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날의 문화기행
안타깝게도, 창비의 제5회 문화기행 출발 하루 전날 밤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문화기행은 언제나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날씨의 축복 아래 진행되었다는데 말이다. 꼬박꼬박 우산을 챙겨야 하는 문화기행은 예상하지 못한 일이라 내 심기는 잔뜩 불편했다.
맑은 날씨를 기대하며 챙이 넓은 모자까지 준비했던 나는 한숨을 쉬며 목적지인 영월을 향해 달리는 차창 밖을 쳐다보았다. 빗방울과 성에에 뿌옇게 흐려진 창은 바깥 풍경을 아주 효과적으로 가려주고 있어, 마치 달리는 온실 안에 갇힌 기분이었다. 때마침 창비 관계자분들이 김밥과 음료수를 나누어주기 시작했다. 아직 온기가 있는 공짜 도시락을 받는 순간 우울했던 마음이 확 밝아졌다. 비는 둘째 치고 위장이 쪼그라들 정도로 몹시 출출했던 것이다. ‘역시 창비는 좋은 회사야. 아무렴.’ 나는 다진 소고기가 들어간 김밥을 열심히 삼키며, 이번 기행에 무조건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하자고 다짐했다.
첫번째 목적지, 영월 책박물관
첫번째 목적지인 영월 책박물관에 들렀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풀밭으로 변한 운동장이었다. 한때는 흙먼지 날리며 아이들이 뛰고 굴렀을 운동장엔 파릇파릇한 풀들이 손바닥만한 틈도 보이지 않고 빽빽하게 우거져 있었다. 비에 젖은 철봉 아래도 어김없이 녹색식물이 자리잡았다. 자연은 인공적인 모래바닥을 소박한 정원으로 가꾸었고, 한 고서적상은 버려진 교실 칸칸을 평생 모아온 수천권의 책으로 채워넣었다.
벌써 5년째 박물관을 꾸리고 있다는 관장 박대헌 씨의 정성스런 손길이 느껴지는 전시품 중 단연 눈길을 끈 것은 송광용 씨의 만화일기였다. 만화가를 꿈꾸던 중학교 시절부터 40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한 수십권의 일기책들이 유리박스 안에 가득 펼쳐져 있었다. 때론 정성스럽게, 때론 마구 휘갈긴 듯한 필체와 그림에서는 한 개인의 삶의 애환과 꿈, 희망과 좌절이 오롯이 느껴졌다. 매일 밤 그로 하여금 고단한 몸을 이끌고 하루를 기록하게 한 힘이 무엇이었을지 생각하자 가슴이 먹먹했다. 영월 책박물관을 빛나게 하는 것은 오랜 시간을 묵은 책들이 아니다. 그 책을 만든 사람의 혼, 그것이다. 누렇게 바랜 책이 빼곡히 들어차 있는 교실에서 박대헌 관장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데 마음이 괜히 심란했다. 예스런 혼이 가득한 방에 그를 홀로 남겨두고 가는 것만 같아서. 운동장, 아니 풀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놓인 길을 밟아가다, 나는 클로버를 한 잎 따 수첩 사이에 끼워넣었다.
적멸보궁 정암사와 만항재

만항재(출처:http://ozikorea.tistory.com/776)
창비 문화기행의 든든한 길잡이 김효형 씨는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 그는 때때로 사람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 후 그 땅과 물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비를 실은 바람이 그의 목소리를 갈기갈기 찢었지만 듣고자 하는 사람들의 열망까지 흩뜨려놓진 못했다. 몇백년 묵은 주목의 무성한 가지 아래서 그가 들려준 신라시대 자장율사(慈藏律師)가 부처의 진신사리를 얻어와 절을 세운 이야기는 게으른 내 귀까지 쫑긋 세울 정도로 흥미로웠다. 과거 석탄단지로 유명했고 지금은 거대한 카지노가 들어선 정선 지역에, 진흙 속의 연꽃처럼 깨끗하고 단아하게 들어앉은 정암사(淨岩寺)는 자장이 마지막으로 짓고 입적한 적멸보궁(寂滅寶宮)이다. 부처의 ‘몸’을 모신 적멸보궁은 모두 그렇듯 정암사에도 부처의 상(像)이 없다. 그러나 1,300년이 넘도록 빈 방석만 놓여 있는 수미단(須彌壇)을 마주보고 있노라니 더 큰 부처의 형상이 가슴 가득 치고 들어오는 듯했다.
부처의 사리가 봉인돼 있다는 수마노탑(水瑪瑙塔)에 오르며 사람들은 절로 말을 잃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는 경내뿐 아니라 사람의 마음도 함께 적시는 듯했다. 탑에 오르자 정암사의 정갈한 모습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땅 밑으로 곤두박질치듯 포개진 산자락에 들어앉은 정암사의 전경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지금은 길이 닦여 누구라도 쉽게 들어올 수 있지만, 천 년 전 이곳은 한반도에서 가장 기운이 좋은 곳, 길한 곳, 은밀한 곳이었을 것이다. 자장이 죽으며 땅에 박았다던 그의 지팡이는 벌써 어엿한 나무가 되었다. 하지만 자장은 그가 예언했던 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돌아왔는데도 우리가 알아보지 못했거나.
정암사를 떠나 곧장 향한 곳은 우리나라에서 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고갯길이라는 만항재(晩項嶺)였다. 이쯤 되자 사람들도 이젠 서로 낯이 많이 익어서 곳곳에서 웃음소리와 유쾌한 말소리가 터져나왔다. 누군가 맑은날 밤 만항재에 오르면 이마 위로 쏟아질 듯한 별이 참 장관이라고 했다. 그 말에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빗방울만 얼굴 위로 선득선득 떨어졌지만, 더이상 비에 대해 싫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빗방울을 머금은 바람이 쉼 없이 빗질하는 풀숲을 어린애처럼 펄쩍 펄쩍 뛰어 들어가자 놀란 여치와 메뚜기들이 사방에서 뛰어올랐다. 비만 오지 않았다면 풀 위에 누워도 보았을 텐데. 하지만 정말로 드러누웠다간, 영영 일어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 글은 2004년 6월 19일부터 20일까지 1박 2일 일정으로 『창작과비평』정기구독자분들과 함께한 제 5회 ‘작가와 함께 떠나는 창비 문화기행’에 참가하신 송화진님이 쓰신 글입니다-편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