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TV의 한 연예 프로그램을 보니 김수철이 오랜만에 등장했다. 참고로 지금 말하는 연예 프로그램이란 ‘연예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아니라 ‘연예정보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연예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라면 40줄을 넘긴 ‘흘러간 가수’가 등장할 리 없기 때문이다. 불행히도 오랜만에 그가 세간의 시선을 받은 뉴스는 ‘이혼소송’이라는 고통스러운 소식이었다. 이렇듯 한때 연예인이던 사람의 개인적 사생활이 뉴스가 되는 반면 그의 음악활동은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다. 그날의 프로그램에서 자료화면으로 보여준 것들도 1980년대 초중반 그의 전성기 시절에 TV에 나와 노래부르던 모습이었다.
그 뒤 그가 어떤 길을 걸었는가는 관심있는 일부에서만 알 뿐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가요인 김수철’로부터 ‘국악인 김수철’로 변신했다. 즉 연예인으로부터 예술인으로의 변신이었지만, 그것이 생활의 어려움이 노정 되어 있는 길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하다. 그가 발표한 음반들 중 「서편제」의 영화 싸운드트랙을 제외하고는 ‘히트’하지 못했고, 그 결과 그는 알아주는 사람 없는 일을 외고집스럽게 추구하는 인물로 남게 되었다. (「소리길」「천년학」)
그런데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김수철은 가수나 연예인이기 이전에 록 기타리스트였다. 광운공대(현 광운대학교) 출신 캠퍼스 그룹싸운드인 ‘작은 거인’을 이끌면서 그는 산울림, 송골매와 더불어 ‘대마초 사건 이후의 공백’을 메운 존재였다. ‘작은 거인’은 1979년과 1981년 두 장의 음반만을 발표하고 해체되었지만 이 작품들은 매우 소중한 역사적 가치를 갖고 있다. 영미 평론가들이 즐겨 쓰는 표현을 인용하자면 이 음반들은 ‘들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어도, 한번 들어본 사람들에게 기타를 잡아보게 만든’ 음반이라고 할 수 있다.(「일곱 색깔 무지개」「별리」)
‘작은 거인’은 당시의 캠퍼스 그룹싸운드가 대부분 그러했듯 ‘취미로’ 결성된 밴드였고 실제로 학업, 군입대, 취직 등의 이유로 그룹은 해산되고 말았다. 김수철이 솔로 아티스트로서 경력을 이어가게 된 것도 본래 목표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발언을 믿는다면(못 믿을 이유가 없다), 그의 곡 중 처음으로 대중적으로 히트한 「못다 핀 꽃 한송이」 등이 실린 음반은 “음악활동을 그만두는 것을 기념하여 발표한 것”이라고 한다「못다 핀 꽃 한송이」「정녕 그대를」
그 뒤의 그의 활동은 잘 알려져 있다. 1980년대가 ‘조용필 천하’였지만 김수철은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조용필의 아성을 위협할 정도로 뜬 적이 있다. 물론 ‘뜬’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노래가 조용필의 노래와는 달리 ‘남녀노소 누구나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끼리 좋아하는’ 것이었다는 점이다. 「젊은 그대」「나도야 간다」같은 곡들은 캠퍼스 한구석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통기타를 치고 불러도, 스포츠 경기장에 떼로 모여 응원가로 불러도, 또 노래방에서 술 취한 채 불러도 제격이었다. 이런 곡들은 ‘청년의 송가(anthem)’라는 말에 어울리는 곡이었다. 대학교 캠퍼스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당시에도 그의 노래들은 분열을 원만하게 봉합시키는 흔치 않은 매개체였다. 천재적 재능을 가졌으면서도 해맑게 웃는 그의 얼굴에 어느 누가 돌을 던질 수 있었으랴.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협연하는 김수철 ⓒ kimsoochul.com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는 우리 시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건 보통의 가수들처럼 세간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것과는 거리가 있다. 그의 말을 한번 더 믿는다면, 언젠가 한번 외국인(아마도 미국인으로 짐작된다) 앞에서 연주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의 연주를 들은 외국인이 “그건 로큰롤이고, 나는 당신 나라의 음악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그게 섬세한 그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로큰롤을 버리고 국악을 선택했다. 국악의 길이란 ‘어린 시절부터 고행을 하지 않으면 힘들다’는 게 속설이고, 게다가 국악계에서 ‘한낱 대중음악인에 지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떤 반응을 보냈는지는 대략 짐작할 수 있다.
그후 그의 음악적 성과에 대해서는 나로서는 뭐라고 평하기 힘들다. 그런데 「황천길」(1989)「恨」「황천길」「서편제」싸운드트랙(1993), 「팔만대장경」(1998)「서곡-다가오는 검은 구름」「九天으로 가는 길」에서 듣는 그의 음악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예전의 그의 음악에 비해 ‘재미’가 덜하다. 이런 음반을 듣다 보면 오히려 「12주년 기념 음반」(1988)이 최고작이라는 생각만 재확인될 뿐이다. 그래서 그가 록을 ‘버리고’ 국악을 선택하지 않고 록과 국악을 비비고 뒤섞었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게 가능한 이야기냐’고 묻는다면, 지난 3월 2일 한국을 찾은 중국의 록 음악인 추이졘(崔健)의 음악을 한 예로 들고 싶다. 중국의 전통악기와 장단을 일렉트릭(혹은 일렉트로닉)한 ‘서양’의 싸운드와 잡종교배한 그의 음악에 대해서는 여기서 간략히 말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각국의 평단의 반응을 볼 때 그의 시도가 충분히 성공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김수철과 추이졘을 비교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양악(洋樂)’과 ‘국악(國樂)’에 대한 두 나라의 시각과 시스템의 문제다. 한마디로 우리와 달리 중국의 음악대학에서는 서양음악과 중국음악을 모두 배우고, 중국의 ‘꿔위에(國樂)’는 ‘전통음악’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서양음악과 중국음악이 뒤섞인 음악’이다. 반면 한국의 국악은 중국에서 들어온 음악을 중국보다 더 전통에 충실하게 보존하고 있는 것 같다. 미국과 영국에서 들어온 록 음악을 신실하게 추구하는 점도 이런 점과 무관치 않다. 민족성을 운운하기는 싫지만 한국은 ‘순종’에 너무 집착하는 나라 같다. 김수철도 그런 굴레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너무도 아이러닉하게도 김수철이 국악을 선택하면서 ‘한국적 록’의 가능성은 사라져버렸다.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중요한 계기를 잃어버렸다.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가. 곰곰 생각해볼 일이다. [창비 웹매거진/20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