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물게 찾아온 걸작
누군가가 필자에게 최근 개봉영화들 가운데 추천작을 골라달라고 요구한다면 세 편의 영화를 꼽고 싶다. 참으로 오래 기다려왔던 자끄 리베뜨(Jacques Rivette)의 「알게 될 거야 Va Savoir」(2001), 가장 놀라운 데뷔작 가운데 하나라는 평을 들었던 「처녀자살소동 The Virgin Suicides」(1999)의 쏘피아 코폴라(Sofia Coppola)가 선보이는 두번째 영화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 Lost in Translation」(2003), 그리고 마지막으로 벨기에의 다르덴(Dardenne) 형제가 만든 「아들 Le Fils」(2002)이 내가 추천하고 싶은 세 편의 영화이다.
그런데 굳이 이 영화 가운데 하나만을 골라야 한다면 단연「아들」을 선택하겠다. 이 영화는 정말이지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걸작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네 개의 눈을 지닌 한 사람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다르덴 형제의 이력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형인 장 삐에르(Jean-Pierre)는 1951년생, 동생인 뤽(Luc)은 1954년생인데 벨기에 태생인 그들은 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 벨기에 내의 파업과 노조운동, 남부지방에서 있었던 나찌 레지스땅스 운동 및 폴란드인들의 이민문제 등에 관해 60여편 이상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극영화 데뷔작은 1986년에 발표된 「잘못된 Falsch」이지만 이들이 국제적으로 주목받게 된 실질적인 데뷔작은 이민자 문제를 다룬 「약속 La Promesse」(1996)이라고 할 수 있다. 1999년에 발표한 「로제타 Rosetta」를 통해 깐느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그들은 영화에 관한 태도와 문제의식이 전혀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 「아들」로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다져놓았다. 다르덴 형제는 스스로를 두고 “우리는 네 개의 눈을 지닌 한 사람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영화의 윤리학자
혹자는 다르덴 형제를 일컬어 “현대의 기적”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들의 영화는 벨기에 노동계급의 삶에 대한 치밀하고 현미경적인 묘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영국의 좌파감독 켄 로치(Ken Loach)를, 인물에 극도로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몸짓과 표정에 천착함으로써 정서적 변화를 미묘한 떨림에 이르기까지 고스란히 포착해내는 핸드헬드 촬영기법(카메라를 삼각대에 세우지 않은 채 직접 손에 들고 찍는 촬영방식)을 고집한다는 점에서는 미국 인디영화의 전설 존 카사베츠(John Cassavetes)를 떠올리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다르덴 형제는 폴란드의 영화감독 크쥐쉬토프 키에슬롭스키(Krzysztof Kieslowski)가 우리 곁을 떠나간 이후 그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고전적이지만 여전히 유효한 윤리적 물음을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는 영화의 윤리학자로 간주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우리에게 두가지 윤리적 질문을 동시에 던진다. 하나는 카메라와 대상 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포르노그래픽한 예술이다. 카메라를 통해 대상을 이해하려 드는 순간 불가피하게 대상에 가해지는 가학적이고 물신적인 요소들이 있다. 다른 한편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무엇보다도 인물이 중심이 되는 영화다. 영화는 인물들을 둘러싼 가혹한 환경을 보여주지만 그것은 사회학적 분석이나 비판, 성격과 환경의 상관관계 따위를 묻기 위해 도입된 것이 아니다. 카메라는 다만 인물들이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는 태도를 호기심어린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그리고 그 시선이 바야흐로 리얼리즘 영화의 포르노그래픽한 시선에 의해 대체되려는 찰나 우리는 영화 속 인물에게 주어진 난처한 선택의 상황 속으로 함께 끌려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런 선택의 순간에 우리는 다르덴 형제가 두번째 윤리적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질문은 이제 카메라와 대상의 관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한 인간과 다른 인간의 관계에 관한 것이다. 다르덴 형제는 영화의 포르노그래픽한 속성을 미끼로 삼아 삶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보편적인 윤리적 문제로 관객들을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 과정은 또한 카메라와 대상 간의 관계를 우회적으로 질문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신이 사라진 세상에서 계명은 가능한가?
다르덴 형제가「아들」 이전에 발표한 「로제타」는 켄 로치의 「케스 Kes」(1969) 혹은 로베르 브레쏭의「무셰뜨 Mouchette」(1969)를 카사베츠의 손길로 다시 만든 것 같은 믿을 수 없는 영화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우리는 주인공 소녀 로제타가 직장에서 해고되는 것을 보게 된다. 도시 외곽의 트레일러에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그녀에겐 일자리가 절실하다.
그러나 함께 사는 그녀의 어머니는 잠자리를 같이 할 남자를 찾는 데만 혈안이 된 알콜중독자이다. 급기야 그녀는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소년을 죽여서라도 직장을 얻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고민하는 상황에까지 처하게 된다. 결국 소년이 저지른 부정을 그가 일하는 와플가게 주인에게 고자질함으로써 로제타는 소년의 일자리를 대신 차지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로제타는 그런 자신이 혐오스럽다.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트레일러 안에서 가스중독으로 자살하려 시도하지만 가스가 떨어지는 바람에 그것마저도 실패하고 만다. 트레일러 캠프촌 주인에게 새 가스통을 사서 들고 걸음을 옮기는 로제타의 모습을 바라보는 건 정말이지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영화의 마지막, 소년이 로제타를 찾아오고 로제타는 그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다. 여기서 다르덴 형제가 제기하는 윤리적 물음은 무척이나 간단한 것이다. 남을 해하고서라도 목숨을 이을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실존의 고귀함을 지킬 것인가. 삶에서 몸으로 맞닥뜨리는 체험의 문제가 될 때 이 질문이 얼마나 과중한 무게를 지니게 되는가를 다르덴 형제는 서두르지 않고 냉정하게 보여준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일견 진부한 것처럼 보이는 이런 물음이 우리를 짓누르는 존재론적 실재로서의 윤리의식을 요구하고 있을 때 그러한 질문과 요구는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강력한 선언처럼 보인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현대영화에 나타난 고전적 비극작가들이며 이제는 거의 불가능한 듯 여겨지는 칸트식 정언명령의 유효성에 관한 숙고자들인 셈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적 질문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 생각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신이 사라진 세상에서 계명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종교적 측면이 거세된 윤리적 명령으로서의 토라(Tora)를 상상할 수 있을까?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십계명 가운데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관한 계명-다섯번째 계명에서부터 마지막 계명에 이르는-에 대한 거의 모든 위반이 제시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노동의 시간, 침묵의 연습
다르덴 형제의 「약속」이나 「로제타」를 본 이들에게 「아들」의 기나긴 도입부는 참으로 수상쩍은 것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소년원을 갓 출감한 아이들을 모아 목공일을 가르치는 올리비에에게 어느 날 한 소년이 찾아온다. 그는 소년을 자신의 제자로 받아들이길 거부한 뒤 불안한 시선으로 남몰래 소년의 뒤를 쫓는다. 일은 손에 잡히지 않고 머릿속은 온통 소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올리비에가 보여주는 태도는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데 생각하기에 따라 다르덴 형제가 중년남성의 성정체성 발견에 관한 퀴어영화를 찍은 것은 아닌가 하고 여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영화가 시작한지 30분이 지나서야, 정확하게는 올리비에가 이혼한 아내 마갈리를 찾아가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순간이 되어서야 모든 사정을 알게 된다. 그 소년, 프란씨스라는 이름의 소년은 바로 몇년 전 올리비에의 아들을 죽였던 살인범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들」의 초반 30분간 올리비에가 보여준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영화를 두 번, 세 번 거듭해서 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영화의 두번째 씨퀀스에서 올리비에는 마갈리의 방문을 받는데, 그녀가 그를 찾아온 것은 자신의 재혼계획 및 임신사실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올리비에는 처음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그녀가 차를 몰고 돌아가려고 하자 집을 뛰쳐나가 그녀에게 묻는다. “왜 하필 오늘 날 찾아 온 거지?” 그녀는 단지 산부인과 의사가 확실하다고 말할 때를 기다렸을 뿐이다. 하지만 올리비에에겐 모든 것이 운명의 장난, 혹은 계시처럼 여겨진다. 아들을 죽인 프란씨스가 그날 아침 자신에게 왔고 때마침 아내는 임신사실을 알리러 그를 방문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은 올리비에의 아들이 프란씨스에게 살해당한 바로 그날일지도 모른다. 올리비에는 곧바로 직장에 전화를 걸어 프란씨스를 자신이 맡겠다고 말한다.
이후부터 영화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만난 두 사람이 사제관계로, 그리고 의사-부자관계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 모든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올리비에의 목공교습소에서 벌어지는 훈련과 노동이다. 다르덴 형제는 인물들이 무언가의 치수를 재고, 그것을 나르거나 자르고, 못으로 박는 과정을 지루할 만큼 꼼꼼하게 보여준다. 장인적 기술을 가르치고 익히는 과정은 말없는 숙고의 시간으로 자리매김된다. 영화 말미에 올리비에가 취하는 용서의 태도를 우리가 납득할 수 있게 되는 것은 그 어떤 언어적 설득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이 노동의 시간 속에서 주어지는 침묵의 연습을 통해서이다.
사려 깊은 세상에 몸을 담근
어쩌면「아들」은 복수극으로 끝났을 수도 있는 영화이다. 하지만 다르덴 형제가 복수를 선택하지 않은 것은 「로제타」를 소녀의 자살로 끝맺지 않은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다. 그들의 영화는 동시대를 알레고리로 삼아 고전비극의 시간을 탐색하는 영화가 아니라 고전비극 인물들의 도덕적 갈등을 빌려 동시대에 발언하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는 정확한 대상 없이 세상을 향해 분노를 난사하는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 Dogville」(2003)이나 구스 반 싼트의 「엘레펀트 Elephant」(2003)가 보여주는 위험한 도그마보다 훨씬 사려 깊은 세상에 몸을 담그고 있다.[창비 웹매거진/200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