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회 창비 청소년 글쓰기 대회
고등부 대상『파란 아이』를 읽고
문경 글로벌선진학교 3학년 박준요
선우와 은결. 같은 사람이지만 어머니와 할머니의 잣대 때문에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된 아이. 그리고 그 사이에서 ‘파란 아이’가 선택한 이름인 은우. 이 아이의 정체성을 제일 잘 표현해 주는 이름은 무엇일까?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한 사람의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에 대한 물음이 떠나지 않았다. 소년에게는 죽은 누이가 있다. 고작 3살 때 엄마의 실수로 인해 죽음을 맞게 된 그 누이의 이름은 ‘선우’였다. 그 후 태어난 이 소년에게 엄마는 죽은 누이를 생각하며 그 누이의 이름을 붙여 주고, 소년이 죽은 누이인 양 착각하며 소녀처럼 길러 왔다. 하지만 할머니는 달랐다. 할머니는 이 소년을 죽은 누이와는 상관없는, 소년 그 자체로 봐 주었다. 그래서 엄마가 지어 준 ‘선우’라는 이름 대신 ‘은결’이라는 이름으로 소년을 부르고, 씩씩한 남자아이로 이 소년을 길러 왔다. 하지만 결국 이 소년이 택한 이름은 선우도, 은결도 아닌 ‘은우’였다. 왜였을까?
어른들은 종종 자신의 아이에게 많은 것을 바란다.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 자기가 해 보고 싶었던 일들을 자신의 아이를 통해서 실현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순전히 자신들의 의지로 아이들의 삶을 조종하며 이 모든 것은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합리화하곤 한다. 하지만 부모들이 아이들의 삶을 설계하고 아이들을 온전히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것이 정말로 아이들에게 좋은 것일까? 때때로 부모들은 착각한다. 자신들이 설계해 놓은 방향으로 아이들을 이끌 때 아이들이 별 저항 없이 순순히 따른다면, 아이들이 그 길을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부모들은 모른다. 아이들의 침묵은 그들이 그 길을 원해서가 아니라, 이미 그 길에 익숙해져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인 것을. ‘선우’만 해도 그렇다. 자신이 소년임에도 불구하고 소녀처럼 길러진 것에 대해 아무런 반발심도 갖지 않는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렇게 길러졌기 때문에 소녀처럼 취급받는 것이 익숙해서였을 것이다. ‘은결’도 마찬가지다. 할머니께서 길러 주신 대로, 강촌 이곳저곳을 누비며 수영도 하고 먹을거리도 팔면서 소년의 삶을 살았다. 하지만 ‘은결’도 그저 할머니께서 만들어 놓으신 삶을 사는 것뿐, 자기 자신이 주체가 되어 ‘은결’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동아의 단순한 질문에 소년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은결이가 너냐?” “선우 엄마는 왜 선우를 선우라고 불러요?” 단순한 호기심에 나온 질문이지만, 소년에게는 혼란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한 질문이었다. ‘나는 진짜 누구인가?’ ‘내가 원하는 삶은 무엇인가?’ 아마 소년은 동아와 함께한 시간 동안 이 문제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한 사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일은 쉽지 않다. 나만 해도 그렇다. 상황마다 달라지고, 마주하는 사람마다 달라지는 나 자신을 보며 나는 무수히도 많은 고민을 했었다. 나는 누구인지, 나는 왜 사는지, 내 삶의 목표는 무엇인지……. 내 정체성을 잃고 방황할 때,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답을 찾아보려고도 했고, 친구들로부터 답을 찾아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알게 되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왜 사는지에 대한 답은 부모님에게서도, 친구들에게서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결론은 오직 나만이 내릴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자기 성찰과 자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아마 이 소년은 자신의 이름을 ‘은우’로 정하면서 이런 다짐을 했을 것이다. 내 인생은 내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엄마도 할머니도 내 인생을 만들어 줄 수는 없다고.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나는 은우의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