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강에서
오전을 그렇게 대기 상태로 보내고 오후 2시가 되어서야 버스에 올랐다. 대동강을 간다고 했다. 배를 타는 곳은 주체사상탑 앞 선착장이었다. 175m의 주체사상탑 앞에 150m 높이의 분수가 물줄기를 시원스럽게 뽑아 올리고 있었다. 분수에서 뿜어내는 물보라를 맞으며 일행들은 모두 즐거운 비명을 질러댔다. 어제부터 동행하는 북의 안내원 K 참사와 나는 뱃머리에 앉아 있었다. 대동강물은 한강물과 비슷했다. 그렇게 맑지는 않았다. 강을 따라 얼마쯤 나아가는데 K 참사가 저기 저 배를 보라고 한다. 프에블로 호라고 한다. 작지만 미국과 맞서고 있는 자존심을 표현하고 싶어하는 모습이 얼굴 표정에 나타나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어려웠어요?” 나는 그게 궁금했다.
“전후 복구기만큼 어려웠습니다.” 그는 한마디로 그렇게 대답했다. 언제부터 그랬느냐고 하니까 1993년부터라고 한다. 한국전쟁 후에는 모든 것이 다 어려웠던 때니까 그러려니 하고 견디어냈지만 그 이후 경제사정이 나아졌다가 닥친 어려움이라 더 힘들었다고 한다. 조금 나아지는가 싶다가 해일이 서해안 전역을 뒤덮어 농토를 온통 쓸어버리는 바람에 수십년 만의 대풍을 기대하던 북한사람들의 기대를 완전히 앗아가버렸다고 한다.
배를 내린 곳은 만경대였다. 그날 일정을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도 이 여행의 특징이었다. 행선지만 알 뿐 어디서 타서 어디서 내리는지는 타고 내려봐야 안다. 만경대에는 김일성 주석의 생가가 있었다. 생가 입구의 잘 정리된 푸른 잔디밭과 그 옆에 서 있는 미루나무, 거기서 들리는 매미소리가 전형적인 여름의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생가는 사진과 그릇 등이 전시되어 있는 깔끔한 초가 한 채 그리고 그 앞에 농기구가 놓여 있는 헛간과 장독대가 전부였다. 거기에 우리 일행 340명과 북측 안내원 100여 명이 들어가 구경을 하고 사진을 찍고 하려니 사람들과 부딪쳐 마치 붐비는 전철역을 빠져나올 때처럼 복잡했다. 거기다 여름 햇살이 어찌나 뜨거운지 빨리 보고 그늘을 찾아가 더위를 식히고 싶어했다. 방명록이 어디 있었는지 누가 방명록을 썼는지 전혀 생각지도 알지도 못했는데 다음날 아침 남쪽 신문은 방명록 사건을 특종으로 보도했고 보도를 접한 남쪽 사람들은 비난과 우려와 흥분으로 들끓고 있다는 이야기를 풍문으로 들었다.
동명왕릉 다녀오는 길
평양 근교에 있다는 동명왕릉을 찾아가는 길에는 옥수수밭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한참 자라고 있는 푸른 옥수수들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옥수수가 먹고 싶어졌다. 나는 정말 옥수수를 좋아한다. 차에서 내리며 북측 안내원에게 이 근처에 옥수수 파는 곳이 있느냐고 물었다. 거리에서나 또는 상점에서 팔고 있으면 얼른 가서 사 먹고 싶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건 참으로 자본주의적인 발상이었다. 옥수수를 파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연변이나 베트남에서처럼 길에서 무엇을 파는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고려호텔 근처에서 아이스크림 같은 것을 파는 걸 본 게 유일한 것 같았다.
고구려 시조인 동명왕의 능은 새롭게 단장되어 있었다. 석인상들도 그렇고 마상도 전부 새로 깎아 세운 것들이었다. 규모도 대단했고 석상들도 단단하고 견고한 느낌을 주었다. 고구려 특유의 진취적인 기상이 살아 있는 작품들이었다. 고구려의 정신, 고구려의 기상 같은 것을 통해 신라, 백제의 전통과는 또다른 무사정신, 신화시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시기를 관통하는 강고하고 웅대한 힘 그런 걸 드러내고 싶어하는 걸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옥수수밭 옆으로 난 길가에 젊은 아낙이 아이를 업고 서 있었다. 하필 가장 어려운 시기에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키우며 많이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저녁노을을 보며 시 한 편을 썼다.
“광대한 옥수수밭 위로 노을이 진다/ 맨손으로 일군 땅 위에 금빛 노을이 진다/ 고난의 시절을 함께 걸어오지 않은/ 나는 진정 이들의 벗인가/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한/ 이들과 험난한 길을 함께 하지 않은/ 나는 이들의 형제인가/ 오늘 이렇게 손잡고 웃지만/ 내일을 위해 오늘을 살 수 있는 진정한 벗인가/ 내일도 함께 웃으며 가진 걸 나눌 수 있는 동무인가/ 평양으로 가는 길/ 폐허의 하늘 위에 뜨거운 노을이 진다.”
묘향산에서
다음날은 묘향산엘 갔다. 먼저 묘향산 국제친선전람관을 들렀다.
“노대 위에 올라서니 천하절승 예로구나/ 묘향산 절경이야 태고부터 잇는 것을/ 전람관 여기 솟아 푸른 추녀 나래더니/ 민족의 존엄 빗나 비로봉 더욱 높네……”
이렇게 시작하는 「묘향산 가을날에」라는 시가 시비에 새겨져 있다. 김일성 주석의 시라고 한다. 국제친선전람관은 세계 여러 나라 국가원수들이 상호 방문을 할 때 받은 선물을 전시한 곳이다. 나는 거대한 상아조각이나 보석들보다도 아프리카의 목공예가 훨씬 멋있어 보였다. 남한의 정주영, 김우중 같은 대기업 회장이 준 선물이나 에이스 침대에서 선물한 침대 및 가구 일체 그런 것들도 전시되어 있었다.
그렇게 몇시간, 구경을 하고 다니다 지하층 어딘가를 들어갔더니 밀랍으로 만든 김일성 주석의 실물 모형이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뒤는 항일무장투쟁을 하던 삼지연 연못의 물이 진짜 흐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놓았는데 돌아나오려는 순간 북측 여자 안내원 한 사람이 눈물을 주르르 흘린다. “살아 생전 그렇게 뵙고 싶었는데 가까이서 한 번도 뵙지 못하고 이렇게……” 하면서.
이들에게 김주석은 종교 이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님 상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기독교 신자를 나는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백두산 시 낭송회
백두산에서 하기로 한 남북 시인 시낭송회는 성사되지 않았다. 밤샘 실무협상을 벌인 신동호 시인의 표정이 밝지 않다. 북측에서 별로 하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희성 부이사장, 황석영 선배와도 상의를 하였다. 북측 실무자들이 남측 시인들의 시를 문제삼은 것 같다. 어제 국제친선전람관에서 방명록에 서명을 부탁받았을 때 황석영 선배가 나서서 말린 것에 대한 항의의 성격도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나는 시낭송회를 폐기하자는 안과 우리끼리라도 백두산에서 시낭송회를 하자는 안을 가지고 논의하자고 제안하였다. 우리측 가수가 기타 반주를 하고 남측 시인들만이라도 시낭송회를 하면 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정렬은 기타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했다. 황선배는 폐기를 적극 주장한다. 의전상 격이 맞지 않는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북측에서는 시인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시낭송 전문가 2명만이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는 정희성 선생이 「8•15를 위한 북소리」를, 김준태 시인이 「백두여 통일의 빛나는 눈동자여」를 내가 「먼 곳의 벗에게 쓰는 편지」를 준비해 왔다. 8•15와 백두산과 남북화해에 대한 시를 준비한 것이었다.
그런데 실무 준비모임에서 정희성 시인의 시와 내 시를 썩 내켜하지 않아 했다는 것 같다. 그러면서 정희성 시인의 다른 시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와 신동호 시인의 시 이렇게 두 편만을 낭송하자고 북이 수정제의를 했고 우리측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여 결렬된 것으로 보인다. 남북이 하나되는 길은 멀고도 험하다. 시 한 편도 같이 읽기 어려우니 통일의 길은 얼마나 멀고 험할 것인가. 이번 행사에 남북이 서로 합의한 것은 딱 두 가지였다.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 자료전시회와 백두산 시낭송회가 그것이다. 그중 하나가 무산 된 것이다. 양측의 협상능력도 문제고 정치력도 모자라는 것 같았다. 새로운 시로 거듭 수정 제의할 수도 있었다. 이미 남측 시인들은 여러 권의 시집을 갖고 갔었기 때문이다. 북측도 더 성의를 보였어야 했다.
백두산 천지
썩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로 백두산 가는 비행기를 탔다. 순안공항에서 고려항공을 타고 삼지연까지 가는 데는 1시간 정도 걸렸다. 삼지연 비행장에서는 버스를 탔는데 1시간 이상을 달려도 끝없이 가문비나무와 이깔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 길가에는 노랑만병초꽃이 앙증맞게 피어 있었고 연보라 쑥부쟁이꽃도 보였다. 고원지대를 지나 굽이굽이 비포장도로를 버스는 힘겹게 올랐다. 걸어서 백두산을 가야 하는데 정상 부근까지 버스를 타고 오르니 미안한 느낌마저 들었다. 날씨를 예측할 수 없는 곳이 백두산이라고 하는데 하늘은 다행이 맑게 개어 있었다. 중국 쪽에서 올라가 바라보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여러 해 전 역사문제연구소 학자들과 중국 쪽 백두산을 올랐을 때는 7월이었는데 구름이 많이 끼고 비가 내려 천지와 백두산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그런데 맑게 갠 날 우리 땅에서 걸어 올라가 바라보는 백두산 정상과 천지가 장엄하였다. 장엄하기만 한 게 아니라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두산 천지가 무섭다/ 저토록 시퍼런 정신/ 한점 티끌 없는 모습이 무섭다/ 백암봉 장군봉 백운봉 록명봉/ 열여섯 봉우리 산줄기가 무섭다/ 저 가파른 정신/ 흔들림 없는 굳센 자태가 무섭다/ 깊은 곳에서 터져나오는 힘을/ 넉넉한 아름다움으로 감싸안는 산과 들이.”
내려오면서 「천지」라는 시를 썼다.
밀영 갔다 오는 길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태어났다고 하는 밀영은 백두산에서 42km 떨어진 곳에 있었다. 밀영은 빽빽한 가문비나무 봇나무 숲속에 있는 작은 귀틀집이었다. 그 집에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린 시절에 자기고 놀았다는 숫자판과 쌍안경, 권총들이 있었다. 골짜기 물이 얼마나 차가운지 겨울강물에 손을 담근 것 같았다. 샘물 맛도 좋아 올라가는 길에 한 잔을 마시고 내려오는 길에도 한 잔을 더 마셨다. 돌아오는 차안에서 그 물 마신 것 때문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왔다. 임수경이 1989년 평양축전에 참가하였다가 돌아온 뒤 조사를 받을 때 만경대 김일성 주석 생가의 샘물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에 대해 집중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샘물을 먹었으면 징역 5년이 더 추가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나는 올라갈 때와 내려올 때 두 번이나 먹었는데 그럼 징역 10년이 추가되는 것 아니냐, 그런 농담을 한 게 발단이 되어 한 번만 먹었다고 거짓말을 하자거니 만경대 샘물과 밀영 샘물은 다를 것이라느니 똑같다느니 옥신각신 하며 설전을 벌이고 있는데 정희성 시인이 한마디한다. 그럴 땐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샘이 어디 있었나요?” 하면 된다는 것이다. 차 안이 떠나가도록 웃다가 노래하는 젊은 친구들의 제안으로 통일노래 「다시 만납시다」 「통일아리랑」 등을 함께 배우고 불렀다. 북측 안내원들도 모두 함께 불렀다.
“헤어져서 얼마냐 눈물 또한 얼마였던가” 그 구절을 부르다가 목이 메었다. “잘 있으라 다시 만나요, 잘 가시라 다시 만나요, 목메어 불러 봅니다.” 그 구절에서도 목젖이 뜨거워졌다. 노래 한 구절에도 목이 메는 게 통일인데 우리는 너무 거창한 것에 매달려 전전긍긍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황석영 선배도 목이 메는지 차 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러더니 “통일운동은 이렇게 시작하는 거야” 그런다. 시낭송회가 무산된 것 때문에 속이 많이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농담도 하고 노래도 불렀다. 내일이 또 남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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