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와보았거나 한국의 젊은 사람들을 접해본 적이 있는 중국인들, 특히 나이든 중국인들은 공자가 한국에 살아 있다고 감탄을 하곤 한다. 나이든 사람에 대한 예절이 깍듯하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에서는 윗사람에게 머리 숙여 인사하는 법도 없고, 윗사람을 친구 대하듯 한다. 하늘 같다는 지도교수를 만나도 그저 동네 아저씨 대하듯 “니 하오” 한마디뿐이다. 그런 중국 학생들에 비해 한국 학생들은 술을 따라주면 두 손으로 공손히 받는가하면 고개를 돌리고 마시고, 행동거지가 유순하기 짝이 없으니 중국 교수들이 보기에는 한국 학생만한 공문(孔門)의 문도(門徒)들이 없는 셈이다.
그런데 얼마 전, 유니세프가 동아시아와 태평양지역 17개 국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어른들에 대한 존경심을 조사한 결과 한국 청소년들이 어른들을 가장 존경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자가 진즉에 죽었다는 중국은 고사하고, 공자의 ‘공’자도 모르는 미국보다도 한참 뒤졌다. 더구나 존경하는 인물로 교사를 꼽는 비율 역시 꼴찌를 기록했다. 그래서 언론과 어른들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며 장탄식이다. 그동안 우리 청소년들이 면종복배(面從腹背)해왔다는 말인가.
요즘 들어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심각할 줄은 몰랐다. 어려서부터 윗사람 섬기는 이치를 생존의 법칙 차원에서 철저히 학습하는 나라가 우리나라 아닌가? 아이들 놀이터에 나가보면 금방 안다. 새로운 아이가 놀이터에 나타나면 기존의 아이들이 새 아이에게 던지는 첫 질문은 “너 새로 이사왔니?” “어디서 왔니?” 하는 것들이 아니다. “너 몇 살이야?”이다. 나이를 확인해야 이 아이를 어떻게 대할지, 놀이에 넣어줄지, 이 아이에게 어떤 역할을 줄지가 결정된다. 질문을 받은 아이는 여러가지 계산을 순식간에 해야 한다. 사실대로 이야기할 만한 상황인지, 눈 딱 감고 한두살 올려 대답할 것인지, 아니면 묵묵부답으로 뭉개거나 딴청을 피우면서 분위기를 파악할 시간을 벌 것인지를 계산해야 한다. 유치원에 다닐 나이의 어린아이라도 이런 ‘깜냥’을 순식간에 발휘하지 못하면 그네나 미끄럼틀 근처에 얼씬거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하고, 그저 혼자서 모래쌓기나 하며 노는 수밖에 없다. 나이가 권력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유치원 시절부터 터득하는 것이다. 한국 고유의 조기교육이다.
그런 나이의 규칙은 성장과정에서 무수히 복제되면서 아이들에게 심화 학습된다. 성인이 되어도 낯선 사람을 만나면 어서 주민등록번호를 확인해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상대와 나 사이에 나이에 따른 위계를 확인하고 거기에 맞는 역할을 수행해야 마음이 편하고, 관계가 수월하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장시간 이야기하고 헤어져도 못내 찜찜하다. 혹시 내가 결례한 것은 아닐까. 나보다 어리면서 내게 맞먹은 것은 아닐까.
이쯤되면 나이는 차라리 계급이다. 하지만 나이라는 계급의 작동원리는 다른 계급의 그것에 비해 열려 있다. 가만히 있어도 밥그릇 수만 늘면 계급 지위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속된 말로 나이라는 계급사회에서는 영원한 ‘시다바리’란 없다. 나는 윗사람의 ‘시다바리’이지만 내 아랫사람에게는 상전이다. 나이라는 층층의 권력구조 속에서 누구나 주인이자 노예이고, 노예이자 주인이다. 그러기에 노예라고 억울할 것도 없다. 윗사람에게 복종하는 한편 아랫사람을 부릴 수 있고, 내가 당하는 억압을 밑으로 전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이라는 계급구조, 나이라는 권력의 회전판은 존댓말과 더불어 세월을 모르고 영원하다.
원래 공자가 나이가 들수록 흔들리지도 않고 하늘의 정해진 이치도 알고 귀도 순해진다고 했던 것은 나이가 곧 진리요 지혜라는 말이었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몸소 체험한 경험적 지식이 중요하던 시절, 다른 사람보다 밥을 먹어도 몇그릇 더 먹었다는 것은 경험적 지식과 삶의 지혜가 그만큼 더 쌓였다는 것이었다. 그럴 때 나이든 사람은 지자이고, 현자일 터이니 존중하고 섬기는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윗사람을 존경하는 것이 단순히 밥그릇 수에 대한 존경이 아니라 지혜에 대한 존경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이제 정보화 사회가 되면서 정보가 경험적 진리를 대체하고 있고, 삶에서 우러나오는 지혜의 가치가 하락하고 있다. 윗사람들에게서 지혜를 전수받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을 통해서 정보를 스스로 찾아낸다. 정보가 진리를 지배하게 되면서 경험의 가치하락이 지속되고 있고, 경험의 소산으로서의 삶의 지혜가 개인에게 있어서 푯대가 되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렇게 보자면 어른보다 인터넷을 존경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것들’이 늘어가는 것이 천하의 대세라는 이야기가 될 것인데, 문제는 공자의 나라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에서 유독 그 증세가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점이다. 학교와 가정이 무너진 탓이라는 언론의 지적은 너무 안일해 보인다. 그보다는 나이를 매개로 세대 간에 형성되었던 권력의 회전판이, 영원히 한국사회를 지탱해주리라 믿었던 그 권력의 회전판이 더이상 작동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는 것, 하지만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규칙은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에 착목하는 것이 보다 생산적이라고 보여진다. 지금 우리 청소년들은 선생이 학생들을 때리는 것이 대부분 개인적인 기분풀이라고, 변호사는 탈세를 해서 돈벌고, 의사는 돈벌기 위해 항생제를 마구 투약하며, 기자는 신문사 이익을 위해 주관적인 논조를 펼친다고 보고 있고, 한국의 어른들이 내세우는 권위라는 것이 그렇게 얻어지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면, 그들 눈에 비친 그런 어른들의 세계는 더이상 진리나 지혜의 표상도, 인격의 상징도 아니다. 그럴 때 그들이 권력의 회전판에 계속 머무르면서 윗사람들을 섬겨야할 이유가 더이상 없게 된다. 보스가 보스다워야 시다바리를 자처할 수 있다. 더군다나 그들은 나이라는 권력의 위계에서 최하층부에 놓여 있다. 그들이 더이상 그 권력의 게임에 참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만일 사정이 진실로 이러하다면 어른들이 여전히 나이라는 밥그릇 숫자에 의지해 권력을 수호하려 하거나 섬김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궁지에 몰린 어른들이 전통적 수법대로 “너 나이가 몇 살이야?”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것이” “어린 게 뭘 알어?” 이런 말들로 아이들을 다시 가두려고 시도할 수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이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변했다. 지금 청소년들은 민주화세대조차도 지나 민주화 이후 세대다. 나이를 매개로 성립된 권력을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 사이에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야 하는데도 여전히 낡은 권력의 틀을 강제할 때, 나이는 약자에 대한 폭력의 수단으로 동원될 뿐이다. 말이 딸리면 주먹이 동원되는 법, 그래서 한국의 어른들에게는 주먹이 가깝다. 이번 조사에서 한국 부모들이 청소년들이 잘못을 했을 때 대화로 풀기보다 꾸중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비중이 가장 높게 나타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나이의 위계가 아니라 지혜의 위계를 사고하면서 어른의 어른됨을, 지혜의 위계로서의 권위를 다시금 생각해야 할 때다. 나이로 이루어지는 한국사회의 폭력성이 재고되지 않는 이상, 한국사회에서 어른들의 권위는 결코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동안 우리 사회를 지탱해왔던 위를 떠받드는 문화, 강자와 큰 것을 떠받드는 문화를 역전시켜 아래를 섬기는 문화, 약자와 작은 것을 섬기는 문화로 바꾸는 작업, 한국식 권위주의라는 파시즘의 문화를 해체하는 작업이 사회 전반에서 수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바람을 따라 풀이 스러지듯 그렇게 어른들에 대한 존경이, 권위에 대한 존경이 생겨날 것이다. 이번 유니세프의 조사 결과가 주는 교훈이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