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가가 아닌 수용자 대중으로서
우선 고백한다. 힙합에 미쳐 있지는 않다는 것을. 하기야 어떤 음악에 미쳐 있을 경우 그 음악에 대해 쓰기보다는 그 음악을 듣는 쪽을 선택하는 인간이므로, 나로서는 자연스럽다. 그럼에도 이런 예외적인 부연으로 글을 시작하는 건, 실은 약간의 시위이기도 하다.
대중음악 평론에서 수용자 대중은 흔히, 상업주의에 속아넘어가는 희생자이거나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대중음악 산업의 소비자라는 의심을 받곤 한다. 특히 그 수용자 대중이 여성이었을 때는 더 그렇다. ‘그루피’ ‘오빠부대’ ‘빠순이’라는 용어의 성별성과 그 단어들에 흔히 동반되곤 하는 경멸과 혐오감를 상기해보라.
이와 대조적으로, 음악에 대해 ‘말하는’ 자로서 전문적 위치를 부여받은 사람들인 ‘평론가’들은 대개 자기 자신의 사회적 위치를 드러내지 않는 글쓰기를 통해 스스로를 수용자 대중과 구별짓는다. 음악에 대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취향과 반응보다는 전문용어나 지식을 사용하여 글을 쓰고 기존의 기준들을 인준하거나 거부함으로써 수용자 대중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결국, 평론은 개인으로서 ‘느끼는’ 것이라기보다는 전문가로서 ‘분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사실 내가 힙합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수용자 개인으로서의 ‘느낌’에서 출발하는 것이어서, 이런 식의 ‘평론’은 가능하지도 걸맞지도 않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이것이 힙합의 ‘수용자’ 대중으로서 쓰는 글이라는 것을 애시당초 털어놓는 수밖에.
힙합을 듣다가 흠칫 놀라다
사실 내가 아는 힙합 뮤지션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다. 이현도, 김진표, 주석, CB Mass, 허니패밀리와 리쌍, 그리고 그 악명 높다는 에미넴 정도? 그래도 나름대로는 힙합 장르를 좋아하는 편이어서, 특별히 ‘진정한 힙합’을 찾아 매니아적으로 몰두하지는 않지만 몇몇 힙합 뮤지션들의 음반은 대개 사서 듣곤 한다. 멋진 리프(riff)와 그루브(groove) 넘치는 리듬을 귀에 꽂고 볼륨을 높이면 거리에서건 버스 안에서건 저절로 고개가 까딱거려지곤 하는 것이다.
그런데, 혹시 그들은 알까? 그들이 부르는 가사가 그렇게 까딱거리며 박자를 맞추던 한 여성팬을 어느 순간 흠칫 놀라게 한다는 걸 말이다. 그럴 때면 나는, 말하자면 ‘팬’으로서의 몰입을 면전에서 거부당한 듯한 기분이 된다.
“오늘도 우리나라 방송 최고의 쇼 프로그램엔 알리야 짭퉁이 나와 춤추고 가슴 풀어헤친 리키 마틴 짭퉁들이 호모처럼 엉덩일 흔들어 (…) 배운 건 좆도 없으니 내가 가진 무긴 오직 이 몸뚱이 하나하는 생각 속으로 한번 sex Main MC 두 번 Sex 1위 후보 구찌 까르띠에 구녕 까벌려 팔아 산 어머니 손에 끼워준 그 반지 그 사실 아신다면 얼마나 슬플까요 너희 잘 들어요 너희가 지금 손가락질하는 마약 사범 그 분 그 분보다 너가 더 더러워 1위를 위해 다리 벌리는 씨발년들” -리쌍 1집 수록곡 ‘조까라 마이싱’ 가사 中
뭐라구? 지금 뭐라는 거야? 이런 경악과 함께 흠칫 흠칫 놀라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가사를 들을 수 있는 힙합 앨범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는 얼마되지 않았다.
하기야 대중음악사를 살펴보면 사실 힙합은 처음부터 노골적인 ‘사나이’ 문화의 일부였다. “갱스터적인 폭력과 섹스광적인 허풍, 여성비하와 성의 상품화는 20년 이상 변함없는 힙합 음악의 주제였”고(양재영, 웹진 [weiv]), 여성 혐오와 동성애 혐오로 악명 높은 에미넴은 ‘당대 최고의 래퍼’로 평가된다. 영화 「8 마일」에서 보듯 흔히 힙합 음악과 문화의 정수는 ‘배틀(battle)’에 있다고 간주되며, 리듬에 맞춰 랩으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랩배틀’의 승리는 가장 재치있게 상대방을 공격한 사람에게 돌아간다. ‘마초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마초’라는 닉네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는 남성 엔지니어에게 2003년 한 대중음악평론 웹진은 “올해의 엔지니어”라는 이름표를 붙여 주었다(웹진 [가슴]).
이 모든 잡다한 사실들을 종합해보건데, 적어도 힙합이 대단히 노골적인 남성문화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여성 수용자인 나를 흠칫거리게 만드는 그 지독한 마초가사들이 그들에게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니, 문제가 안되는 것을 넘어 지극히 정상적인 힙합으로 인정되고 심지어 그러한 가사들이 기존의 것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격상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만약 가난하게 태어나 폭력 속에서 팍팍하기 짝이 없는 인생을 살아야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이 체화해버린 폭력이 양해된다면, 그 폭력의 포화를 견디어야 하는 존재들이 설 자리는 어디인가.
음악 들을 때만큼은 페미니즘 얘기 좀 안할 수 없어?
혹자는 힙합 음악에 대해 쓰면서 단순히 일부 가사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물론 대중음악 비평에서 가사에 1차적 초점을 맞추는 것은 이제 촌스러워 보인다. 가사를 표면적 의미 그대로 취급하는 것은 문제적일 수 있으며, 인기 있는 노래라고 해서 사람들이 그 가사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역시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힙합처럼 랩(rap)이 중심이 되고 그것이 대체로 의미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장르에서 가사 분석은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단지 텍스트 그 자체로서보다는 누가 무엇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는가의 문제가 연루되어 있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서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마초성을 날 것으로 드러내는 그런 랩 가사가 청자(聽者)로서 여성 수용자와 팬을 고려했다고는 믿기 어려운 일이다.
종종 어떤 사람은 제발 음악을 들을 때만큼이라도 페미니즘 얘기 좀 안할 수 없느냐고 묻는다. 이런! 어째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당신이? 음악만큼이라도 페미니즘 생각 안하며 마음 편하게 즐기고 싶은 것은 그 누구보다도 바로 나란 말이다(라고 귀에다 대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가령 성차별ㆍ인종차별ㆍ동성애자 차별을 망라한 파시스트적 가사로도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고 평단에서 별 다섯개를 받아 내는 에미넴의 노래를 들을 때, 그 놀라운 그루브와 귀에 착착 감겨드는 리프에 매혹당할 수 있는 것은 그 가사를 몰랐을 때 혹은 잊었을 때뿐이다. 그러니 나는 여전히, 힙합 앨범을 끝까지 들을 수 없다. 그리고 같은 맥락에서 나는 여전히, 힙합에 대해 끝까지 쓸 수 없다. [창비 웹매거진/20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