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과 그림의 결합
글과 그림의 결합은 오래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만화에 익숙한 우리는, 고대 이집트의 ‘사자의 서’를 비롯한 각종 기념물에서 만화적 특징을 곧잘 찾아낸다. 여기서 글은 텍스트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림의 일부로 침투하여 장식적 기능을 한다. 글이면서 동시에 그림인 것이다.
글과 그림의 결합을 통해 제3의 의미가 탄생하는 만화의 또다른 전사로 바이외 태피스트리를 들 수 있다. 이 글에서는 바이외 태피스트리를 통해 만화의 선조인 바이외 태피스트리가 글과 그림의 결합을 통해 독자의 해석 속에서 제3의 의미를 탄생시키는 것을 살펴보려고 한다.
만화의 전사(前史), 바이외 태피스트리(Bayeux tapestry)
‘바이외 태피스트리’의 글ㆍ그림에 담긴 내용은 노르만(Norman)의 잉글랜드(England) 정복이라는 역사적 사건이다. 1066년, 잉글랜드의 왕 해럴드(Harold)와 기사들은 노르만 정복자 윌리엄(William)에 의해 몰살된다. 승리자들은 근사한 그림과 함께 라틴어로 쓴 글을 자수로 새겨, 길이 70m에 폭 51c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태피스트리를 만들었다. 고대인들이 돌에 승리를 새긴 것처럼, 중세 노르만인은 아마포(亞麻布)에 승리를 기록한 것이다.
‘바이외 태피스트리’는 글과 그림이 결합함으로써 산출하는 의미의 효과에 대한 좋은 예를 보여준다. 잉글랜드의 왕 해럴드의 죽음에 대한 전설이 하나 있다. 정복자 윌리엄의 궁수들이 날린 화살이, 해럴드왕의 눈을 맞추었다는 전설이다. 어딘지 오이디푸스를 연상시키기도 하고, 아무튼 상상력에나 말초신경에나 두루 자극적인 이야기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어떤 역사적 기록에도 씌어있지 않다고 한다. 그럼 어디서 나온 이야기인가? 학자들은 이 이야기의 유래를 ‘바이외 태피스트리’에서 찾는다. 그러나 태피스트리 어디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는 걸까? 글과 그림 중 과연 어느 쪽에?
먼저 태피스리트에 씌어진 글에서는, 이 인상 깊은 이야기를 찾을 수 없다. 다만 “해럴드왕이 죽다”라는 문구만이 있다고 한다. 해럴드가 죽다. 어떻게? 글만 가지고는 알 도리가 바이없다. 그러면 그림을 보자. 죽어가는 수많은 기사들 사이로, 눈에 화살을 맞고 쓰러지는 한 사나이의 모습이 보인다. 그럼 해결된 것일까? 아니다. 그가 해럴드란 근거가 없다. 지극히 평범한 갑옷을 갖춘 그는, 그림 속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죽어가는 기사 가운데 하나일 따름이다. 눈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누가? 이 역시 그림만으로는 더이상 알 방법이 없다.
누가 해럴드의 눈에 화살을 쏘았나
자, 그렇다면 ‘바이외 태피스트리’의 어디에, 해럴드의 눈에 화살이 꽂혔다는 이야기가 있는가? 글에도 없다. 그림에도 없다. 결국 글도 그림도 아닌 제 3의 영역에 그 이야기가 존재한다. 우리는 바로 여기서 글과 그림이 결합하여 전혀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을 본다. 해럴드의 죽음을 알리는 글 바로 아래에, 공교롭게도 눈에 살을 맞고 죽어가는 사내의 그림이 있었던 것이다.
천년 동안 사람들은 글에 나오지 않은 해럴드의 사인을 그림에서 찾고, 그림에 나오지 않은 죽은 자의 신원을 글에서 찾아왔다. 얄궂게도, 오늘날 어떤 학자들은 눈에 화살을 맞은 기사의 옆에서, 칼에 맞아 쓰러지는 사나이가 진짜 해럴드일 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누가 해럴드의 눈에 화살을 쏘았나? 정복자 윌리엄은 칼로 해럴드를 죽였다고 한다. 그럼 화살로 해럴드를 죽인 것은? 바로 독자인 우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글과 그림을 연결하고 제3의 의미를 생산하는 해석을 수행한 것이 독자이기 때문이다. 해럴드의 눈에 화살이 꽂힌 사연은, 글과 그림이 결합하는 한 방식, 글과 그림이 전혀 다른 의미의 영역을 만들어 내는 것. 글과 그림이라는 이질적 요소끼리 모순과 긴장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열어 내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만화의 본질은 이와 다르지 않다. [창비 웹매거진/20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