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좌담은 ’20세기 한국소설'(1차분 22권) 간행을 계기로 중고등학교 문학교육의 현주소를 짚어보려는 취지로 마련된 것이며, 최근 본사에서 펴낸 청소년 독서정보지 『책 읽는 학교』(2005년 10월 25일 발행)에 전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 편집자
때-2005년 9월 3일(토)
곳-대전 유성호텔 회의실
참석자
임규찬(사회, 성공회대 교수, 문학평론가)
박경이(천안 천안중 교사)
양윤복(부산 사직여고 교사)
유동걸(서울 영동일고 교사)
이현종(순천 화양고 교사)
임규찬(사회) 오늘 이 자리는 창비에서 펴내는 청소년 독서정보지 『책 읽는 학교』의 특별기획좌담으로 마련됐습니다. 현재 중고등학교 문학교육의 실태가 어떻고, 문제점들이 무엇인가를 현장에 계시는 선생님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서 알아보고자 합니다. 특히 여기에 모인 분들은 학교 안에서 각자 매우 실험적이고 새로운 방법들을 모색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만큼 선생님들의 말씀에는 귀담아야 할 내용이 많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학교현장에서 이루어지는 문학교육의 이모저모에 대해서 자유롭게 얘기를 해주시면 제가 적절히 필요한 논의를 모아 진행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7차 교육과정에서 문학교육이 어떻게 진행되도록 규정되어 있는지, 그리고 구체적인 수업차수나 진행 양태는 어떤지, 이런 것을 먼저 간략하게 정리하고 얘기를 풀어나가면 좋겠는데요.
7차 교육과정의 문학교육 목표
양윤복 보통 교육과정의 구성은 다 비슷하게 되어 있습니다. 과목마다 제시하는 것이 있고 국어교육의 목표가 민주시민 양성으로 되어 있거든요. 문학작품을 통해서 민주시민의 소양을 기를 수 있도록 충실하자고 되어 있어요. 제가 5차 교육과정 때부터 교사를 했는데 5차부터 국정교과서에서 서정주, 이광수 등의 친일파 글이 일제히 빠졌거든요. 그 뒤로 6~7차까지 내려왔지만, 선생님이 수업하는 모습은 30년 전 우리가 학교 다닐 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습니다. 교육과정이 바뀌고 교과서가 바뀌어도 수업방식은 안 바뀌었어요. 그런데 6~7차 모두 학생 중심이에요. 다만 차이점은 6차 과정이 개념 중심, 7차 과정이 활동 중심이거든요. 그래도 여전히 선생님이 줄을 쳐주고 읽어주고, 아이들은 그걸 받아적고 하면 수업은 끝입니다.
이현종 7차 교육과정에서 문학교육의 목표는 4~5차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바람직하게 바뀌었습니다. 문학교육을 통해 상상력을 길러주고 삶의 질을 총체적으로 고양시키는 방향으로 설정되어 있으니까요. 교수―학습 방법도 학생 중심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과서도 절대적 지침서가 아닌 학습목표 달성을 위한 자료일 따름이라고까지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에서 학교수업을 통제하고 있는 것은 입시제도와 얽힌 평가이기 때문에 선생님들이 그런 교과서적인 목표 같은 것은 거의 무시를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유동걸 종전보다 학생들이 실천활동을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 것이 있고요. 그 다음에 소재가 다양해져서 수능에도 곽재구의 「은행나무」라는 작품이 나오고, 이러면서 교과서를 만드는 사람들도 80~90년대까지의 문학작품을 통해서 학생들이 최근의 문화와 정서를 접할 수 있게 하자는 그런 의도들이 많이 반영된 것은 과거에 비해서 달라진 것으로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런데 문제는 교사들이 문학교육의 목표를 어디에 두고 있는가가 교육의 방법과 내용을 규정하는 요소로 크게 작용한다고 보는 거죠. 문학교육의 목표를 입시에 두고 많은 지식을 습득하는 데 두는가, 아니면 문학을 통한 삶의 이해와 문학적 삶의 생활화에 있는가에 따라서 그 교육내용은 하늘과 땅 차이겠지요.
사회 7차 교육과정이 예전에 비해서 바람직한 형태로 변화했는데도 실제 현장에서는 문학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7차 교육과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닐 테니 이 문제는 나중에 시간이 있을 때 한번 점검해보기로 하고요. 그렇다면 지금 현장에서 문학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가장 중요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먼저 짚어보아야겠습니다.
문학교육의 걸림돌은 무엇인가
양 많은 사람들이 입시 때문이라고 얘기를 하고, 실제로 거기에서 못 벗어나고 있어요. 입시가 발목을 잡는 것은 확실한데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재미가 없잖아요.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순환논리에 빠지게 되니까 어느 하나를 끊는다고 생각하고 입시는 그렇다 치자, 그러면 그렇게 공부해도 되나? 이렇게 문제를 접근하면 어떨까 싶어요.
사회 1~2학년 때와 3학년 때가 교육상으로도 차이가 있나요?
양 완전히 다릅니다. 대부분의 일반계 고등학교에서는 1~2학년 때는 그나마 교과서 수업이나 작품 감상을 하지만 3학년 때는 입시 핑계로 문제집 푸는 것이 문학수업의 전부일 겁니다.
이 입시제도가 교실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다만, 입시제도만이 문학교육의 걸림돌인가 하는 것은 고민해봐야겠죠. 입시제도만 바뀌면 현재 한국의 문학교육이 바뀔 수 있겠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다소 부정적입니다. 그 이유는 우선 교재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교과서는 광복 이후부터 지금까지 검열과 통제를 받으면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6차 때부터는 친일파 작품이 빠지는 등 조금 변했다고는 하지만 본질적인 면에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거든요. 문학교과서의 작품들은 흥미성과 완성도, 진실성 이러한 기준에서 선별되어야 하는데, 주로 편향된 이념이나 역사성, 작가의 명망성, 순수로 위장된 현실 외면 의식, 이런 기준들에 따라서 작품을 선별 배제한 흔적이 역력하거든요. 그리고 어른이나 전문가 기준으로 선정되었기 때문에 교과서에 실린 작품들은 학생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교과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무조건 학생들에게 주입시켜야 한다는 교과서관, 그래서 교사들 스스로도 교과서에 나온 작품을 다른 작품으로 대체하지 못하고 반드시 교과서에 나온 작품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고요. 그 다음으로 현재 우리나라 교사들의 수업 방법과 내용을 결정하는 데 굉장히 큰 역할을 하는 자습서 문제를 간과할 수 없습니다. 자습서에 나온 내용이 그대로 수업 내용의 기준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많고, 자신이 중고등학교 다닐 때의 수업 체험을 그대로 재생산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고 봅니다. 물론 문학교육의 방향을 통제하고 있는 근원에는 앞에서 얘기한 것처럼 입시제도나 규정력이 너무 강한 국가 단위의 교육과정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 외에도 이처럼 교과서나 자습서에도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양 교과서와 문학과 아이들이 서로 동떨어져 있어요. 그걸 책에서는 보통 ‘삶과의 유리’라고 하죠. 아이들은 문학책이라면 피곤하니까, 또 자기 스스로 읽지를 못하니까 시에서 편안함을 얻지 못하고, 정서 함양을 하지 못하고 있죠. 또 소설이란 것이 어떤 문제에 부딪혔을 때 유사한 도움을 얻는, 우리가 말하는 간접체험도 안 되고 있죠. 사실 어떻게 보면 소설이라는 것이 간접체험만은 아니잖습니까? 교과서 문학은 요즘 아이들 삶과 다르기 때문에 아이들과 멀어졌고, 최소한 현대문학작품이 절반 이상은 실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사회 유 선생님은 어떤 점이 문학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고 보십니까?
유 교사들이 전통적인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문학을 통해서 아이들과 만나는 게 가장 큰 문제가 아닐까 싶어요. 문학을 통해서 아이들과 생활로 만나거나 정서의 교감을 나누는 과정이 문학교육을 통해서 길러져야 하는데, 입시라는 제도와 구조 속에서 문학 자체가 하나의 수단이나 도구로밖에 인식이 안 되니까 거기에서 자꾸만 본질적 의미가 훼손되는 거죠. 저는 최근 몇 년 동안 문학과목을 가르쳐보지는 못했는데, 대신 다른 교과목시간에 소설로 수업을 하다 보면―김영하의 「흡혈귀」라든지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을 소재로―학생들은 참으로 다양한 소재의 다양한 생각들을 원하는구나 하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성(性)적인 것이든 폭력적인 것이든 세상을 다양하게 표현한다면 말이죠. 그런 점에서 보면 교과서의 고정된 유형의 글들로부터 문학교육이 벗어나지 못하는 게 현장의 문제점이 아닌가 싶습니다. 4차부터 7차에 이르기까지 교과서와 교육과정의 틀이 선생과 아이들에게 똑같은 무게로, 억압적인 기제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문학교육의 새로움이 없는 게 아닐까요? 현장의 무엇이 바뀌어서 정말 문학교육이 달라질 수 있을까? 현재로서는 난망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교사들이 달라져야 한다
박경이 저도 최근에 느낀 것인데, 중학생들에게는 문학이란 개념이 그다지 없는 것 같습니다. 교과서에는 문학의 아름다움, 문학과 사회 등 단원이 있는데, 문학과 관련된 것들을 알아가자는 것이겠죠. 문학교육의 문제점을 앞서 지적하셨는데, 아직도 줄 치고, 중요한 어구 찾고, 뜻풀이하고, 주제를 그럴듯하게 정리하는 수업이 많습니다. 어쨌든 일단 교과서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문제는 교과서에 있는 것만 하고, 옆으로 가지를 치거나 갈래 칠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 거죠. 보통 선생님들은 문학이든 뭐든 교과서에 있는 글은 모조리 분석을 하고 넘어가는데, 저는 문학은 느끼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내용 분석에만 치중하고 다른 글과 별 차별이 없이 넘어가는 게 문제인 것 같아요.
양 사실은 고등학교도 똑같습니다. 저는 늘 교과서에 대해서 불평을 하면서도 언제든지 교과서 중심 수업을 합니다. 문학이나 국어 교육과정에는 작품 내용에 대해서 교사가 분석이나 설명을 하지 말라고 나와 있거든요. 6~7차부터 그렇죠? 그런데 대체로 선생님들 말씀을 들어보면 문학수업 가운데 제일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이 소설이라고 합니다. 교사가 다 읽어가면서 낱말뜻 다 달아주고 내용 분석하고 하니까…… 그리고 우리 교과서의 문제점 중 하나가 작품을 제 맘대로 잘라서 싣는 것인데, 거기에다 선생님들이 줄 쳐주고,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 소설가도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 그걸 얘기해주고……(일동 웃음) 박완서의 「그 여자네 집」 같은 작품도 교육과정에는 2시간 정도 하라고 해놓았는데 6~7시간을 한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2시간이면 충분해요.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 이런 것들은 안 가르칩니다. 요새는 시험에도 안 나온다 아닙니까? 윤흥길의 「장마」는 중편인데 교과서에는 뒷부분이 실려 있어요. 그런데 너무 충실한 자습서는 「장마」의 결말 부분을 다시 쪼개서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로 나눠놨어요. 이 부분은 소설 전체에서 결말 부분에 해당한다 정도로 소개해도 되는데 말이죠. 그리고 작품은 반드시 전체를 읽게 해야죠. 작품을 쪼개고 분석하고 부분만을 읽히고 그러니까 아이들이 작품을 기억하지 못하고 생각이 전부 분열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 교사들 수업방법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수업시간에 절대 아이들에게 낱말뜻이나 주제를 감상 전에 말해주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찾아야죠.
사회 지금까지 7차 교육과정을 두고 5~6차보다는 내용상으로는 한결 진일보했지만 선생님들이 30년간 별 변화 없이 같은 형태를 되풀이하고 있어 새로운 방법론을 모색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것을 춘천교대 김상욱 교수는 「문학교육의 현실과 대안」에서 일종의 세 가지 모형론으로 분류를 하더군요. 그에 따르면 연구자 모형이라는 것이 가장 전통적인 것입니다. 아까 지적해주신 것처럼 기승전결 따지는 식이 그것이지요. 그런데 7차 교육과정에 들어와서 그런 경향을 일부 넘어섰다고 진단하더군요. 그것이 언어사용자 모형이라는 것인데, 이제는 작품의 언어적 속성들, 가령 역설이라고 한다면 그 비슷한 유형들을 모아서 이해하게끔 함으로써 능력 있는 언어 사용을 지향하는 식이라는 것이죠. 물론 김상욱 교수는 가장 바람직한 모형으로 사려 깊은 독자모형과 비평가모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문학작품의 감상능력, 그 수용과 이해능력을 키우는 것에 문학교육의 목표가 두어져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분석과 전망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가 볼 때는 현장에서 가르치는 선생님마다 견해가 약간 다를 것 같기도 한데요.
박 그 말씀에 저는 아주 공감을 하거든요. 비평가적 감상능력…… 일단 읽기를 해야 하거든요. 사실 교과서만 탓할 게 없어요. 문제점을 지적할 수는 있지만 일단 주어진 교재를 가지고 수업을 할 때는 교사가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중요하죠. 비평할 수 있게끔 도와주고 모아주면 되니까. 그리고 교과서가 바뀐 것은 사실이에요. 아이들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감상하게끔 만드는데도, 교사는 별로 안 변했다는 거죠. 소설 한 편이 나왔다 하면 시점, 배경, 인물, 구절의 의미, 복선 등을 분석한다는 거죠. 시도 마찬가집니다. 삶의 모습이나 문제 해결 과정, 생활에서 유사한 상황이나 나의 경험 찾기로 감상 폭을 넓혀나가야 하지 않나 하는 겁니다. 교사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자주 하고 있어요.
사회 그런데 교과서의 작품 선택폭은 예전에 비해 넓어졌지만, 그 배치나 구성방식은 여전히 분석적이고 이론주의라는 비판을 많이 하던데요. 그러니까 소설의 시점이나 구성 등등을 먼저 앞세우고 거기에 작품들을 편의적으로 쪼개서 배열하는 식을 두고 말입니다.
박 그런 면이 있긴 하지요. 하지만 문학을 공부할 때 문학의 이론이나 본질적 특성도 알 필요가 있잖아요. 구조라든가 특성을 알아야 작품을 읽고 이해하면서 느끼고 다음에 선택할 능력이 생기므로 그런 공부도 필요하면, 교사가 책을 그렇게 활용하면 되는 거죠. 소설의 시점이라고 하면 시점을 알기 위해서 공부하기 좋은 교재를 선택해놓겠죠. 그래서 시점을 바꿔보기에 좋은, 중학교 아이들 같은 경우는 「사랑 손님과 어머니」가 있습니다. 소설에서는 원래 아이의 눈으로 진행이 되지만 어머니의 눈으로 시점을 바꿔본다든가 아저씨의 눈으로 한다든가, 아니면 전체를 다 바라보는 시점으로 바꿔보면서 시점이 어떤 맛을 주는가 알아가게 되거든요. 그런데 많은 경우 그 단원에서 시점 정도 공부하고 감상하는 것 위주로만 하지를 못하죠. 그래서 단원에 명시된 교육 목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체를 분석하는 수업을 해서는 곤란하다는 겁니다.
양 아이들은 교사들이 공부를 아주 많이 하는 줄 알거든요. 교사가 작품 분석하고 그러니까…… 그런데 교사가 교과서 새로 나왔다고 해서 그것을 집에 들고 가서 자기가 대학교 때 배운 문학이론이라도 들쳐보면서 공부하느냐? 그게 아니라는 거죠. 아이들만 독립성이 없고 자주성이 없는 것이 아니고 교사도 교과서에 나오지 않은 작품을 보면 그냥 난감해하거든요. 우스운 예로 10여 년 전 수능시험부터 교과서 밖에서 작품이 나왔잖아요. 그때 학교에서 한 번씩 야단이 났던 기억이 납니다. “이게 누구 시인지 아나?” 사실 누구 시인지 몰라도 감상할 수 있거든요. 그때 선생님들이 시집도 사고 연구분위기가 좋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2~3년 뒤부턴가 다시 교사용 문제집에 해설까지 붙여서 나오는 바람에 연구분위기가 급랭했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방법으로라도 작품을 분석하려면 교사 스스로 하라는 겁니다. 자습서나 참고서 보지 말고……
이 비판적인 사고능력, 문학 비평능력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 아니냐는 김상욱 선생님의 의견에 동의를 하면서 그렇게 되면 아주 좋은데요. 그것은 상당히 수준 높은 단계에서 요구할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 이전의 어떤 과정들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좋은 작품들이 선정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교사 나름대로 작품을 대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죠. 교과서에 있는 거니까 무조건 가르치고 보자가 아니라 학생들이 문학 비평을 하기에 적합한 작품으로 대체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저는 교사들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교과서에는 이 작품으로는 시점을 가르쳐야 하고, 이 작품으로는 문체를 가르쳐야 한다는 식으로 되어 있죠. 그런데 과연 그 소설을 가르치면서 시점을 가르치고, 문체를 가르치는 것이 학습목표의 중심이 될 필요가 있는가? 이런 본질적인 점을 교사는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봅니다. 교과서에 설정된 학습목표가 과연 타당한 목표인가? 그 부분도 교사가 고민하고 또 재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문학교과서, 무엇이 바뀌었나
그리고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교과서가 분명히 과거에 비해서 친일작가의 작품이나 아주 국수주의적인 작품들이 빠져서 좀더 나아졌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총체적으로 학생들이 문학 능력을 기를 수 있는 좋은 작품들이 실려 있는가, 이 질문에는 글쎄요입니다. 지금 교과서가 계급성을 탈피한 것 같지만 실상은 계급성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김지하나 신경림 작품이 실려 있기 때문에 진보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완전히 위장되어 있거든요. 김지하나 신경림 시인의 본질을 드러내는 작품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작품이 실려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위장되어 있다는 것이죠. 더욱이 학생들의 삶과 연관되거나 그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 실리지 못했다는 겁니다. 학생들이 교과서에 관심을 갖지 않은 이유 중에 하나가 교과서에 실린 작품들이 감동을 주지 못하고, 흥미를 주지도 못하며, 자기들의 삶과 떨어져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교과서의 본질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회 최근 최시한 선생이 펴낸 『소설의 해석과 교육』을 보니까, 우리 교과서의 문제를 세 가지로 정리했던데요. 첫째는 작품을 선택하는 데 학생의 능력이나 체험을 중시하지 않고 지식 중심주의가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문학관이 지나치게 순수문학적이다. 세번째로 복고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이념에 지배되고 있다. 겉으로는 순수한 사랑이라든가 애매한 서정성을 강조하면서 이념성은 대단히 복고적이며 민족주의적인, 즉 이율배반적인 소설들로 선택이 이루어져서 바람직하지 못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고 하셨더군요. 이런 분석에 대해 선생님들의 생각은 어떠신지 궁금합니다.
박 정확하게 보신 것 같아요.
양 그 말씀 자체는 맞다고 봅니다.
사회 제일 인상이 깊었던 분석은 작품 배치에 대한 비판이었습니다. 소설의 인물, 소설의 플롯 등의 항목을 설정하고 거기에 맞는 좋은 작품의 예제를 들어놓았는데 살펴보니까 하나도 적절치 않더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학생들의 작품 감상능력을 키워나가는 방식이라면 하나의 소설이라는 것을 완결된 전체로 놓고 그 완결된 전체 속에서 소설이 가질 수 있는 다양한 속성들을 함께 배우게끔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그렇게 쪼개서 분석하는 형태야말로 기능적으로 분석하는 방식이어서 소설의 기본적인 교육방식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강력하게 비판하던데……
양 소설뿐 아니라 시, 수필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해요. 문학수업이 의과대학에서 시체 해부하는 거와 똑같다고 생각해요. 생명력이 있는 작품을 한순간에 시체로 만드는 거죠. 최시한 선생이 정확하게 본 겁니다.
이 최시한 선생님이 말씀하신 교과서의 틀에 대한 문제점은 저도 인정하는 내용이고요. 그래서 학생들이 교과서에 나오는 작품을 가지고 시험을 보면 조국애, 민족애, 현실 초월의지, 순수한 사랑, 고난 극복 …… 대충 이런 것에 동그라미를 치면 맞는다는 것 아닙니까. 그런 식으로 교묘히 현실에 대한 성찰을 피해가는 것이죠. 그런 식으로 교과서에 실린 작품들이 편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고요. 그리고 수업방법에 있어서도 총체적 작품 감상보다는 부분적 작품 분석, 단편적 지식 인지에 치중해버리는 것도 인정합니다.
사회 그렇다면 교사 개개인의 실력이 중요하고, 현장에서의 개별적인 실천이 현재로서는 시급하고도 중요한 문제로 여겨질 법합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교육의 질은 결코 교사의 질을 능가하지 못한다는 말을 할 정도인데, 교육현장에서 한 선생님의 몫이 중요하다는 관점에서 더 구체적인 현장의 문제를 짚어보았으면 합니다. 일반화된 구조적 문제로만 생각했던 틀에서 벗어나서 선생님 개개인들이 이렇게 하니까 좀더 바람직한 교육적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는 등과 같은 구체적인 경험담을 듣고 싶습니다. 그런 구체적 사례를 통해 우리가 함께 생각할 수 있는 또 다른 측면을 이야기해봤으면 합니다.
문학교육 현장의 여러 모습들
이 양선생님, 혹시 학원 다니는 아이들이 학원에서 책에 밑줄을 긋고 토를 달아오면 다른 아이들이 전부 그걸 베끼고 그런 일은 없어요?
양 처음 만나면 너무나 당연하게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하면 야단납니다. 저는 시험문제를 부정형으로 많이 내는데 적절하지 않은 것을 묻는 문제들이죠. 예를 들면 “다음 작품을 읽은 독자의 반응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그러니까 5개 중에서 4개는 맞는 거예요. 이게 그나마 다양성을 보장할 수 있는 답지거든요. 나는 수업시간에 일부러 소설의 지문을 분석하거나 설명을 안 해줍니다. 학생들이 스스로 읽고 줄거리와 인물 정도만 챙겨오면 됩니다. 그래서 시험 칠 때도 소설은 질문과 별 상관이 없어도 기억이 나도록 지문을 많이 인용합니다. 그리고 문제도 윗글에 대한 전체 설명을 묻고 인물관계, 사건, 배경과 관련된 문제 정도 내고 그 다음에 속담 같은 어휘 문제 하나 정도를 내거든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베껴봤자 필요 없는 것을 아니까 이제는 그렇게 안 하더라고요. 시 수업은 보통 5시간 정도 하는데 안도현의 「연탄불」 같은 짧은 시나 심호택의 「똥지게」처럼 편한 시 몇 편을 같이 읽고 아이들 스스로 발표하게 했어요. 읽었는데 어떻다고 아이들이 말할 때까지…… 아이들이 말 안 하면 나는 너희들이 말할 때까지 수업을 안 한다 하면서 말할 때까지 기다리면서 수업을 안 하는 거예요. 한두 명이라도 발표를 해야 그 발표를 이어가면서 수업을 하는 거죠. 그 다음부터는 진도를 나가야 하니까, 나보다는 저희가 답답하니까…… 손들면서 “저는 이렇다고 생각합니다” 하는 학생이 몇 명 나오는 거예요. 시에 대한 두려움, 어색함을 없애고 그 뒤에 수업을 하고, 학습활동하고 그랬거든요.
사회 다른 선생님들도 구체적인 사례가 있으면 이어서 말씀해주시죠.
이 시를 감상할 때 시집 뒤에 붙은 쉽게 쓴 비평이나 발문 같은 것을 보면 인간의 보편적 정서나 문학적 감성을 자극하는데 그런 것들을 복사해서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이런 식으로 감상문을 써보자 합니다. 두세 번 해보고 나면 적응력이 높은 학생들은 전문가 이상으로 수준 높은 감상문을 써내데요.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런 식으로 수업하면 교과서가 깨끗하잖아요. 그러니까 몇몇 학생들은 이 선생한테서는 배운 것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해서 과외를 다니고 학원에서 적어온 것을 다른 학생들이 베끼고 그런 일들도 있어요. 지금은 5학급짜리 학교에 있으니까 좋은데 큰 학교에 있을 때는 다른 반 선생님과 그런 부분에서 합의가 잘 안 되고 합의가 돼도 다른 선생님은 그런 방식으로 수업을 잘 안 하시고, 그냥 행간을 까맣게 채워주는 수업을 하시더라고요. 그러다 보니까 학생들은 그 반 아이들 책을 가져다가 까맣게 베끼는 거예요. 그런 부분들을 보완하면서 하려니까 힘들데요.
양 저 같은 경우에도 작년에 그런 아이가 있었는데, 제 이야기도 될수록 못 적게 하거든요. 낱말풀이도 수업시간에 절대 안 해주고 어려운 용어나 개념만 설명해줍니다. 왜? 교사는 아이들 종이 아니라는 거죠. 숙제도 예습형으로 돌리는데, 언젠가 한 아이가 제가 얘기하는 것을 빨강 펜으로 몽땅 다 적은 걸 보고 가슴이 철렁해져서 ‘도대체 내가 이렇게 많은 얘기를 했나?’ 하고 놀랬거든요. (일동 웃음) 그리고 “너 집에 가면 이걸 보나? 그리고 내가 여기에서 시험문제 안 낸다. 거기에서 한 문제라도 나오면 내가 너한테만 가르쳐줄게.” 이러면 아이가 억수로 갈등을 해요.
유 저는 토론을 수업시간에 많이 활용합니다. 시 같은 경우는 주로 시인의 자리에서 서서 생각해보고 표현해보는 것을 많이 시도해보지만, 소설의 경우에는 소설교육을 하기보다 소설을 통한 사회교육에 목표를 두고, 소설을 둘러싼 사회에 대한 사안을 놓고 모둠별로나 반 전체가 토론을 하도록 합니다. 예를 들면 계용묵의 「백치 아다다」의 경우, 아다다가 돈을 버리고 수롱이가 아다다를 죽이는 행위의 정당성을 놓고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돈과 자본주의와 사랑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을 이끌어낼 수가 있습니다. 감상이든 이해든 학생들이 주체가 되는 교육 속에서 문학적 감성과 사고력이 길러진다고 보거든요.
박 저는 시를 많이 외우게 합니다. 도서실에 비치되어 있는 시집들을 마음껏 가져다가 통일이나 사랑에 관한 시를 찾아본다거나 하는 식으로 수업을 하는데, 상당히 효과적이죠. 아이들이 비교를 할 수가 있거든요. 이 시는 이런 것 같고, 저 시는 저런 것 같고. 그리고 노래로 된 좋은 시들도 많잖아요. 율동을 하며 노래를 부르게 해요. 아이들이 온몸으로 정서를 체험하는 수업을 해야 한다는 거죠. 교과서에 어떤 시가 나오는가 하는 것이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죠. 아이들에게 다른 시를 찾아보게끔 하니까 도서실 수업이 매우 중요하다는 겁니다. 물론 중학교 아이들 수준에 맞는 책들이 많이 쌓여 있어야 하겠죠. 그래서 몸으로 느끼고 헛소리를 해도 용납되는 수업, 이 시를 보고 무엇을 느꼈는가? 아무것도 안 느껴도 좋고, 주제와 상반되는 이야기를 해도 좋고…… 아무튼 저는 많이 외우게 하는데 모국어가 외우기에서 시작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대체 교재로 삼았던 권정생의 「강아지똥」 같은 것이 이제 교과서에도 실렸지요. 그런 데서도 아름다운 구절을 찾아서 외우게 하고…… 문학에서는 풍요로운 삶과 아름다운 정서, 우리말이 주는 아름다운 느낌, 자연스런 어감, 이런 것들을 많이 느끼게 해줘야 할 것 같아요. 이런 활동들이 자유롭고 즐거운 시간을 만들죠.
문학교육 과정에 영화·만화·드라마 등을 도입해야
사회 2000년대에 접어들어, 그리고 그 이후로 우리 학생들의 감수성이 그 이전과 비교하여 여러 모로 변화되었다고 많이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그에 따라 문화적 혹은 문학적 환경 또한 달라졌고요. 어쨌든 요즘 젊은 세대들을 두고 흔히 영상세대라고 일컫는데 그런 학생들의 변화와 관련하여 실제 현장에서의 문학교육이 달라질 필요성이나 또 새롭게 시도해봐야 할 것은 없을까요?
박 현재 고민 중인데요. 그동안은 문학을 가르칠 때 아이들에게 정말 다양하고 풍요로운 삶과 따뜻한 마음과 다양한 정서, 이런 것을 줘야 한다. 아이들에게 기대하고 친근해지고 이런 것을 담아줘야 하지 않느냐고 해서 외우게도 하고, 때로는 정서를 강요하기도 하거든요. 그렇게 하다가 과연 문학만이 삶을 풍요롭게 하고 정서를 느끼게 하는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이게 3년 정도 됐어요. 그렇지 않다. 만화도, 드라마도 할 수 있고 영화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저는 매체 확장 교육에 신경을 쓰면서 도대체 내가 왜 문학교육을 하고 있는가? 그럼 내가 문학단원에서 왜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가? 그런 갈등도 했거든요. 그런데 이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수업이라 생각했죠. 작년에 2학년 아이들과 윤흥길의 「기억 속의 들꽃」을 감상하고 나서 일본의 애니메이션 「반딧불의 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도서실에 프로젝션TV가 없어서 교실에서 보게 됐어요. 7월 중순 더운 날에 실감나게 본다고 커튼까지 친 채 땀을 뻘뻘 흘리면서 보는 겁니다. 전혀 떠들거나 졸지 않고. 남매를 통해 전쟁의 비참함을 전하지만 잔잔하게 그린 작품이라 반짝하는 재미는 하나도 없거든요. 만화 『맨발의 겐』을 읽고도 아이들은 그렇습니다. 정말 문학의 범위를 넓혀야 하지 않을까? 인간에게 감동을 주는 모든 것들을 문학이라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회 아마 그와 관련해서 최근의 가장 큰 이론적 쟁점으로 떠오르는 것이 일종의 문학주의 비판인 것 같습니다. 그걸 두고 흔히 ‘실체 중심의 교육’이라고도 하는데요. 문학작품이라는 하나의 규범적인 작품을 설정해놓고 그걸 절대화해서 거기에 종속되는 교육형태를 비판하는 것이죠. 거기에 맞선 형태를 ‘속성 중심의 교육’이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시정신이나 산문정신 등 작품이라는 틀을 벗어나 더 넓게 그 범주를 확장해서 삶에 밀착시켜보자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상적인 삶과 관련지어 그러한 속성을 키우는 넓은 교육을 하면서 그 과정 속에서 그것의 최고 형태로 최고의 문학작품을 자연스럽게 결부시킬 때 문학에 대한 교육효과도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것이 위대한 작품이다’ 하고 던져놓고 무조건 먹으라는 식이 되니까 오히려 학생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지적도 나오잖아요. 그래서 저도 각자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와 그와 유사한 좋은 시를 대비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함께 생각해보는 수업을 해본 적이 있는데, 의외로 효과가 있더군요. 재미있는 분석들도 나와요. 노래와 관련해서는 대부분 아주 특정한 때에 일시적으로 집중적으로 들었던 노래라는 것, 그래서 굉장한 강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매우 특정한 기억과 관련해서 의미를 갖고, 반면 시는 처음에는 나와는 무관한 것처럼 느껴졌지만 들여다보면 볼수록 삶에 대한 이러저런 깊은 맛을 느끼게 해준다는 식으로 학생들 대다수가 정리를 해서 저에게도 꽤 좋은 교육적 실험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학생들의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한 일시적인 도구로서 활용하는 차원이 아니라면 교수 기법과 관련해서도 새로이 생각할 면이 있을 듯합니다만……
박 그렇죠. 일시적인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죠. 수업의 변화와 재미를 위해서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사용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다양한 매체 활용이 항상 일시적인 도구, 흥미 위주의 시간 때우기, 이런 식으로 하면 별 의미가 없어지는 거죠. 그것도 저는 교과서에, 교육과정에 포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양 물론 가장 기본은 문학이죠. 수업할 때 인물·사건·배경이나 개념을 설명하는데, 모두가 읽었거나 알고 있는 소설 한 편이 없는 거예요. 그때 아이들에게 영화나 연속극, 즉 드라마 얘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개념에 적당하거나 지나간 40~50년대 작품을 들더라도 교과서에 나온 것 외에는 잘 모릅니다. 그때 설명을 영상매체로 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이건 거꾸로 문학이 피폐했다는 것이거든요. 문학이 확장한 것이 아니고요. 영상매체는 정보 자체를 고민하거나 선택할 시간이 없는 거라 무조건 비판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데, 문자는 자기 스스로 진행속도를 조절할 수 있잖아요. 문학의 확장을 위해 다른 매체를 이용해서 뮤직비디오를 만들거나 다른 학습활동으로 해볼 수는 있겠죠. 그런 매체를 수업과정에 도입을 하니까 문학을 단순히 흥미 위주로 해서 작품에 있을 수 있는 진지함을 잃게 되고, 그래서 종국에는 문학을 잊어버리는 일이 있지 않을까 해서 교사 초반에는 여러 매체를 활용해서 수업을 하다가 본질로 접근하자 생각하고 그 이후로는 안 했어요.
박 문학이 없어지기야 하겠습니까?
사회 이것도 요즘 알게 모르게 쟁점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이 저 같은 경우도 다른 매체로 대체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소설과 소설을 영화로 만든 것은 분명히 다르고 역할이 분명히 따로 있다고 봅니다. 보통은 문자로 된 문학작품을 어렵고 머리 아프게 생각해버리고, 반면 영상매체는 다양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매체를 활용하는 것인데 벌써 거기에서부터 기능이 달라진다는 것이죠.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 것과 소설을 보고 눈물을 흘린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문자를 인식해가는 과정과 영상을 인식해가는 과정은 논리적 사고에서 차이가 있고, 사고단계에도 차이가 있기 때문이죠. 기능주의적 관점에서는 시나 소설도 표현의 도구로 보고 분석하는 경향도 있는데 같은 건축가라고 하더라도 『명상록』을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은 설계도가 달라질 것이고, 같은 작곡가라 하더라도 『부활』을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은 음악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문자매체의 힘이라고 보는데, 영상매체의 정보 전달과는 분명 다른 기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학은 문학대로 읽는 것 자체가 영상매체와는 다른 별도의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 같은 경우에 매체는 부분적 도구 수준으로만 활용합니다.
박 선생님 말씀에 저도 근본적으로 동의를 하거든요. 제 말씀은 문학을 다른 매체로 대체한다는 것이 아니라 매체 읽기를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상당 부분 감당할 수 있는 교과는 국어라고 봐요. 아이들은 문학을 만날 기회보다 영화·만화·광고 등을 만날 기회가 너무나 많아요. 그래서 매체교육을 제대로 시켜야 아이들이 매체를 바르게 알고 이해하거나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수 있는 비판정신이 생긴다는 거죠. 드라마 한 편을 보더라도 저건 지극히 발랄하고 새롭다, 정말 우리의 감수성에 딱딱 들어맞는다 하면서도 이런 것은 문제다 하는 것을 짚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웰컴 투 동막골」이 뜬다 하면 보고 와서 그걸로 끝인 거죠. 클럽활동 영화반에 아쉬운 것이, 영화 한 편 보고 끝난다는 점입니다. 국어과에서도 마찬가지라는 거예요. 소설 한 편 읽고 본인이 분석하지 않은 참고서와 기성의 다른 사람들이 분석해놓은 지식을 단순히 전달하는 것으로 끝나는데, 분석도 교사들이 제대로만 한다면 굉장한 수업이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일단 교사들이 책을 읽지 않고 작품을 스스로 제대로 분석하지 않죠. 그런 문제도 있는데 이것이 다른 매체에도 적용이 된다는 생각이죠.
유 다양한 매체를 도구로 활용하거나 매체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교육을 해야 한다는 데 동의합니다. 어쨌든 이제 많은 교사들이 매체와 친숙해진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죠. 새로운 교육과정에는 만화나 영화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인권교육이나 성교육, 도서관교육 등에 영화나 만화를 도입한 건 이미 오래전의 일이고요. 문제는 문학교육과 매체교육 사이의 간극과 정의를 어떻게 내릴 것인가인데, 비디오도 한 편의 텍스트로 읽히기 시작한 지 꽤 오래되지 않았나요? 그런 점에서 저는 문학과 매체 혹은 영상·만화 등을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다고 봅니다. 문학적 상상력과 영화적·만화적 상상력에 큰 차이가 있는지 의문스럽고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좀 심하게 말하면 문학 안에 영화나 만화 등의 텍스트가 들어와야 한다는 거고, 문학작품을 영화화한다는 의미를 넘어서 재미있고 의미 있는 영화도 하나의 문학작품으로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문학을 매체와 분리하기보다는 통합적으로 교육하는 문제를 고민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박 제 생각도 매체가 문학과 연계되어야 감상과 이해 효과가 훨씬 극대화되지 않나 싶어요. 그러니까 인물의 갈등을 공부하는 단원이면 인물의 갈등을 물론 교과서의 작품에서 찾죠. 그리고 제가 아는 작품 가운데 갈등 찾기가 좋은 아이들의 짧은 수필이나 단편소설, 또는 그 이전에 읽었던 작품들, 교과서에 이미 나왔던 것들, 이런 것들에서도 인물의 갈등을 찾아보기도 하겠죠. 그렇게 또 다른 대체작품도 쓰지만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통해서도 인물 갈등을 찾아보는 거죠. 이런 식으로 연계·확장이 됨과 동시에 다른 매체 읽기가 되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는 거죠.
양 많은 사람들이 매체교육을 문학에 활용하더라고요. 『함께여는 국어교육』에도 매체교육에 대한 글이 많이 나왔잖아요. 요즘은 대학 국어교육과에서도 매체를 전공하는 교수님이 계시거든요. 그런데 아까 이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영화는 영화 자체로 우수한 점이 있고 문학은 문학 자체로 우수한 점이 있는데, 제가 볼 때는 이 두 개는 확실히 인정을 해야 해요. 왜냐하면 영역이 고유하게 발달해 있으니까. 모든 영화가 문학 없이 나온 경우는 거의 없으니까. 영화의 몽타주기법을 어떻게 글로 옮길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있어도 그 표정이며 그 상황을 글로 옮길 수는 없다고요. 또 짧은 글 속에 많은 생각이 담긴 신영복 선생님이나 법정 스님 글 같은 것을 영화나 만화로 어떻게 옮길 겁니까?
박 모든 걸 굳이 옮길 필요는 없는 거죠.
이 박선생님 말씀대로 매체를 올바르게 보기 위한 교육이 필요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매체를 다룰 필요가 있다는 데 저도 동의를 합니다. 왜냐하면 분명히 매체는 매체대로 아이들이 많은 정보를 취하는 도구로 이미 자리 잡았으므로 매체를 올바르게 보는 훈련은 필요하다고 봐요. 그러면서도 김용옥씨가 『노자』라는 책에서 지적했듯이 우리 사회 타락의 가장 근본적 원인은 TV에 있고 TV를 없애지 않는 이상 이 사회의 타락은 계속될 것이다라는 점에 일정 부분 공감하거든요.
양 그러면서 자기는 TV에 나와 많은 사람들에게 얘기하고……(일동 웃음)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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