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 정부에 벌써 황혼이 깃들고 있다. 예상보다 일찍 다가온, 초라한 황혼이다. 그런 황혼 속에서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던 개혁도 꼬리를 감추어버렸다. 개혁은 대관절 어디 갔는가. 개혁이 이제 한 단계 급수를 올려 혁명의 길로 나선 것도 아니고 우리 사회가 더이상 개혁을 외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충분히 개혁된 것도 아닌데, 개혁만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더욱 모양이 사나운 것은 그동안 개혁의 주요 대상이었던 세력들이 다시금 전열을 가다듬고 보기 좋게 반격을 가하는 양상마저 벌어짐으로써 한국의 보수세력이 참으로 막강한 파워와 질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언론개혁이 그렇다. 그러고 보면 김대중 정부의 집권세력들이 침이 마르도록 개혁을 외쳤건만 결과는 형편없이 초라한 셈이다. 보궐선거에서도 참패하는가 하면 갖가지 권력형 스캔들이 쉴새없이 터져나오더니 급기야는 당마저 무주공산이 되었다. 도대체 어쩌다 일이 이 지경으로 꼬여버렸는지, 그들로서는 사실 허탈하고 참담할 것이다. 그래서 누가 언론을 건드렸느냐고, 누가 선생님들을 건드렸느냐고, 누가 의약분업을 하자고 했느냐고 그간의 개혁 조치들에 대한 자탄이 나오는 모양이고, 자신들의 개혁의 충정을 국민들이 알아주지 못한다는 원망이 나오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남을 원망할 일인가. 만일 지금이라도 정권의 황혼이 장엄하고 찬란하기를 원한다면 시선을 자신들의 내부로 돌리는 자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애초부터 자신들, 김대중 정부의 집권세력들이 개혁을 제기하고 개혁을 이끌었던 동기와 과정을 되돌아보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적어도 개혁을 이 정권의 정체성으로 삼으려 한다면, 그것으로 다른 정권과 구별되기를 원한다면 그렇다.
루쉰(魯迅)의 대표작 『아큐정전(阿Q正傳)』에 서 주인공 아큐는 원래 혁명에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을 못살게 굴고 지배하던 ‘나으리’가 혁명이라는 말에 벌벌 떠는 모습을 보고는 혁명이라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는 혁명에 투신, 혁명가 행세를 한다. 그런 뒤 마음에 드는 여자는 모두 내 것이고, 갖고 싶은 것은 모두 내 것이라고 외친다. 그에게 혁명은 상대에게는 없는 자신만의 무기이자 자신이 주인 행세를 하는 길이며, 재산을 차지하기 위한 방편일 따름이다. 루쉰은 아큐가 혁명에 투신하는 과정을 통해 중국 민중들이 혁명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묘파하고 있다. 당시의 신해혁명(1911)이란 쑨원(孫文)이 아무리 공화제라는 거창한 대의명분을 내걸었다고 하더라도 아큐와 같은 민중들과 혁명에 가담하였던 일부 세력들에게 그것은 자리를 빼앗기 위한 혁명으로 이해되고 수행되었을 뿐이고, 그런 까닭에 암흑의 현실 자체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물론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일련의 개혁들이 전적으로 아큐 식으로 시작되고 진행되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상당 부분은 그런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더구나 많은 국민들이 개혁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렇게 실감하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일찍 다가온 정권의 황혼 앞에서 그들이 거듭 새겨야 할 것은 그들이 결국 아큐처럼 개혁에 동참하고 아큐처럼 개혁을 외쳤다는 혐의에서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느냐는 점이고, 설령 애초에 훌륭한 대의명분에서 출발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밑으로 내려오고 현실 속에서 수행되면서 아큐 식 개혁으로 변한 경위에 대한 자성이다. 그들 중 대다수가 원래 개혁적인 사람이었던 것이 아니라 개혁을 외치면서 비로소 개혁세력이 되었고, 상대편을 제압하기 위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개혁에 투신하지 않았는지 냉엄한 자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봇물처럼 터져나오는 갖가지 권력형 스캔들을 볼 때 더더욱 그러하다.
본디 개혁이란 양날의 칼이어야 옳다. 먼저 자신을 개혁하고 그런 가운데 남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 집권세력들이 외치고 실천한 개혁은 자신은 그대로인 채 상대편의 자리를 빼앗고 내 마음대로 모든 것을 차지하며, 상대의 권위와 자리를 빼앗기 위한 수단으로 작동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다. 개혁은 그런 전투를 수행하기 위한 총칼일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당초 충분한 정당성을 지녔던 개혁의 목표조차도 개혁 과정에서 그 의미가 퇴색되고, 정당성을 잃어버린다. 언론개혁을 둘러싼 파동이 대표적으로 그러하다.
물론 그러한 아큐 식 개혁이 일시적 영화를, 활기를 가져다줄 수는 있다. 하지만 결국은 초라한 파국을 맞을 수밖에 없다. 아큐는 결국 죽음을 당하지 않는가? 그런데 그런 아큐 식 개혁이 비단 김대중 정부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김영삼 정부 때도 그 이전에도 있었다. 한결같이 개혁을 외치면서 출발한 그들 정권의 출발은 더없이 장대하였지만 끝은 한없이 초라했던 여정이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면 아큐 식 개혁이란 분단체제 속에서 한국 정치세력들이 주도하는 개혁의 원형이라 하겠다. 자리 빼앗기 게임이자, 주인 바꾸기 놀이로서의 개혁이 바로 그것이다.
사정이 그러할 때, 탈분단시대를 맞아 어떻게 그러한 아큐 식 개혁에 종지부를 찍고 민중이 추동하는 개혁을 이끌어낼 것인가. 우리 사회의 개혁과 진보를 염원하는 사람들이 국민의 정부의 초라한 황혼 앞에서 다시금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