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OR
  • ENG
  • 사이트맵
  • 블로그
  • 창비교육
  • 창비학당
  • 미디어창비
  • 검색
    • ID/PW찾기
    • 회원가입
    • 로그인
창비 – Changbi Publishers

Main menu

콘텐츠로 바로가기
  • 도서
    • 전체 도서
    • 새로 나온 책
    • 수상도서
    • 추천도서
    • 전자책
  • 저자
  • 계간 창작과비평
  • 창비어린이
    • 창비어린이 홈
    • 계간 창비어린이
    • 새소식
    • 도서 목록
    • 어린이/청소년 독서활동 자료
    • 빅북
    • 책씨앗
    • 커뮤니티
    • 공모
  • 커뮤니티
    • 팟캐스트 라디오 책다방
    • 독자통신
  • 문학상 및 작품공모
    • 단행본 투고 안내
    • 만해문학상
    • 백석문학상
    • 신동엽문학상
    • 창비장편소설상 공모
    • 창비신인문학상 공모(시/소설/평론)
    • 계간 ‘창비어린이’ 원고모집
    • 어린이-청소년 관련 공모
  • 이벤트
    • 독자 행사 정보
    • 행사/이벤트 후기
    • 당첨자 발표
  • 고객센터
    • 자주 묻는 질문
    • 1:1 문의하기
    • 도서관을 위한 One-Stop 상담
    •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공지사항
  • 창비 소개
  • 계간 창작과비평 (구)
    • 계간 창작과비평 소개
    • 편집위원
    • 정기구독 안내/신청
    • 전자구독이란?
    • 정기구독자 게시판
    • 창비주간논평
Home>커뮤니티

김민기: 통기타, 공동체, 유토피아 / 신현준

2001.08.01커뮤니티 > 창비웹진 > 젊은이의 노래
  • 작게
  • 크게
  • 인쇄
  • 목록

김민기: 통기타, 공동체, 유토피아 김민기가 누군지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자. 아는 사람은 너무나 잘 알고 있고, 모르는 사람은 설명해도 관심없을 테니 말이다. 오늘 하고 싶은 말은 ‘1970년대 청년들의 송가’라고 알려진 그의 음악에 여러 종류가 있다는 점이다. 음악 장르가 그렇다는 말이 아니라 음악이 표현된 형식이 그렇다는 뜻이다. 첫번째 종류는 ‘양희은이 부르는 노래’다. 운이 좋아서 그녀가 직접 노래부르는 모습을 본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반으로, 혹은 라디오나 음악다방에서 음반을 틀어주는 것을 들었다. 「아침 이슬」 「작은 연못」 「백구」 등이 실린 음반에는 “김민기 작사•작곡”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고 ‘김민기가 누구지?’라고 궁금해 한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질문은 거기에서 그쳤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음악산업이 돌아가던 씨스템에서는 작곡가가 매스미디어에 얼굴을 내비치는 경우는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가수는 ‘작곡가 선생님’ 밑에서 곡을 받아 노래부르는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김민기: 통기타, 공동체, 유토피아 물론 1970년대의 포크송이 이런 ‘직업작곡가 씨스템’에 도전했다는 사실을 나 같은 일반인들이 알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김민기의 음악 역시 ‘대중가요’의 하나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아무개 오케스트라’ 혹은 ‘아무개 악단’의 반주가 아니라 통기타 하나의 반주로 노래한다는 점이었다. 1970년대 중반 대마초파동 이후 대중음악계의 ‘왕정복고’, 즉 직업작곡가 씨스템의 부활 뒤에도 통기타 가요가 ‘언더그라운드’의 중요한 세력이 되었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지금도 이런 통기타 가요들은 미사리나 일산 등 ‘라이브까페’에서 불리고 있다. 김민기의 노래는 잘 부르지 않는다. 가수들이 ‘감히’ 부르지 않는 건지, 주고객인 ‘중산층 주부들’의 감성에 거슬려서 그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김민기의 노래는 이런 퇴색한 공간이 아니라 TV의 ‘공익광고’에 등장한다. 김민기가 작사하고 송창식이 작곡한 「내 나라 내 겨레」, 그리고 양희은이 노래하는 「상록수」가 박세리의 ‘맨발 투혼’과 함께 등장하고 있다. 

 

두번째. 개인적인 이야기를 해도 된다면, 나 같은 사람에게 김민기의 음악은 ‘악보’로 다가온다. 악보래봐야 복잡하게 편곡된 것이 아니라 오선지 위에 주멜로디가 그려지고 기타 반주를 위한 기본 코드의 진행이 있는 단순한 것이다. 악보다. 그건 김민기의 노래가 문자 그대로 ‘포크송’이었다는 의미다. 포크를 ‘영미 팝음악에 영향받은 통기타 가요’ 정도로 이해하는 분들에게는 양해를 구하고 싶다. 내가 말하는 포크음악이란 ‘민속음악’이라는 본래의 뜻이다. 포크음악이란 ‘공동체의 음악’이라는 뜻을 동반한다.

 

공동체라는 단어가 고색창연한 느낌을 주므로 의미를 수정해야겠다. 전통적 공동체가 아니라 현대적 공동체다. 생활과 숙식을 같이하면서 단단히 결속된 단위가 아니라 정서와 감정을 공유하는 느슨한 단위다. 영어를 모국어처럼 쓰는 요즘 세태에 편승한다면 ‘커뮤니티의 싸운드트랙’이었다. 어떤 커뮤니티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대학생들의 커뮤니티’다. 그래서 김민기의 노래는 아직도 대학가에서 불리고 있다. 써클룸, 학과 사무실, 술집 등에서…… 그렇지만 지금의 대학생들이 그의 노래를 부르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나는 잘 알 수 없다.

 

마지막 종류의 김민기의 음악은 ‘김민기가 연주하는 김민기의 음악’이다. 김민기는 양희은보다도 더 전면에 나서지 않았으므로 그의 음악을 ‘라이브’로 들어본 사람은 정말 드물다. 그의 유일한 정규 음반도 모종의 조치로 인해 구해 듣기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서인지 이 음반의 ‘음악적’ 의의는 아직도 충분히 조명되지 않은 듯하다. 흔히들 김민기를 ‘깨어있는 의식’과 연관짓지만, 이 음반은 의식을 깨우기보다는 몽롱한 의식을 던져준다. 어쿠스틱 기타가 이끌어가기는 하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아하 누가 그렇게」와 「바람과 나」에 나오는 플루트 소리, 「친구」에 나오는 오르간 소리, 「아침 이슬」에 등장하는 피아노와 현악기 등은 ‘뿌옇다’라고 표현할 만한 소리의 풍경을 만들어준다. 그게 당시 스튜디오의 자연적 조건이었는지 아니면 리버브나 에코 등의 음향 효과를 의식적으로 입힌 것인지는 모르지만.

 

김민기: 통기타, 공동체, 유토피아

 

김민기가 부르는 김민기의 노래는 메씨지가 뚜렷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무엇엔가 홀린 사람의 입에서 무의식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들렸다. 당시의 가수들은 참 또렷또렷한 발음으로 노래했고 이는 김민기가 만든 노래를 레코딩하고 연주했던 양희은도 마찬가지였다. 그렇지만 이 ‘가수’의 발성은 매우 ‘다른’ 것이었다. 나중에 ‘평론용어’가 된 그의 창법은 ‘나직이 푸념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푸념은 무겁게 가라앉은 상태에서 절망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붕 뜬 분위기에서 울려퍼지는 것 같았다. 이상한 것은 명료한 발음임에도 불구하고 머리를 긴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완시킨다는 점이었다. 음반에서 듣는 김민기는 청년 반항의 열정보다는 예술가적 의지로 다가온다. 그 의지는 ‘어떤 유토피아’를 향하고 있다.

 

첫번째 김민기의 음악은 ‘좋은 노래’, 두번째 김민기의 음악은 ‘깨어있는 의식’의 상징이다. 마지막 종류의 김민기의 음악은 ‘유토피아적 싸이키델리아’를 안겨주었다고 말해야 할까. 이게 김민기가 약물을 복용했다거나 당시 청년들이 마약을 하면서 김민기를 들었다는 말은 아니다(한국에서는 지금도 이런 말을 붙이지 않으면 조마조마해야 한다. 제기랄). 그의 음악은 청자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준다. 어느 것이 진짜 김민기일까?

 

김민기의 앨범들. 좌로부터 1971, 1987, 1990년 판

김민기의 앨범들. 좌로부터 1971, 1987, 1990년 판

 

최근 김민기는 한 스포츠신문(『스포츠서울』, 2001. 3. 6)과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난 연극인이 아니었거든. 미대를 나왔지만 ‘딴따라’였고. ‘잡놈’일 수밖에 없지. 그래서 ‘짬뽕’인 뮤지컬에 끌렸지”라고 말했다. ‘옐로우’ 신문과의 인터뷰이기 때문에 촌철살인으로 끝내버렸다는 느낌이 강하지만, 이 말에는 모종의 진실이 담겨 있는 듯하다. 이 답변에서, ‘다른 사람이 자기를 고정된 이미지로 규정하는 것을 싫어하는 예술가’의 면모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는 정말로 ‘순수를 추구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짬뽕을 추구하는 잡놈’일지도 모른다. 하나의 음악이 이렇게 여러 종류로 해석되고, 여러 갈래로 분기하고 있으니까. 만약 그의 음악이 ‘젊은이의 것’이었고 지금도 영원히 젊다고 느껴진다면 그건 1970년대의 사회정치적 상황을 예민하게 표현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잡종이 순종보다 우월하다’는 통찰을 선구적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음악인이든 음악 팬이든 김민기의 적자(嫡子)들은 너무 ‘순수’와 ‘정통’에 집착했던 것 같다.

김민기, 신현준, 창비
0 comments0 trackbacks
댓글쓰기목록
https://www.changbi.com/archives/37742/trackback 트랙백 복사

댓글쓰기

*
*

취소

목록보기

  • 회사소개

  • Contact

  • 제휴 문의

  • 창비트위터

  • 창비페이스북

  • RSS

  • 에스크로
  •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사이트맵

Family Site

  • Changbi English
  • 季刊 『創作と批評』日本語版
  • 창비주간논평
  • 창비에듀닷컴
  • 창비 블로그
  • 미디어창비
  • 창비 공식 페이스북
  • 창비 공식 트위터
  • 인문까페 창비
  • 세교연구소
  • 창비학당
  • 창비서교빌딩 대관 서비스
창비

copyright (c) Changbi Publishers, Inc. All Rights Reserved.

10881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184 (413-756 경기도 파주시 문발동 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 513-11)
대표전화 031-955-3333(월~금 10시~17시) / 팩스 031-955-3399 / Webmaster@changbi.com
대표이사: 강일우 / 사업자등록번호: 105-81-63672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