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2006년 3월경 출간될 산문집에 수록할 예정입니다-편집자.
사방에서 들려오는 김장, 김치 소리를 들으니 입안에 문득 침이 괸다. 작년에는 김장김치 맛이 아주 좋았다. 어느 집에서도 맛있는 김치를 얻어먹을 수 있어서 한 번 빌어먹을 때마다 명(命)이 하루씩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김장을 담으려면 일주일 전에 미리 고춧가루를 준비한다. 사흘 전에 젓국을 달이고 항아리와 소쿠리를 씻는다. 이틀 전에 무, 미나리, 갓, 파 따위를 손질해둔다. 하루 전에 배추를 절이고 무를 썰어 밀폐된 봉지에 담아 냉장보관한다. 마늘과 생강도 이때 다진다. 배추는 너무 빨리, 푹 절이면 단맛이 빠져나가 양념을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다. 배추 한 포기에 소금 한줌 정도가 적당한 분량인데 소금만으로는 잘 절여지지 않으므로 소금물로 절인다(한반도 서쪽 바닷가 어느 동네에서는 바닷물에 배추를 절인다는데 일리가 있는 발상이다). 하루 동안 절여 채반에 얹어 물기를 뺀 배추에 소금기를 뺀 굴, 먹기 좋은 상태로 썬 황석어젓, 뼈를 발라낸 동태가 준비되었다. 그러면 액젓에 고춧가루를 넣어 불리고 찹쌀풀과 젓갈을 넣은 뒤 갓, 쪽파, 미나리를 고루 버무려 소를 만든다. 절인 배추에 양념한 소를 넣고 골고루 버무린다. 잎을 줄기 쪽으로 접어 겉잎사귀로 감싼다. 항아리에 김치를 켜켜이 담는다. 우거지 따위로 덮고 돌을 누른다. 대체로 작은 용기에 담아 0도에서 4도 사이에서 익히면 가장 맛있게 익는다. 이상은 “나는 때때로 김장을 못 하는 여자를 바보·멍텅구리·너구리·말미잘이라고 부르고 싶다”라는 흥미진진한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출판사와 출판연도는 밝힐 수 없다.
몽골리언 조상 덕분인지 나는 바닷가의 비린 것은 그다지 내켜하지 않는다. 그래서 보통의 김치에 필수적인 젓갈을 넣지 않은 김치를 바라는데, 빌어먹는 주제에도, 조선 천지에 그런 김장 김치가 존재하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아니지, 많다. 그곳은 겨울철 절이라는 시공간이다. 눈이 흐벅지게 내리는 산사. 짚으로 덮어놓은 김장독. 그 속에서 익어가고 있을 김치를 생각하면 불가의 계율 가운데 하나인 ‘불투도(不偸盜;훔치지 말라)’가 산문에 선 천왕의 노호로 울려퍼지더라도 상관하지 않을 듯하다. 아직 실행에 옮겨보지는 못했지만.
어린 시절, 한겨울 기나긴 밤을 보내기 위해 동네 아이들은 어른이 없는 집에 모여 화투를 쳤다. 편을 갈라 내기를 해서 지는 쪽이 밖에 나가 서리를 해오기로 했다. 보통 서리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닭인데, 내가 자란 동네는 사람들이 전부 착하고 도둑질이라고는 해보지 못해서 아이들도 감히 닭을 훔쳐먹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어느날인가 내가 속한 편이 화투에 졌다. 서너 명이 작당을 해서 밖으로 나와서 작전을 짰다. 무엇을 서리할 것인가. 현금? 금가락지? 옥비녀? 아니다. 먹는 것이어야 했다. 강정? 가래떡? 조청? 꿀? 아니다. 서리를 해도 미안하지 않은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정해졌다. 김치였다. 자, 어떤 집으로 갈 것인가. 그 집은 김치가 많고 맛있는 집이어야 한다. 들키더라도 너그럽게 용서받을 있는 집이어야 하며 개가 없어야 한다. 만에 하나 실패하더라도 쉽게 도망을 칠 수 있도록 대문이 늘 열려 있으면 좋다. 이래저래 의논을 하고 전략을 수립하고 목표를 정하다 보니, 오매, 이를 어쩌나, 내가 좋아하는 내 여자동창생의 집이 대길(大吉)이라는 점괘가 나오는 것이었다. 나는 반대하고 싶었다. 그러나 끝까지 반대하지는 않았다. 왜냐. 같은 서리패가 다 나보다 한두 해 위인 동네의 소문난 망나니여서 그랬다. 우기다가는 아예 우리집에 가자고 할까봐 그랬다. 결정적인 이유는 그게 아니다. 나도 가보고 싶었다. 빨간 내복, 아니 왕녀 같은 잠옷을 입고 혼곤히 잠들어 있을, 여자 친구의 방문 혹은 쪽문에 비치는 달빛이 어떤 느낌일까 궁금해서, 혹 그 여자 친구가 잠결에 우리의 기척을 듣고 잠옷바람으로 내다본다면, 이미 우리 모두가 눈치채고 있다시피 봉긋이 솟아오르기 시작한 그 아이의 가슴 한편이라도 훔쳐볼 수 있을까 해서 그랬다.
먼데서 개가 컹컹 짖고 서리꾼들의 발 밑에서 새하얀 달빛이 부서졌다. 한 명은 밖에서 망을 보기로 하고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갔다. 김장 김치를 넣어두는 광은 짚으로 둘러쳐져 있었는데 입구가 좁아서 몸이 제일 작은 내가 들어가게 되었다. 나는 미리 준비한 바가지를 들고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어둠 속에서 김치가 익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는 손으로 더듬더듬 짚어가며 항아리 뚜껑을 찾았다. 손에 집히길래 열었더니 배추 포기가 손에 잡혔다. 그런데 그게 쉽게 빠져나오지를 않았다. 겨우 하나를 뽑아 바가지에 담는데 바깥에서 빨리 하라고 재촉하는 소리가 들렸다.
“쌔애끼, 너 안에서 혼자 다 처먹는 거 아냐?”
“가만 있어봐, 단지에서 안 나온단 말야!”
“혼자 먹으면 똥구멍에 솔난다. 알지?”
“몰라! 모른다구!”
그런데 우리의 목소리가 좀 컸었나 보다. 방문 하나가 벌컥 하고 열렸다.
“누가 왔나? 게 누구요”
한두 해 뒤에 여중생이 될 내 여자친구의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그 순간 밖에서 문을 탁 틀어막고 후다닥 하고 도망을 가버렸다. 조금 비쳐들던 달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손가락을 눈 앞에 대도 안 보일 정도로 어두워졌다. 나는 그 할머니가 다시 주무실 때까지 안에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삼십분 동안 나는 공포와 배신감을 잊기 위해 김치 한 보시기를 혼자 다 먹었다. 그 맛은 우선 시원했다. 그 다음에는 맵고 달았고 입속에서 아삭거리는 질감이 아주 뛰어났다. 젓갈은 아주 조금 쓴 모양인데 그나마 곰삭아서 전혀 비리지 않았다.
화투를 치던 곳에 가니까 의리없는 종자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등신, 쪼다, 말미잘, 쥐포 같은 놈들. 나는 어린 늑대처럼 머리를 쳐들고 온동네가 떠나가라 욕을 하고 또 했다. 거대한 은화와 같은 새하얀 달. 온몸에 휘감기는 달빛 덕분인지 전혀 춥지 않았다.
성석제
[창비/200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