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시 「강아지와 염소 새끼」를 만나다
2011년 시그림책 제안을 받았습니다. 몇 편의 시를 놓고 고민하던 중 우연히 권정생의 시 「강아지와 염소 새끼」를 만났습니다. 그때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권정생의 시가 발굴되어 책으로 출간된 참이었거든요. 시의 첫인상이 참 좋았습니다. 깨끗하고 즐거운 느낌이었지요. 시를 다 읽고 나니 웃음이 나오며 푸근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제가 농촌에서 자라서인지 장면들이 눈앞에 저절로 펼쳐지는 것 같았습니다. 더 볼 것도 없이 결심이 섰습니다. ‘그래, 이 시로 하자!’
주제와 방향 정하기
막상 시를 골라 놓고 보니 등장하는 캐릭터가 강아지와 새끼 염소 둘뿐이었습니다. 그나마 염소는 말뚝에 묶여 있는 상황이라 배경으로 표현할 수 있는 공간도 한정적이었습니다. 어쩌면 지루해지지 않을까 염려되었지요. 그림만으로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012년 6월 1차 스케치
처음에 구상한 것은 지금과는 아주 다른 모습의 그림책이었습니다. 이 시가 쓰인 게 한국전쟁 직후여서 강아지와 염소를 남과 북으로 상징하여 서로 다투고 갈라진 우리 역사와 현실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놓고 기획자, 편집자 들과 함께 이야기하다가 역시 제가 시를 처음 만났을 때의 깨끗하고 즐거운 인상을 살리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언덕을 배경으로 두 캐릭터의 움직임과 놀이에 집중하는 쪽으로 방향을 정했지요.
권정생 선생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던 답사 여행
그림의 배경도 중요했지요. 예전의 농촌 풍경이 남아 있는 마을이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다가 권정생 선생님이 사시던 안동의 조탑리 마을을 떠올렸어요. 실제로 권정생 선생님은 기독교아동문학상에 당선된 상금으로 새끼 염소 두 마리를 사서 키우셨다고 하니 그곳을 배경으로 하면 그림책 전체가 평화로운 감정을 전해 줄 것 같았습니다. 2012년 7월, 1차 스케치를 들고 기획자들과 함께 안동 지역으로 답사 여행을 떠났습니다. 『강아지똥』의 배경인 돌담 골목을 따라 선생님이 사시던 작은 흙집에 들어섰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작고 초라할까.’ 마당과 처마 밑을 서성이며 선생님 사시던 모습을 상상하니 가슴 한쪽이 먹먹해졌습니다. 보일러실 벽면에 선생님이 만들어 둔 작은 새집을 보니 마치 선생님이 곁에 계시는 듯한 느낌이 들어 울컥했습니다. 빌뱅이 언덕에 올라서 선생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그 마음이 그림 안에 잘 녹아들게 하리라 다짐했습니다.
주인공 염소를 찾아서
제가 자랄 때 본 염소는 흰 염소였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흰 염소와 까만 강아지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흰 염소는 저돌적인 염소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에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또 배경을 최소한으로 그리고 캐릭터들만 눈에 띄게 하려던 구상에도 잘 맞지 않았고요. 결국은 흑염소를 주인공으로 삼기로 하고 모델이 되어 줄 염소를 취재하기 위해 성주의 염소 농장을 찾아갔습니다. 흑염소, 갈색 염소, 흰 염소 등 여러 염소가 있었지만 생김새가 토종 염소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급하게 인근 지역을 수소문해 보았지만 마땅치 않았지요. 농가마다 염소 한두 마리씩 키우던 시절은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어디에 가야 마음에 드는 염소를 만날 수 있을까?’ 수소문하던 끝에 다행히 생김새가 괜찮은 염소들이 있는 남양주의 염소 농장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여섯 차례 만에 완성된 스케치
2012년 9월 2차 스케치
답사 후에 강아지와 염소가 뛰노는 배경을 조탑리 마을의 빌뱅이 언덕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어 두 동물을 마중하여 집으로 데려가는 사람이 나오는데 이 사람을 권정생 선생님으로 그렸습니다. 이때는 책 속에 권정생 선생님과 이오덕 선생님의 우정도 담고 싶은 마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림의 배경에 권정생 선생님의 집을 찾아와 함께 앉아 있는 이오덕 선생님을 그려 넣었지요. 하지만 마을 배경이 드러나면서 두 동물이 노는 모습이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모두 담으려고 한 것은 욕심이었던 거죠.
2012년 10월 3차 스케치
불필요한 요소들을 모두 걷어 내고 성격이 다른 강아지와 염소의 움직임에만 집중하여 화면을 구성했습니다. 그러자 발굽 동물인 염소와 발가락 동물인 강아지는 관절이 꺾이는 방향이나 모양이 다를 테니 그림에서도 전혀 다른 특성이 드러나야 할 것 같았지요. 동물들의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기 위해 고민했습니다.
2012년 11월 4차 스케치
주인공들을 더 세심하게 배치하여 감정이 드러나도록 애썼습니다. 앞부분에 새끼 염소가 엄마 염소와 헤어지는 그림을 더하여 슬픔에 잠긴 염소 캐릭터에 나름의 개연성도 만들어 주었지요. 말뚝이 뽑혀 상황에 반전이 일어나는 장면도 추가했습니다.
2013년 6월~2014년 3월 5차・6차 스케치
좀 더 재미있게 하기 위해 만화처럼 말풍선을 넣어 보기도 하고 꿀벌을 등장시켜 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감정이 넘친다는 인상을 받아 다시 이전의 구성으로 되돌렸습니다. 여섯 번째 스케치에서 실제 크기로 그리며 크기와 배경, 시점을 세부적으로 조정하여 스케치를 완성했습니다.
생동감 있는 캐릭터를 잡기 위한 습작
이 그림책에서는 캐릭터가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큽니다. 계속 강아지와 염소를 그려 보았으나 몇 개월이 지나도록 인상적인 캐릭터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어린 동물들을 단순하면서도 생생하게 표현하고 싶어서 콩테, 파스텔, 볼펜, 연필, 색연필, 목탄, 아교, 먹물, 판화 등 가능한 여러 재료와 기법 들을 이용해서 다양하게 그리고 또 그려 보았습니다.
드디어 채색하다
여러 고민 끝에 검정 콩테와 갈색 파스텔만으로 성격이 다른 두 동물을 돋보이게 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책의 후반부에만 배경을 수채화와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하기로 결정했지요. 처음부터 끝까지 흐름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장면을 동시에 조금씩 그려 나갔습니다. 신경을 곤두세워 작업했지만 하늘이 보이는 장면에서부터는 미묘한 색의 변화 때문에 실패한 그림이 자꾸 쌓여 갔지요. 힘들 때마다 권정생 선생님의 「빌뱅이 언덕」이라는 시를 떠올렸습니다.
빌뱅이 언덕
권정생
하늘이 좋아라
노을이 좋아라
해거름 잔솔밭 산허리에
기욱이네 송아지 울음소리
찔레 덩굴에 하얀 꽃도
떡갈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하늘이 좋아라
해 질 녘이면 더욱 좋아라
(『안동문학』 1986)
빌뱅이 언덕에서 바라보는 해 질 녘 풍경을 그린 시예요. 이 시의 풍경처럼 포근하고 평화로운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심기일전했습니다. 숨 한 번 크게 쉬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그리기를 반복했고, 마침내 2014년 7월에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삼 년의 시간이 훌쩍 흘렀습니다. 그동안 시에 담긴 내용의 깊이와 숨은 이야기들 사이에서 놀기도 하고 고민도 하면서 한 권의 그림책으로 완성했습니다. 부디 권정생 선생님께 누가 되지 않고 또 여러 독자 여러분들께 봐 줄 만한 그림책이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