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힘들었던 과거라도 돌아보면 그리워지기 마련이다. 불완전한 인간의 기억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세세한 맥락을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마음의 고통은 무디어지고, 수없이 흘린 눈물이 사라지면 우리는 과거를 추억한다. 오늘 꺼내 들어 다시 보는 이상무의 『비둘기 합창』은 지나버린 과거의 초상이다.
『비둘기 합창』은 70년대의 대표적인 아동잡지 『소년중앙』에 별책부록으로 연재된 후 1980년 동광출판사에서 단행본 5권으로 출판된 작품으로 단행본 출판 싯점을 기준으로 따져봐도 20년이 지난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만화를 통한 20년전으로의 여행
장르적으로 보면 『비둘기 합창』은 대가족물의 전형적인 구조를 담고 있다. 대가족물은 주로 TV 일일드라마에서 자주 애용되는데, 전체 가족과 연관을 맺은 갈등과 개별인물들의 소소한 갈등들이 흥미롭게 엇갈리며 이야기가 진행된다. 당연히 웃음과 울음, 성공과 실패가 교차한다. TV 미니씨리즈로도 각색되었던 김수정의 『일곱개의 숟가락』, 무술가족이 등장하는 황미나의 『웍더글 덕더글』, 일본 『모닝』에 연재되어 좋은 평가를 얻고 있는 『이씨네집 이야기』가 모두 『비둘기합창』의 계보에 속하는 작품들이다. 그러나 대가족물이라고 하더라도 웃음과 울음 그리고 근심이라는 3개의 화두 중 어디에 방점이 찍히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이야기를 담게 된다. 표면적으로 『비둘기 합창』이나 『일곱개의 숟가락』 그리고 황미나의 두 작품은 모두 웃음에 방점이 찍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황미나의 작품과 비교하면 『비둘기 합창』이나 『일곱개의 숟가락』은 ‘울음’과 ‘근심’이 서사를 이끌어간다. 90년대 만화와 70년대, 80년대 만화의 당연한 차이로 90년대 황미나 만화는 대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우스개에 집중한다. 가장 최근 작품인 『이씨네집 이야기』에 이르면 씨트콤처럼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가족들의 개인별 에피소드만 도드라진다. 그러나 『비둘기 합창』이나 『일곱개의 숟가락』은 다르다. 이 두 대가족에게는 ‘생계곤란’이라는 ‘근심’과 ‘가족의 죽음’이라는 ‘울음’이 존재한다.
『비둘기 합창』은 실직한 편부 슬하의 6남매를 그린 작품이다. 6남매의 아버지 독고룡은 교장선생으로 은퇴한 뒤 자가용 운전기사로 7년을 일하다 실직한다. 아버지의 실직으로 가족들의 생계가 곤란해지자 갈등이 시작된다. 가장의 실직에 이은 가정의 파괴는 오늘도 생생한 모습이지만 아이를 보육원에 맡길 수밖에 없는 오늘의 아버지와 달리 70년대의 독고룡에게는 실직의 고통을 분담할 6남매가 있었다. 물론 이 6남매는 보육원에 갈 정도로 어리지는 않지만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보육원에 맡겨지는 요즘 아이들과 마찬가지다. 막내 독고탁에게 엄마 역할을 하던 큰딸 독고숙은 다방의 카운터에 취직하고, 고시를 준비하던 독고준은 공사판에, 고등학생이던 봉구는 연탄배달에 나선다. 이들 6남매는 아버지의 실직에 대한 고통을 조금씩 나누어 가진다. IMF 시대를 풍미한 슬로건인 ‘고통분담’이 사회가 아니라 가족 단위에서 이루어지던 시대가 바로 70년대였던 것이다.
가족이 존재하는 미장센
『비둘기 합창』에서 ‘가족’은 서사만이 아니라 미장센이나 배경과 같은 시각연출도 규정했다. 70년대 명랑만화의 미장센이 골목길과 학교로 대표된다면, 가족만화의 미장센은 집으로 대표된다. 길창덕, 윤승운, 신문수의 명랑만화가 친구들이 모일 수 있는 골목길을 필요로 했다면, 이상무의 『비둘기 합창』은 가족이 모일 수 있는 집을 필요로 했다. 야트막한 담, 작은 마당, 장독대와 수돗가, 누렁이가 살고 있는 개집, 마루와 방으로 구성된 독고룡의 집은 가족공동체 간의 소통의 장이 되었다. 울음과 근심이라는 비극적 긴장에 이완을 제공하는 막내 독고탁과 누렁이의 쫓고 쫓기는 슬랩스틱이 이루어지는 대문-마당-마루의 공간이나, 숙을 사모하는 마음씨 착한 마우돈이 자연스럽게 고개를 들어 집안을 볼 수 있는 야트막한 담은 지금은 잃어버린 70년대의 전형적인 도시공간이다. 이 70년대적인 도시공간은 80년대를 거치며 노태우정권의 주택 100만호 공급정책과 신도시개발로 인해 우리 곁에서 사라져버렸다. 공간이 사라지며 대가족도 사라졌고, 대가족이 사라지며 공간도 사라졌다. 그래서인지 『비둘기 합창』이 보여주는 단층, 단독 주택의 미장센만으로도 우리는 70년대를 추억할 수 있다.
70년대를 대표하는 캐릭터 독고탁
『비둘기 합창』의 화자이자 이후 이상무 만화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독고탁은 명실상부 70년대를 대표하는 캐릭터다. 『비둘기 합창』에서 탁구공 같은 동그란 얼굴에 짧은 머리로 등장하는 귀여운 막내꼬마는 모든 사건과 등장인물들에 관여하고, 때론 나레이터로 등장해 극의 재미를 부여한다. 『비둘기 합창』에서는 감초격인 귀여운 캐릭터로 등장했지만, 『녹색의 계절』이나 『아홉개의 빨간모자』에서는 상처를 입은 고독한 청소년으로, 『울지 않는 소년』에서 독고탁은 동생과 함께 씩씩하게 삶을 개척하는 인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독고탁의 갈등은 ‘가족’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70년대적이다.
독고탁은 가족과 함께 있거나 아니 가족의 부재로 인해 갈등하지만, 80년대 등장한 까치는 당연히 홀로 존재한다. 80년대 이후의 만화 주인공들은 독고탁과 달리 ‘당연히’ 혼자 살아간다. 그들은 ‘스스로 존재’한다.
이상무는 가족공동체에 주목하는 작가다. 서로의 고통을 나누어지는 가족공동체를 그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부재의 슬픔’이 주는 비극을 그린다. 아버지가 개인택시 운전사가 되어 실직을 극복했던 날, 봉구는 권투 결승전에서 쓰러지고 만다. 준이 고시에 합격하던 날, 봉구는 죽는다. 가장 우직하게 가족을 사랑한 봉구의 죽음을 독자들에게 던지는 순간, 독자들은 가족공동체의 가치를 깨닫는다.
한 칸에 등장하는 여러 사람들
이상무는 『비둘기 합창』에서 가로로 긴 칸을 자주 쓴다. 규칙적으로 분할된 가로로 긴 칸에는 보통 두사람이나 세사람이 등장한다. 최근 만화가 세로로 긴 칸을 사용하여 한 사람을 보여주거나, 칸의 편집을 이용해 인물들을 교차해 보여주는 방식을 선호하는데 비해, 이상무의 만화는 한칸에 두 사람 이상을 자주 등장시킨다. 이로 인해 인물들이 칸과 칸을 통해 나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칸에 함께 존재한다. 『비둘기 합창』의 주제이자 미학의 출발점은 ‘함께하는 사람’에서 시작된다. 많은 가족이 함께 살고, 각자 가족을 위해 걱정하며, 또다른 사람들과 연결된다. 그리고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일대일의 관계를 넘어 확대된다. 작가는 확대재생산되는 관계의 화두로 ‘정’을 제시한다.
“어쨌든 나는 오늘 많은 것을 배웠다. 사람은 꼭 좋은 것하고만 살아야하는 것은 아닌가 보다. 밉고 징그럽고 무서운 것들도 필요한 것일까? 누렁이(잡종)나, 우돈형이나 미스터 박처럼 싫은 사람도 없어서는 안되는 것인가 보다. 아빠는 그것이 정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데 정이란 뭘까? 정이란 것은 보기 싫은 것도 없어지면 보고 싶게 만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정이란 것은 별로 좋은 것이 아닌가 보다. ” (독고탁의 일기 중에서)
또 다른 이상무의 초기 대표작, 고독한 청소년 독고탁이 등장하는 『녹색의 계절』에서도 모든 갈등을 ‘정’을 통해 풀어간다. 어머니의 유언으로 아버지의 농장을 찾은 독고탁은 아들임을 밝히지 않고 묵묵히 일한다. 그 와중에 도둑으로 누명을 쓰기도 한다. 결국 이복형제와의 야구 대결에서 승리한 독고탁에게 어머니의 환영이 나타나 “맺힌 한을 풀거라 그리고 아버지께로 가야 해. 넌 총명한 내 아들이니 행여 나를 너무 집착한 나머지 세상을 어둡게 살진 않으리라 믿는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울던 독고탁의 뒤로 아버지와 이복형제, 그리고 아버지의 농장 사람들이 독고탁을 기다린다. 이렇게 갈등은 해결된다.
『비둘기 합창』에는 가족이 있다. 서사의 중심에는 물론 연출, 공간, 칸의 중심에도 가족이 있다. 독고숙과 결혼해 가족으로 편입한 마우돈으로 예전과 똑같은 8명이 된 독고룡의 가족이 봉구의 무덤을 방문하고 돌아서는 대단원은 『비둘기 합창』에 존재하는 가족의 가치를 웅변한다.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함께 존재하는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