하여 자연을 노래하는 서정시로 읽히기 쉽다. 그러나 실제 안에 담긴 것은 자연을 찬미하는 부드럽고 평화로운 서정이 아니다. 시인은 “삶의 밑바닥에 앙금처럼”(「구멍」) 남은 잃어버린 시간들을 되살려내어 자연과 인간을 다른 무엇으로 대면하고자 비극적 삶과 타인의 고통을 성찰하는 서정, 곧 ‘서정에 반하는 서정’(옮긴이의 말)에 가닿는다. 여기서 우리는 평생 서정과 대결해온 시인이 이 시집의 제목을 ‘김시종 서정 시집’이라고 하려다 민망해서 그만두었다는 말을 또렷이 이해해야 한다. 시인은 녹슬어가는 일상의 시간을 바림질하며 빛바랜 영상으로 남아 있는 ‘멈춘 시간’들을 현재 속으로 불러내어 “스스로 시간의 출구”(「녹스는 풍경」)가 되어간다. 돌아갈 곳을 잃었으나 “어디서 살든 죽지 않는 한 사람은 살게 마련이다”(「잃어버린 계절」)라는 시인의 외침은 자못 처연하게 들려온다. 갈 곳 없는 삶에도 계절은 어김없이 피고 질 것이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나라일지라도/도달할 수는 있을 터”(「귀향」), 그리하여 시인은 고요한 마음의 지평, “끝없는 꿈의 대지”(「여름 그후」)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구순(九旬)의 나이에 “지금 나는/부도덕할 만큼 살찐 놈”(「어금니」)이라는 깨달음 속에서 시인은 “이제야 알게 된 나의 어리석은 60년”(「여름 그후」)을 곱씹어본다. 그리고 거기에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사소한 존재들에게 촉촉한 시선을 던지면서, 아득하게 멀리 있고 이제는 오지 않게 된 것들과 우리가 매일 잃어버리지만 “결코 미미하다 할 수 없”(「봄에 오지 않게 된 것들」)는 것들에 대해 쓴다. 파편처럼 깊이 박힌 쓰라린 기억들을 되새기며, 조국을 빼앗았던 식민 종주국의 언어로 시를 써온 노시인의 회한과 “누구도 밀쳐낼 수 없는/깊은 우수”(「마을」)가 서린 시들이 오래도록 가슴을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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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온다는 것만으로 세상이 나아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소멸하는 모든 것들을 따뜻하게 끌어안는 두 손 세상을 바라보는 온유한 시선과 유쾌한 발상이 돋보이는 순박한 시편들로 개성적인 서정의 세계를 펼쳐온 고영민 시인의 신작 시집 『봄의 정치』가 출간되었다. 2002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한 시인은 그동안 서정시의 다채로운 변주를 보여주며 17년간 꾸준히 시작 활동을 해왔다. 따뜻함과 삶의 비애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그의 시는 다양한 감흥을 불러일으키는데, 특히 일상적인 소재에 곁들인 유머와 해학은 독보적이라 할 만하다. 삶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친근한 언어로 정통 서정시 문법에 가장 충실한 시를 쓴다는 평가를 받는 시인은, 그간 지리산문학상(2012)과 박재삼문학상(2016)을 수상하면서 시단의 주목을 받았다. 『봄의 정치』는 박재삼문학상 수상작 『구구』 이후 4년 만에 선보이는 다섯번째 시집이다. “생의 활력이 아니라 죽음의 그림자가 오롯한”(안지영, 해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기존의 섬세한 시어와 결 고운 서정성을 간직하면서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과 사물의 존재론에 대한 깊은 사유를 보여준다. 표제작 「봄의 정치」를 비롯하여 총 66편의 시를 4부에 나누어 실었다. 낮은 자세로, 공손한 마음으로 사소한 일상을 품어안는 시 평범한 일상 속에서 비범한 생명의 새로운 경지를 발견해내는 시인은 “어떤 속삭임도/들을 수 있는 귀”와 “아주 멀리까지 볼 수 있는 눈”(「내가 어렸을 적에」)으로 사물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간다. 일상의 소재들을 마음껏 부리면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의미와 무의미의 내밀한 관계를 안과 밖으로 변주하면서 “안에서/밖을 만드는”(「밀밭 속의 개」) 시적 사건들을 포착해낸다. 더불어 시인은 “액자를 떼어내고 나서야 액자가 걸렸었다는 것이 더 뚜렷해지는”(「액자」) 이치를 깨달으며, 부재로 인해 존재가 드러나는 삶의 역설적인 풍경을 깊은 통찰력으로 응시한다. 시인은 생명에 대한 사랑과 연민으로 사소한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며 소멸되어가는 존재들에게 온기를 불어넣는다. 마치 “입속에 새끼를 넣어 키우는/물고기”(「입속의 물고기」)같이. 낮은 자세로 다가가 사물에 눈을 맞추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끝내 아무것도/움켜쥐지 못한”(「조약돌」) 존재들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공손한 마음으로 사물의 본성을 일깨우며, 쓸쓸하게 저물어가는 생의 뒷면을 따듯하게 품어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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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창문을 회복하듯이 우리는 낯선 평화를 볼 것입니다 알려진 적 없는 방식으로, 알려진 적 없는 세계를 증명하는 시인의 탄생 2014년 중앙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유이우 시인의 첫 시집 『내가 정말이라면』이 출간되었다. 등단 이후로 “수식과 수사의 그늘이 사라진 피부 언어” “상상과 풍경의 드넓은 교호 작용”으로 주목을 받았던 시인은 가볍고 탄성 있는 언어를 구사하며 상상과 풍경이 어우러진 개성적인 시세계를 꾸려왔다. 화려한 수사를 앞세워 대상을 직설적으로 묘사하기보다는 한발 물러서 세상의 풍경을 관찰하면서 단어 하나하나에 자신만의 감정을 쏟아내는 그의 시는 신인으로서의 참신함을 넘어서는 견고한 시 정신과 기발한 언어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벽을 알아내자고/벽에 부딪”(「모서리」)치듯 기존의 언어를 갱신하고 재구성해온 시인은 “사람처럼 구는/바람”(「맹인」)처럼 상상의 세계를 마음껏 비행하며 ‘정말 쓰고 싶은 시’를 쓰는 듯하다. 등단 5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에서 시인은 풍요롭고 무한한 언어의 가능성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언어에 대한 자의식이 깊은 만큼 말을 부리는 솜씨가 남다르고, 남다른 만큼 그의 시는 낯설다. 기존의 시 문법을 벗어난 과감한 행갈이, 성큼성큼 건너뛰는 행과 행 사이의 여백, 툭툭 던져놓는 듯한 감각적인 문장들, 상식을 뛰어넘는 모호한 단어의 조합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새에게 나무라고 하고/나무에게 새라고”(「놀이」) 불러보는 시인은 “다른 사람인 듯 자신을 여”(「그 자신의 여름」)기며 마치 놀이하듯 세계를 뒤집어보고 사물의 내면을 촘촘히 파고들어간다. 유이우의 시를 읽다보면 마치 “해석되지 않는”(「구멍」), 해석할 수 없는 세상에 와 있는 듯하다. 세상을 억지로 풀거나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려는 그 마음이, 어쩌면 세상과 우리의 ‘정말’을 증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무가 비키지 않으면 세상이 나무를 돌아”(「비행」)가는 모습까지 세심하게 관찰하는 시인이 펼쳐 보이는 낯선 풍경은 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진짜 모습일는지 모른다.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시선과 “알려진 적 없는 방식으로 알려진 적 없는 인간의 고유성을 드러내는”(김소연, 추천사) 이 재기발랄한 젊은 시인의 첫 시집에서 우리는 “풍경이 창문을 회복”(「창문」)하듯,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또다른 세계와 “완전히 다른/좋은 날들이 계속되”(「이루지 못한 것들」)는 삶을 경험하는 색다른 경이로움을 맛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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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가고 소외된 곳으로 나는 오늘밤도 푸른 편지를 쓰리 푸른 그리움으로 빚어낸 투명한 언어의 선율 삶의 근원적 슬픔과 고통을 정갈하고 투명한 언어에 담아 노래해온 노향림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 『푸른 편지』가 출간되었다. 노향림 시인은 1970년 『월간문학』으로 등단한 뒤 시력 49년간 묘사시의 정석을 보여주는 독보적인 시세계를 일구어온 우리 시단의 대표적인 여성 시인이다. 시쓰기를 필생의 작업으로 여기며 반세기에 이르는 동안 오로지 시 창작의 외길만을 걸어온 시인은 섬세하고 감각적인 이미지와 빼어난 묘사력으로 시를 풍경화의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최근(2016년) 제11회 박두진문학상을 수상하며 느릿한 걸음으로 올곧이 자신만의 시학을 갈고 다듬어온 원로 시인으로서의 관록을 보여주었다. 『바다가 처음 번역된 문장』(실천문학사 2012) 이후 7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는 삶의 밑바닥을 투시하는 예민한 감각과 세상을 관조하는 그윽한 시선이 깃든 시편들이 아름답게 녹아 있다. “존재론적 원적(原籍)으로서의 사랑의 기억”(유성호, 해설)과 삶의 다양한 표정이 오롯이 담긴 고즈넉한 풍경에 흐르는 애틋한 슬픔의 정조가 가슴을 촉촉이 적신다. 서경과 서정의 눈부신 결합 노향림의 시는 삶의 경험을 명징한 언어의 세필로 그린 시간의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아직도 환히 부신 기억”(「돌아온 첫 시집」) 속에 어른거리는 “시대의 초상”과 “찬란한 생명의 무한한 시공간을 직조해”(김승희, 추천사)낸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지난 시간들의 아련한 기억의 바다에서 “섧디설운/이름 하나/기억 하나”(「동백숲길에서」)를 건져 올려 잃어버린 시간들을 복원해내고 삶의 근원적 의미를 새겨나간다. 인간 존재의 슬픔과 고독한 생의 이면에 깃들인 허무와 절망 속에서 시인은 특히 소외되고 단절된 것들, 가난하고 외로운 영혼들의 고단한 삶에 연민의 눈길을 건네며 “따듯한 입김 어린 불빛”(「가난한 가을」) 한줌 던져준다. 시는 불가능을 꿈꾸고, 시인은 낯설고 “다른 하늘을 꿈꾼다”(「시인의 본적지」). 7년에 한권꼴로 시집을 펴내는 과작임에도 시인은 시집을 낼 때마다 늘 겸손해진다는 마음을 여민다. 등단 50주년을 앞둔 연륜의 깊이만큼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음에도 끊임없이 시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시인에게는 아직 가야 할 길이 있다. “백지의 시 몇줄에 필생을 건”(「단 한 사람의 숨은 독자를 위하여」) 시인은 “시간 속에서 잊혀가고 소외된 시의 본적지”(‘시인의 말’)로 언제나 사랑의 ‘푸른 편지’를 띄워 보낸다. 풍경 속에 서린 삶의 고통과 비애를 투명한 언어로 빚어낸 이번 시집은 오래도록 우리 식은 가슴속에서 출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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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본 지금까지의 어떤 시와도 닮지 않았다” 최정례 시인의 번역으로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미국 초현실주의 대표 시인 제임스 테이트의 산문시집 심부를 찌르는 농담과 해결할 수 없는 삶의 아이러니를 만나다 미국 초현실주의 대표 시인 제임스 테이트의 산문시집이 시인 최정례의 번역으로 한국에 처음 소개되었다. 22세의 나이에 예일대 젊은 시인상에 선정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제임스 테이트는 2015년 71세의 나이로 타계하기 전까지 30여권의 저서를 통해 전미도서상, 퓰리처상,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상, 월러스 스티븐슨 상 등을 수상한 미국 현대시를 대표하는 작가다. 무질서하게 펼쳐진 일상 속의 초현실적인 사건들로부터 유머, 삶의 아이러니와 슬픔을 기발하게 직조하는, 독특하고 견고한 시세계로 대중과 평단의 지지를 고루 받았으며, 존 애쉬베리, 찰스 시믹 등 미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시인들은 지금까지의 어떤 시와도 닮지 않은 그의 전무후무한 개성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는 2005년에 발간된 그의 열네번째 시집으로 그가 평생 특별한 열정을 쏟았던 장르인 산문시 백여편이 실렸다. 우습고, 냉소적이고, 날카롭고 엉뚱하다 지금까지 미국 시에 있었던 시의 형식을 깨부수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자 한 제임스 테이트의 시는 언뜻 평이한 문장으로 쓰인 일상의 이야기로 보인다. 하지만 곧바로 엉뚱하고 황당한 사건이 펼쳐지며 독자를 당황스럽게 한다. 한 여자가 늑대를 낳고, 7월의 더운 한낮에 파산한 산타클로스가 나타나 맥주를 청하는 식이다. 이처럼 다변적으로 뻗어나가는 기발한 이야기는 저변에 또다른 줄기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며 놀랍도록 다양한 인물들과 의미를 창조한다. 무질서하게 펼쳐지는 이야기는 수수께끼처럼 보이지만 그 틈새로 언뜻언뜻 제임스 테이트 특유의 유머와 아이러니가 비치고 결국 수많은 상념과 이미지가 파문처럼 번져나가 완전히 새로운 모습의 시가 된다. 그에게 초현실주의는 일상의 개념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소수 특권층을 위한 것도 아닌, 매일 부딪치며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느닷없이 분출되는, 무의식적인 마음과 같은 것이다. 최정례 시인의 번역으로 만나는 제임스 테이트의 산문시 최정례 시인은 2006년 가을 처음으로 제임스 테이트와 그의 시를 접했다. 제임스 테이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의 낭독회에 갔다가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에 시집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를 사서 숙소로 돌아왔고, 그가 만들어낸 이야기에 강하게 매료되어 번역을 마음먹었다. 2009년 처음 번역을 시작해 십년을 매달리는 동안 제임스 테이트가 시치미 떼고 전하는 어수룩하고 수수께끼 같은 말, 무의미한 말들이 자연스럽게 그에게 스며들어 최정례 본인의 시 속에서 변주되기도 했다고 전한다. 최정례 시인은 책 말미의 애정 어린 작품해설을 통해 테이트의 시세계를 친절하고도 상세히 소개한다. 분방한 상상력과 독특한 화법을 꾸준히 독자들에게 선보여온 최정례 시인의 언어이기에 제임스 테이트의 시가 가진 정수를 번역할 수 있었던 바, 『흰 당나귀들의 도시로 돌아가다』가 각기 강한 개성을 가진 두 시인의 매력을 함께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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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갈 수 있어요 무엇으로든 빚어질 수 있어요 저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어요” 삶의 안쪽을 끈덕지게 탐구하는 단단하고 맑은 시편들 섬세한 감성의 언어와 선명한 이미지로 독자적이면서도 빼어난 서정의 세계를 펼쳐온 전동균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 『당신이 없는 곳에서 당신과 함께』가 출간되었다. 전동균 시인은 1986년 『소설문학』으로 등단한, 올해로 시력 30년이 넘는 중견 시인이다. 등단한 지 1년 만에 잡지사가 문을 닫는 곡절이 있었으나 이후 김기택, 장석남 시인 등과 함께 ‘시운동’ 2기 동인으로 참여하여 동시대 시인들 가운데 전통 서정의 시혼(詩魂)을 가장 투명하게 보여주는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으면서 묵묵히 자신만의 단단한 시세계를 다져왔다. 젊은 나이(24세)에 등단한 뒤 등단 11년 만에 첫 시집을 펴냈고, 이후 꾸준한 창작 활동을 거쳐 최근 백석문학상(2014)과 윤동주서시문학상(2018)을 수상하는 등 평단의 큰 주목을 받고 있다. 백석문학상 수상작 『우리처럼 낯선』(창비 2014)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겸허한 마음으로 삶의 비의와 존재의 근원을 파고드는 자각과 통찰의 심오한 세계를 보여준다. 차분하고 담백한 어조인 듯하면서도 강렬하고 비감한 목소리에 때로는 따뜻한 해학이 깃든 시편들이 깊은 울림 속에서 공감을 자아낸다. 윤동주서시문학상 수상작(「‘자정의 태양’이라 불리었던」 외 6편)을 비롯하여 총 51편의 시를 수록하였다. “그러나 괜찮았다” 슬픔과 고통뿐인 삶을 보듬는 따뜻한 사랑의 노래 “있음과 없음, 삶과 죽음, 순간과 영원, 소통과 불화 등 이항대립의 실존적 사건이 뒤죽박죽 얽힌”(최현식, 해설) 이번 시집에는 신성의 세계를 지향하는 종교적 감성이 두드러진 시가 적지 않다. 시인이 가톨릭 신자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집이 오로지 종교적 죄의식이라든가 영적 각성에 침잠해 있는 것은 아니다. 정작 시인의 눈길이 가닿는 곳은 종교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지금–여기’의 현실, 어둑하고 신비한 삶의 안쪽이다. 시인은 현실에 대한 비극적 인식 속에서 삶과 인간 존재의 궁극적 의미와 자신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묻는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슬픔과 고통뿐인 삶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사람으로 와 기쁘다고”(「떨어지는 해가 공중에서 잠시 멈출 때」). 시인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 했다. “곁에 있어도 안 보이는 것들”(「잊으면서 잊혀지면서」),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존재들의 그림자를 늘 깊이 응시하면서, 불화의 세계를 함께 견디어내며 살아가는 타자의 고통과 슬픔을 외면하지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시인은 시가 “깨진 그릇 같은 존재들”(「1205호」)을 위로하는 기도가 되고 “슬픔을 빛으로/신음을 향기로 내뿜는”(「춘수(春瘦)」) 노래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빛이 없는 찬란”(「‘자정의 태양’이라 불리었던」)을 발견하고자 세상을 “더 멀리, 더 깊이”(「물속의 기차」) 바라보는 시인의 선한 눈길이 더없이 애틋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