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 오후 네 시는 이상하다
예전 같으면 어떤 책을 옆구리에 끼고 산책을 나갔을까. 아마 프랑스나 독일의 시인들 시집이었을 것이다. 집에서 천변까지는 오분 정도 거리다. 543 버스 종점 담벼락에 텁석부리 할아버지가 좌판을 벌여놓고 구두를 팔고 있다. 한 켤레에 만원이란다. 이사올 때 그곳에는 팔로 한아름이던 느티나무가 서 있었다. 그 느티나무가 담벼락에 뿌리를 내려 지금은 베어진 지 오래다. 할아버지는 밑둥만 남은 느티나무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다. 543 종점 횡단보도 건너가 천변이다. 장마철이 되어야 물이 흐르는 천변 위로 내부순환도로가 뻗어 있다. 운동 나온 동네 사람들이 경보 선수들처럼 천변을 걷는다. 개나리가 도로 밑 축대에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봄날의 오후 네 시는 이상하다. 땅을 향해 줄줄이 내려와 있는 개나리꽃에 스민 봄빛이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다. 예전 같았으면 저 풍경을 보고 ‘도시 천변의 비애’ 운운하는 이미지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개나리를 바라보며 걷는데 그 속에서 기타소리가 흘러나온다. 한 청년이 축대와 도로를 잇는 철제계단에 앉아 조용필의 ‘사슴’을 구성지게 불러제낀다. 개나리꽃 속에 파묻힌 청년의 노래가 봄빛 속에 떠나버린 여인의 실루엣을 떠올릴 때처럼 부옇다. 나는 찬찬히 읽으려고 한동안 잊고 있었던 『몽골 현대시선집』을 옆구리에서 꺼내든다. 그리고 천변에 나란히 박혀 있는 쉼돌에 앉아 페이지를 열어본다. 뒤에서 청년의 기타가 퉁겨내는 봄빛이 천변의 마른 자갈에 어른어른거린다.
범람한 강을 맨발로 건너고
소가 있는 우리에서 홀로 잠자며,
밤낮의 시간을 잊은 채
외로운 홀씨처럼 떠돌고 싶다!
「자유」부분 (이스.돌람)
대평원처럼 넓은 시
몽골 시인들의 시는 그들이 사는 대평원처럼 넓고 시야는 활짝 열려 있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 본능적으로 자애를 발견해낸다. 가령 위 시를 쓴 시인의 「경주마의 눈」 같은 시는 온 힘을 다해 달리는 것을 본능으로 갖고 있는 말의 정기와 그 신비함을 눈 속에 집약해낸다. 뽀오얀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는 경주마의 눈에서 생동하는 자애가 드넓게 펼쳐진다. “사라진 하나밖에 없는 새끼와/만날 것을 생각지도 못하고 있을 때/새끼가 건강하게 살아서 돌아오면/무엇에 잘 놀라 소리치는 어미는/그렇게 열렬해진다.”(「경주마의 눈」부분, 이스.돌람) 나는 페이지를 덮고 물끄러미 천변을 바라본다. 어느새 청년의 기타소리와 애절한 노래는 들리지 않는다. 발을 담글 물 한방울 남아 있지 않은 천변에 나는 ‘외로운 홀씨처럼’ 그냥 그렇게 떨어져 있다.
그런 적이 있긴 했다. 며칠을 비가 퍼붓던 어느 여름밤이었다. 종로와 청진동 해장국집을 떠돌며 술을 마시다가 소설가 B와 C가 새벽에 우리집까지 왔다. 술에 취한 C가 창문을 드르륵 열더니 창턱에 올라앉아 퍼붓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물었다. 그는 한참을 미동도 않고 있더니 비에 젖고 싶다며 밖으로 나가자고 했다. 우리는 곧장 천변으로 갔다. 천변은 범람해서 길이 어디고 강이 어딘지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저쪽 공중에서 떨어져내리는 거센 불빛이 보였다. 내부순환도로의 물받이 홈통에서 쏟아지는 폭포수였다. 우리는 적막한 공중 도로의 불빛이 물과 섞여 떨어지는 풍경에 압도되었다. 아무리 퍼붓는 비를 맞아도 우리는 술이 깨지 않았다. 내가 먼저 그 폭포수 아래로 들어갔고, 그 순간 세계는 물이 빛이 되거나 빛이 물이 되었다. 차례로 B와 C가 그 거센 세례 속으로 사라져가자, 우리의 기도는 머리가 얼얼해질 정도의 물줄기 속에서 완성되었다. 그렇게 취해서 범람하는 자유.
예술적 기교로 겹겹이 층져 있는 산
홍제동 인왕산 쪽으로 천천히 걷는다. 천변 건너편으로 인왕산 줄기인 듯싶은 화강암 바위산이 보인다. 이 길을 한 시간쯤 쭉 걸어 올라가면 천변은 끝나고 그 위를 도로가 덮고 있다. 그 아래 무수한 교각과 암흑으로 고여 있는 커다란 물웅덩이가 있다. 그 너머에 강가에 세워진 흰부처를 모시는 절이 있다. 하천 공사를 하기 전인 옛날 옛적에는 흰부처의 발목까지 적셨다는 치맛주름 같은 강물. 상상으로 그 강물을 떠올리며 천변을 따라 걸어 올라가다가 마주친 무시무시한 어둠과 공포. 그래, 오늘은 거기까지 올라가지 말자. 우리 동네 최고의 절경은 저 바위산이다. 가을이 되면 아무렇게나 책을 쌓아올린 것 같은 바위산에 단풍이 곱다. 그리고 유독 그 아래만 오랜 동안 물이 마르지 않고 찰랑거린다. 바위산 옆에는 울타리 안에 꽃이 가득 핀, 키다리 아저씨가 사는 집이 있다. 한번은 저물 무렵 그 집을 기웃거리는데 아저씨가 인기척을 느끼고 대문에 나와 “이 집 안 팔아요”하고 지르는 소리를 들은 적도 있다.
나는 천변 바닥으로 뛰어내려 그 집 쪽으로 건너간다. 그 집과 바위산 사이에 작은 오솔길이 있다. 딱 한번 그 길로 접어든 적이 있는데 날이 어두워 금방 포기하고 말았었다. 산길을 10여분쯤 올라가자 넓은 평지가 나타나고 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휴일을 맞아 가족들과 연인들이 피크닉을 즐기며 놀고 있다. 아, 우리 동네에 이런 데가 있었구나.
한국의 산
흥미롭다.
나라의 행복이
산에는 있는 듯.
완전한 예술적 기교로 겹겹이 층져 있는 산.
나라의 고통을
짊어지고 있는 것 같다.
산에는 죽은 이들의 무덤과 십자 모양의 비석……
위용 있게 서 있는 커다란 바위는 없지만
그림자도 있고 또 빛도 있는
한국의 산
특이하다.
「한국의 산」부분 (체.다욱도르찌)
‘행복’과 ‘고통’을 겹겹이 층져 올려
몽골 시인의 눈으로 보는 ‘한국의 산’이 새롭다. 그 시인의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너무나 익숙해서 그러려니 하고 말았던 산길에 “무지개처럼 보이지도 않고, 어둠침침해 보이지도 않는” “꿈같이 삐쭉삐쭉하기도 하고/꿈이 아닌 사실처럼 나지막한” 그림자와 빛들이 있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 휴일의 저무는 산속에서 ‘행복’과 ‘고통’을 겹겹이 층져 올려 “완전한 예술적 기교”로 놀고 있다. 저무는 봄빛 속에서 산속 평지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음식을 먹는 가족들이 어둠침침하지만 무지개 같다.
올라간 반대쪽으로 산길을 내려오자 이번엔 생태 공원이 펼쳐진다. 바람이 혀로 핥고 간 듯한 우리 동네 최고의 절경 안에 그런 또 다른 절경이 숨어 있었는지 그동안 왜 몰랐을까. 캄캄한 가시덤불에 온몸을 긁히며 한참을 걸은 후에 멋있게 지어져 있는, 숨어 있는 비밀의 성을 발견한 느낌이다. 그 안으로 인도해줄 것 같은 나무계단과 그 순간을 위해 피어난 듯한 꽃들. 친절하게도 모두 이름표를 달고서 ‘곧 질지 모르니 저 좀 많이 봐두세요’ 말하는 것 같은 저 봄꽃들.
날이 어두워져서도 한참을 떠 있는 빛 속에 다시 543 종점이 나타난다. 텁석부리 할아버지가 좌판의 구두를 정리하고 있다.
고려국에 가니
신발이 많은 것들을 이야기한다.
신은 주인들의
얼굴과 모습을 말한다.
잘사는 것, 힘들게 사는 것
깃을 단 것, 날 듯한 것.
오늘은 어떤 모습으로 다니는지를
신발은 이야기한다.
음식점에 들어가자
쌍쌍의 신발들이 보기 좋게 단정히 놓여 있고,
가죽이 딱딱해 끼는 신발도
높은 목을 위로 헤죽이 벌리고 놓여 있다.
삶이라는 험한 바윗길에
닳고 약해진 신발도 눈에 띄고,
사랑이라는 바윗길을
오르는 것도 보인다.
「신발」부분 (체.다욱도르찌)
지루할 수 없는 세상의 빛
집에 돌아와 다시 페이지를 후루룩 열어보다가 이 시에 눈길이 멈춘다. 전통가옥인 ‘게르’에서 생활하는 몽골인들은 구두를 벗지 않고 생활하는 습속이 있다고 한다. 그런 몽골 시인이 한국을 방문하여 음식점에 갔을 때, 신발을 벗고 방에 들어앉아 음식을 먹는 광경은 매우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시인은 벗어놓은 신발을 통해 그 신발 주인들의 삶을 어린아이 같은 상상력으로 바라보고 있다.
휴일의 산책은 이렇게 끝났다. 내가 왜 산책길에 프랑스나 독일의 시인이 아닌 몽골시인의 시들을 읽었는지 그 이유도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지금의 나는 잃어버리고 있는 것이 있다. 굳이 헬렌 니어링(Helen Nearing)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삶을 살고 싶다면 흙을 밟을 기회를 스스로 만들고 흙의 호흡을 느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곳의 교각과 도로로 뒤범벅된 작은 우리 동네에서 내가 잃어가고 있는 무엇을 회복하고 싶다. 나는 이제 ‘신발’로 상징되는 이 도시의 층층이 겹쳐 있는 삶을 수용하면서, 자연을 회복하는 길이 무엇인지 또 다른 산책길로 접어들어야 할 것이다. 그곳에 “지루할 수 없는 세상의 빛”이 있다. [창비 웹매거진/20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