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비평> 편집인이기도 한 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백낙청 상임대표가 2008년 광복 63주년 기념 8.15민족통일대회에서 행한 기념사를 전문 게재합니다 – 편집자.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광복63주년기념 8.15민족통일대회
2008. 8. 15 백범기념관 컨벤션홀
기 념 사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그리고 7천만 동포 여러분. 자리를 빛내주시는 이 나라의 원로님들과 귀빈 여러분. 6.15남측위원회의 동지 여러분.
오늘 우리는 제63회 광복절을 기념하는 8.15민족통일대회를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6.15민족공동위원회의 8.15행사는 공동행사로 열리는 것이 원칙인데, 올해는 남•북•해외가 따로 기념행사를 하게 된 점은 아쉬운 일입니다. 작금의 남북관계 경색이 그 중요 원인입니다. 그러나 경색국면에서도 우리 민족공동위원회는 6.15공동선언 발표 8주년 기념행사를 금강산에서 함께 치러냄으로써 민족공동행사의 맥을 이어놓았습니다. 따라서 남북관계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8.15행사를 개별적으로 치르기로 합의한 것은 우리 나름의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오늘 행사의 의미는 막중합니다. 해마다 정부 주최의 광복절 기념식이 열립니다만 올해는 온통 ‘건국 60주년’을 앞세우며 광복절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습니다. 참석 인사의 면면도 전보다 제한되고 한쪽으로 치우치게 되었습니다. 이럴 때 6.15남측위원회가 가입단체의 대표들은 물론, 우리 사회의 존경받는 어른들을 많이 모시고 민간주도의 광복절 기념식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뜻깊은 일입니다.
우리는 정부주도의 건국 60주년 행사나 ‘건국 60주년’의 개념 자체를 일방적으로 규탄할 생각은 없습니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은 비록 그것이 남한만의 단독정부이고 머지않아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적인 참화의 한 당사자를 만든 것이기는 했으나, 일제 통치가 끝나고도 미 군정밖에 없던 나라에 한국 사람이 세운 정부가 들어섰다는 사실의 역사적 의의를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이 ‘정부수립’을 두고 ‘건국’이라 일컫는 것 또한 적당한 맥락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당시 ‘건국’의 주도세력 스스로가 ‘건국’이라는 말 대신에 ‘정부수립’이라는 표현을 쓰고 “오늘은 정부수립 내일은 남북통일”이라는 표어를 채택했던 취지를 우리는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단독정부를 만들면서도 이것이 불완전한 건국이라는 자괴감과 현실인식이 그들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자괴감과 현실인식이 깡그리 자취를 감춘 것이 오늘의 ‘건국 60주년’ 담론이 아닌가 합니다. 더구나 광복절을 건국절로 대체하자는 일부의 움직임에 이르면, 저들이 과연 식민지지배를 벗고 광복을 쟁취하려던 민족의 몸부림을 어떻게 생각하고 저러는가 의문이 갑니다. 혹시 일제당국처럼 광복운동을 불온시하고 8.15해방을 단독정권 수립을 위한 예비수순 이상으로 안 보는 게 아닌가 묻고 싶은 것입니다.
1945년 8월은 일제통치의 종료와 더불어 한반도의 분단을 가져왔기에 우리 민족에게 온전한 해방과 광복이 못 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의 종식으로 세계평화가 증진되고 일본제국을 포함한 세계 파시즘 세력의 패배가 확정되며 지구상 곳곳에서 식민지해방의 물결이 일기 시작한 것은 인류역사의 거대한 진전이었습니다. 우리의 광복도 비록 미흡하게나마 이런 세계사적 의미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 비추어, 통일된 독립국가 건설에 실패하고 단독정부의 생존을 위해 친일세력을 등용하며 끝내는 정권의 대대적인 부정부패로 얼룩진 대한민국의 초기 역사는 세계사의 전진적 대세에 대한 ‘역주행’의 성격이 강했음을 우리는 냉정하게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다행히도 대한민국 60년의 역사가 줄곧 역주행의 역사만은 아니었습니다. 독재적이고 무능한 이승만 정권에 대한 4.19혁명의 단죄, 좀더 유능해진 독재로 연명하던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사정권에 대한 6월항쟁의 최종적 선고, 무능과 독재에 더없이 아늑한 온상이 되는 남북대결•전쟁위험 구조를 해소해온 평화통일운동 등, 민중의 피땀어린 희생을 통해 대한민국은 조금씩 정상화의 길에 들어섰던 것입니다. 그것은 곧 꾸준한 선진화의 길이기도 했습니다.
보수세력이 자신의 전유물인양 들먹이는 한국경제의 성취도 우수하고 근면한 국민의 헌신이 그 원동력을 제공했습니다. 또한, 정권과 대기업의 부패 및 유착을 끊임없이 견제하는 민주화세력의 개입이 있었기에 드디어는 경제성장과 민주화의 동시 진행이 가능해지고 정보강국의 대열에도 진입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남북대결의 시대를 화해협력의 시대로 돌리고 휴전선의 총소리 하나에도 국민경제가 출렁이며 민심이 산란해지던 시대를 마감한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의 성과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겠습니다. 그러므로 6.15공동선언의 실천을 통해 화해•협력의 시대를 본격화하고 남북의 재통합을 수행하는 일이야말로 국내 민주화를 완성하는 길일 뿐 아니라 광복의 완성이요 건국의 완성입니다. 시야를 한반도 바깥으로까지 넓히면, 우리는 지금 동북아시아 전역에 걸쳐 조성되어 있는 긴장완화와 화해협력의 대세를 만납니다. 이 대세에 순응하며 우리 민족의 입지를 확보하는 길 또한 6.15공동선언의 실천을 떠나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새 정권은 세계적 대세에 역행하는 또 한번의 ‘역주행’을 시도하고 있는 듯합니다. 국내정치에서 저들이 ‘잃어버린 10년’으로 규정한 민주정부들의 성취는 물론, 20년 넘게 꾸준히 신장되어온 국민들의 기본권마저 독재시절로 되돌리려는 기미를 보입니다. 이와 함께 노태우 정권 이래 많은 곡절 속에 전진해온 남북 대화와 화해의 움직임에도 급제동이 걸린 상태입니다.
국내 민주주의의 후퇴가 국제적인 탈냉전의 흐름에 대한 역주행으로 이어졌던 사례는 1970년대에도 있었습니다. 닉슨의 중국방문에 이어 미국 및 일본이 중국과 수교함으로써 아시아의 냉전상태가 해소되는 기회가 닥쳤을 때, 박정희 대통령은 ‘10월유신’을 감행하고 남북대결을 강화하는 역주행을 선택함으로써 한반도가 오늘날까지도 탈냉전의 예외지대로 남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이에 맞먹는 또 한번의 역주행을 해낼 것인가? 불행 중 다행으로 저는 이 정부가 그럴 실력도 일관된 전략도 없다고 믿습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민주주의를 체험했고 긴장완화에 익숙해진 국민들이 이를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니, 최근의 촛불정국을 통해 국민은 이명박 정부의 역주행에 대한 엄중 경고를 이미 발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평화적인 의사표시로서 ‘경고’에 머물렀지 대통령의 진로나 거취를 강제하는 ‘집행’에는 미달했지만, 경고 치고는 유례가 드문 무서운 경고였고 세계 민주주의의 역사에 길이 남을 아름답고 빛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을 한때의 소나기나 기껏해야 일회성 태풍 정도로 알며 안도하고 기고만장해진다면 이 정권의 앞날은 뻔합니다. 그런데 촛불이 잠시 주춤해지자마자 옛날식 공안정국을 시도하기 바쁘고 KBS 등 공영방송 장악을 위해 군사작전을 방불케 하는 초법적 공작이 수행됨을 볼 때, 정권의 안위를 떠나 나라의 앞날이 걱정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 국민들이 정부가 설마 이럴 줄은 모르고 대규모 촛불시위를 멈춘 것은 아니라고 믿습니다. 그러지 말기를 바랐지만 얼마든지 그럴 수도 있음을 그간 정부의 거듭된 말바꾸기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현 상황과 자신들의 책임에 대한 정직한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정권이 수명연장을 꾀하던 1987년 6월 당시와는 달리, 이번에는 국민들이 합법적으로 뽑은 대통령이 초장에 하는 일이 너무 어이없고 마음에 안 들어서 국민들이 나섰습니다. 그렇다고 임기를 갓 시작한 대통령의 퇴진을 위해 실력행사로까지 나서는 일은 온당치 못하다는 인식을 대다수 국민은 공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동지 여러분.
이명박 대통령을 뽑은 우리들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이 뼈아픈 진실입니다. ‘그를 뽑은 우리들’이라는 표현이 마뜩찮을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투표소에서 누구를 찍었건 우리가 대한민국의 헌정질서 속에 살고 있는 한, 선거결과에 대한 책임을 나 몰라라 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우리 국민들도 아직 갚아야 할 업보가 있고, 저는 대다수 국민이 그 점을 직감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촛불을 든 것도 그 빚을 갚기 위해서였고, 일단 평화적인 경고로 끝낸 것도 아직은 업보가 다하지 않았음을 자인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국민들의 이런 자기절제를 우습게 보고 더 큰 민심의 징벌을 자초하는 정권이 되지 말기를 진심으로 충고하는 바입니다.
오늘날 남북관계의 난맥상도 이 정부의 근본적 반성을 요구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도 이미 저지른 실수와 과오를 바로잡기는커녕 악수(惡手)가 악수를 부르는 불행으로 치닫고 있는 듯합니다. 없는 자는 조이면 결국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게 마련이라는 오만한 착각은 점점 남측의 입장만 궁색하게 만들고 있으며, 드디어는 정부가 민간교류마저 통제하겠다는 최악의 역주행 행태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7월 11일 대통령이 국회개원연설에서 밝힌 대북관계 입장이 종전에 비해 한 걸음 진전한 바 있음을 인정하는 데는 인색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로 그 시점에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망사건이 일어난 것을 몹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비록 사건의 진상이 충분히 밝혀지지는 않았으나 유가족은 물론 남녘의 국민들이 커다란 상처를 입은 것이 분명한 만큼, 북측도 이들이 납득하고 위로를 얻을 수 있는 전향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민족끼리’의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무엇보다도 우리 당국의 강압적인 대처가 자해행위밖에 안 됨을 저는 거듭 강조하고자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남북화해협력의 상징인 금강산관광은 중단되어 재개의 전망마저 아득한 실정입니다. 그렇다고 피격사건의 공동조사 가능성이 열린 것도 전혀 아닙니다. 남북관계를 국제무대에 섣불리 들고 나갔다가 외교적인 망신만 자초했으며, 이번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이래의 공동입장 관행이 깨어지는 불상사마저 겪었습니다.
남북관계가 이처럼 막힐 대로 막혔지만 그 타개책은 의외로 간단하다고 믿습니다. 정부는 7.4공동성명 이래의 남북간 합의 모두에 대해 그 이행을 위한 협의를 이미 제안한 바 있습니다. 이제 여러 합의 가운데서도 6.15공동선언이 갖는 독보적인 의미를 정부가 인정하면 되는 것입니다. 6.15선언은 남북의 정상이 최초로 만나 직접 서명했다는 사실뿐 아니라, 그때까지의 수많은 합의가 청산하지 못했던 남북대결의 시대를 화해협력의 시대로 바꾼 분수령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 그리고 또 하나의 최고위급 합의문서인 10.4정상선언을 기본적으로 존중한다는 전제 아래 그 이행방안에 대한 협의에 착수하는 것, 그것이면 됩니다. 이럴 때 북측도 남측의 대화제의에 불응할 명분도 이유도 없을 것임을 저는 확신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 점에서도 지나친 낙관은 금물입니다. 정부가 국민에 대한 순종보다 이른바 보수결집으로 위기국면을 벗어나보려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의 길을 택하는 한, 대북관계에서도 이성적인 자세로 급격히 돌아오기는 힘들 것입니다. 이 경우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의 ‘국민적 업보’를 겸허히 시인하면서, 시달리고 고생하며 분투하여 바로잡을 것을 바로잡아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괴롭지만 그것이 곧 ‘시민참여형 통일’ 본연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경애하는 선배, 동료 여러분. 끝으로 저는 우리의 6.15운동과 남측위원회 조직에 대해 몇 마디 소견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6.15공동선언에서 평화적일뿐더러 단계적인 통일과정에 합의한 순간, 통일사업에 대한 시민참여의 공간이 확보되었습니다. 한반도의 민중은 세계 어느 곳에도 없던 역사를 창조할 기회를 갖게 된 것입니다. 이 기회를 제대로 살리자면 6.15민족공동위원회 같은 민간기구가 남북 두 당국에 버금가는 제3의 당사자로서 독자적인 경륜과 전략을 갖고 통일과정에 개입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현실적으로 아직 그것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적어도 남녘의 민간사회만이라도 그러한 자기인식과 긍지를 갖고 6.15공동선언의 실천에 나설 필요가 절실합니다.
그런데 통일운동도 6.15공동선언이 열어준 시민참여의 새 공간을 충분히 인식하며 활용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독재정권에 맞서 민간통일운동의 공간 자체를 쟁취해야 했던 숨막히는 현실은 많은 선구자들의 노고와 희생을 통해, 그리고 크게는 6월항쟁에서 6.15공동선언에 이르는 일련의 국민승리를 통해 이제는 보수정권도 온전히 복원할 수는 없는 과거지사가 되었습니다. 더구나 세상은 최근의 촛불정국으로 또 한번 바뀌었습니다. 집권세력과 일부 특권층들만이 아직 그 사실을 모를 뿐입니다. 6.15운동 또한 이런 세상의 변화에 뒤떨어지지 말아야 하며, 촛불을 들었던 발랄하고 유연하며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민들과 소통하고 융합할 수 있어야 합니다.
6.15남측위원회의 조직 또한 유연하고 다양하며 상호존중의 정신으로 채워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광범위한 상설연대기구를 지향하면서 ‘연대와 합의의 정신’에 따라 운영한다는 규약을 이미 갖고 있습니다. 이는 다양성을 포용하는 느슨한 결합을 뜻합니다. 일사불란한 조직력은 시민참여형 통일에 어울리지 않고 ‘촛불 이후’의 시대정신에도 어긋납니다. 그러나 느슨한 결합일지라도 결정적인 대목에서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공부를 하고 새로운 언어와 행동양식을 개발해나가야 할 것입니다.
6.15민족공동위원회와 6.15남측위원회는 문제도 적지 않고 현실적인 한계가 뚜렷한 조직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과 같은 남북관계의 경색국면을 맞았을 때 남과 북, 해외가 느슨하게 결합된 이런 민간연대기구의 가치를 새삼 실감하게 됩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남측위원회의 위상이 독특하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 남•북•해외의 동포들이 모두 통일의 주인이지만 6.15공동선언에 명시된 국가연합(내지 낮은 단계의 연방) 건설의 주역은 남과 북 양자일 수밖에 없으며, 현재로서는 시민참여형 통일에 필수적인 ‘제3의 당사자’ 역할에 가장 근접한 것이 남측 민간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6.15남측위원회가 남녘의 민간사회 안에서 얼마만한 영향력을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남북연합 건설사업의 주역 가운데 하나가 되겠다는 뚜렷한 문제의식을 갖고 민족대단결•민중대참여의 큰길을 찾아가는 끈질긴 노력이 요구됩니다.
광복 63주년을 기념하는 오늘의 민족통일대회가 이러한 우리의 결의를 다짐하는 자리가 되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나아가 평화와 정의를 향한 동북아시아와 인류사회 전체의 변화를 앞당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08년 8월 15일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상임대표 백낙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