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OR
  • ENG
  • 사이트맵
  • 블로그
  • 창비교육
  • 창비학당
  • 미디어창비
  • 검색
    • ID/PW찾기
    • 회원가입
    • 로그인
창비 – Changbi Publishers

Main menu

콘텐츠로 바로가기
  • 도서
    • 전체 도서
    • 새로 나온 책
    • 수상도서
    • 추천도서
    • 전자책
  • 저자
  • 계간 창작과비평
  • 창비어린이
    • 창비어린이 홈
    • 계간 창비어린이
    • 새소식
    • 도서 목록
    • 어린이/청소년 독서활동 자료
    • 빅북
    • 책씨앗
    • 커뮤니티
    • 공모
  • 커뮤니티
    • 팟캐스트 라디오 책다방
    • 독자통신
  • 문학상 및 작품공모
    • 단행본 투고 안내
    • 만해문학상
    • 백석문학상
    • 신동엽문학상
    • 창비장편소설상 공모
    • 창비신인문학상 공모(시/소설/평론)
    • 계간 ‘창비어린이’ 원고모집
    • 어린이-청소년 관련 공모
  • 이벤트
    • 독자 행사 정보
    • 행사/이벤트 후기
    • 당첨자 발표
  • 고객센터
    • 자주 묻는 질문
    • 1:1 문의하기
    • 도서관을 위한 One-Stop 상담
    •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공지사항
  • 창비 소개
  • 계간 창작과비평 (구)
    • 계간 창작과비평 소개
    • 편집위원
    • 정기구독 안내/신청
    • 전자구독이란?
    • 정기구독자 게시판
    • 창비주간논평
Home>커뮤니티

[대화] 정호승 시인과의 대화 / 정호승ㆍ안병률

2004.06.01커뮤니티 > 창비웹진 > 대화對話
  • 작게
  • 크게
  • 인쇄
  • 목록

지난 5월 25일에 정호승 시인의 여덟 번째 시집 『이 짧은 시간 동안』이 창비에서 간행되었습니다. 시집의 간행을 계기로 창비 웹진은 정호승 시인의 근황과 새 시집을 펴낸 소감, 그리고 이번 시집의 시세계를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이메일 인터뷰를 기획하였습니다. 정호승 선생의 신작 시집과 시세계를 궁금해하셨을 독자들에게 작은 보탬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편집자.

 

인터뷰 및 정리: 안병률(창비 문학출판부 편집자)

 

 정호승 시인

정호승 시인

안병률 신간 시집 『이 짧은 시간 동안』(창비 2004)을 펴내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비 1999) 이후 5년 만의 시집이며 선생님의 여덟 번째 시집인데요, 선생님께서는 지난 5년 동안 전혀 창작을 못하시다가 최근에 한꺼번에 시가 터져나왔다고 「시인의 말」에서 말씀하셨는데, 그간의 정황과 새 시집에 대한 소감을 여쭤보고 싶습니다.

 

정호승 지난 5년 동안 시를 한편도 못 쓴 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직접 쓰는 행위를 하지 못했다 뿐이지, 시를 쓰기 위한 전 단계인 메모 작업은 쉬지 않고 해왔습니다. 늘 바지 호주머니 속에 넣어둔 종이조각에다 시를 만날 때마다 메모를 했으며, 그 메모를 디스켓 속에 꼭꼭 저장해놓았습니다. 그러니까 한꺼번에 시가 터져나왔다고는 볼 수 없고, 그 메모들을 열심히 정리한 결과물이 이번 시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메모만 하고 시로 전환하지 못하고 있던 수년 동안 문예지에도 시를 전혀 발표하지 못했지만 그건 ‘침묵’한 것은 아닙니다. 혹시 남의 눈에 ‘침묵’으로 비쳐졌다면 그건 몇년 동안 메모만 하다가 어느 해 어느 기간 동안 한꺼번에 몰아서 시를 쓰는 저의 나쁜 시작 습관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메모를 많이 했다 하더라도 시화(詩化)하지 않으면 그 메모는 늘 휴지조각에 불과하더군요. 시인이 시집을 내는 일이란 언제나 신에게 축복을 받은 것 같은 큰 기쁨인데, 이번에는 더 큰 축복을 받은 듯합니다.

 

처음 시를 쓰고 접한 계기

 

안병률 선생님을 처음 뵙고 받은 인상은 ‘영원한 문학청년’ 같다는 것인데요. 선생님이 처음 시를 쓰고 접한 계기, 그리고 치열했을 습작시절에 관해 듣고 싶습니다.

 

정호승 ‘습작시절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저에게는 아직도 유효합니다. 갈 길은 먼데 살아갈 시간은 자꾸 줄어들고 몸과 마음이 따라주지 않으니 더욱더 열심히 시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시를 쓰게 된 건 중학교(대구 계성중) 2학년 때 국어선생님이신 김진태(일제강점기 때 『만선일보(滿鮮日報)』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당선) 선생님께서 시를 써오라는 숙제를 내셔서, 그 숙제를 해가서 칭찬을 받은 게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구 대륜고 시절엔 문예반 활동을 했으며, 경희대에 문예장학생으로 입학해서는 문단에 등단하면 지급되는 장학금을 계속 받으려고 마치 고시 공부하듯이 신춘문예 준비를 참 열심히 했습니다. 군에 입대해서는 보초를 서면서도 시 생각을 하곤 했는데, 결국 군 복무중에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죠. 2학년으로 복학해서는 미팅도 한번 못해보고 대학 도서관에 처박혀 읽고 싶은 책 읽으면서 시만 자꾸 썼습니다. 누구나 그렇듯 지금 생각하니 저도 그 시절이 그립습니다.

 

특히 매료된 선배 문인이나 사사한 스승은

 

안병률 그러시군요. 대학시절 특히 매료되신 선배문인이나 사사하신 스승이 있다면 어떤 분이신가요? 동학으로 현재도 활동하고 교유하시는 분들도 좀 소개해주시죠.

 

정호승 김수영(金洙暎)과 서정주(徐廷柱)를 먼저 꼽을 수 있습니다. 김수영 시인한테서 인간의 현실적 삶이 야말로 시의 토양이자 뿌리라는 것을 배웠다면, 서정주 시인한테서는 전통적 시의 서정과 음률을 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군에서 졸병생활을 하면서도 김수영 시집 『달나라의 장난』(춘조사春潮社 1959)을 늘 지니고 다녔으며, 『서정주시선』(정음사正音社 1955)은 시집 조판 그대로 직접 노트에 베껴 늘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김현승(金顯承) 시인에게 매료돼 일등병 첫 휴가 때에는 숭실대에 재직중이시던 선생을 찾아뵙기도 했습니다. 손수 커피를 끓여주시면서 열심히 노력하라고 격려해주시던 선생의 따뜻한 모습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경희대에는 시에 조병화(趙炳華), 소설에 황순원(黃順元) 선생이 계셨는데, 두 분의 강의를 들으며 문학이란 성실한 마음으로 평생 열심히 하는 일이라는 것을 배우게 되었지요, 특히 황순원 선생을 통해서는 문학 공부를 하는 사람의 삶의 태도와 자세에 대해 배운 바가 큽니다. 동학으로 교유하고 있는 경희대 출신 문인들과는 일찍이 ‘황순원 선생을 좋아하는 모임’을 만들어 일 년에 서너 차례 보신탕 집에서 모이곤 했어요. 선생께서 세상을 떠나시고 나서도 가끔 만나는데, 시보다 소설과 평론 쪽 인원이 훨씬 더 많습니다.

 

시의 불황과 위기에 관하여

 

이 짧은 시간 동안

이 짧은 시간 동안

안병률 문학의 위기와 문학시장의 불황에 대한 얘기가 팽배한 지 오래이고 이제 시집은 베스트쎌러 순위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많은 독자들을 가지고 있는데, 최근 시의 불황과 위기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정호승 출판시장에서 시집은 호황도 없었고 불황도 없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책이 잘 팔린다는 문제와 시집이 잘 팔린다는 문제는 실은 무관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독자들은 시를 읽고 싶을 때 인터넷을 통해 간단히 읽어버리고 마니 시집이 잘 팔릴 리 있겠습니까. 시집을 서점이라는 가게에 진열된 하나의 ‘상품’이라고 볼 때 시집은 이미 회복할 수 없는 긴 불황의 터널 속에 빠져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고 예전부터 늘 있어온 현상일 뿐입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시의 위기와는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갈수록 메마른 삶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비록 소수라 하더라도 더욱 절실하게 시를 필요로 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저는 이번 시집을 정리하면서 사는 것도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시를 읽고 이해하는 일조차 힘들고 고통스러워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좀 해보았습니다.

 

젊은 시인들의 시세계에 대한 평가

 

안병률 제게도 이번 시집은 굉장히 쉽게 읽혔는데, 선생님의 작품세계가 일상에 맞닿아 있고 그 속에서 시를 발견하는 때문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요즘 젊은 시인들은 굉장히 언어의 밀도에 충실해서 난해하다는 평까지 받는 한편, 삶의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진정성이 담긴 시를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고도 합니다. 젊은 시인들의 시세계에 대한 이런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정호승 시를 쉽게 쓴다는 것 자체가 실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건 ‘쉽지만 좋은 시’를 써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 시가 쉽게 읽히는 까닭을 일상 속에서 시를 발견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는 일상적 삶의 부스러기에서 시를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그런데 그 부스러기가 부스러기에서 벗어나 보석처럼 찬란하게 빛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나 그게 잘 안되는 데에 제 시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를 다양성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보면 긍정적인 부분이 많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실험성과 다양성을 내세워 가끔 지나치게 난해해진 시를 만날 땐 곤혹스러움을 느낍니다. 요즘은 60년대의 난해시와는 다른, 또다른 의미에서의 난해시의 시대가 도래한 느낌입니다. 그 까닭은 어디까지나 도구일 뿐인 언어에 너무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도구는 본질을 위해 존재하는 것임에도 지나치게 도구에 집착해 본질을 잃어버린 모습이라고나 할까요? 자칫 본질이 도구를 위해 있게 되는 기현상이 보이기도 하고요. 도구인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삶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요즘 젊은 시인들의 시는 형식적 유행에 민감하다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시단엔 행 구분과 연 구분이 없는 산문시가 만연해 있습니다. 굳이 그렇게 해야 할 필연성과 절박성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너도나도 형식만 산문시를 따르는 것을 보면 시의 외형적 ‘패션'(fashion)에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시집 곳곳에 양념처럼 산문시를 섞어놓은 것을 보고 크게 우려한 적이 있습니다. 유행은 지나가면 그뿐입니다. 유행 또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사람은 물리적 나이가 들어야만 삶의 깊이나 넓이를 지니게 되는 게 아닙니다. 젊은 시인이라 할지라도 인간이 이루는 삶의 깊이를 ‘깨달은 시인’이 있습니다. 그런 시인을 만날 때는 스승을 만난 것과 같습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비극적인 존재

 

정호승 시인과의 대화안병률 선생님의 시를 읽을 때마다 묘한 슬픔에 젖는 것 같습니다. 이번 시집에서도 그런 슬픔의 정조가 유지되고 있는데, 가령 “당신은 눈물에 설탕도 조금은 넣을 줄 아는군/(…)/구운 눈물을 뒤집을 줄도 아는군”(「국화빵을 굽는 사내」) 같은 시구는 깊이있는 슬픔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런 슬픔과 연민을 가능하게 하는지 궁금합니다.

 

정호승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비극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종교적”이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의 말에 기대어 말씀드린다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비극적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존재가 이루어내는 삶 또한 비극적일 수밖에 없지요.

 

이렇게 인간의 구체적인 비극이 있는 곳에 시가 쌀처럼 많이 흩어져 있고 꽃처럼 많이 피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나와 우리’의 고통과 상처를 많이 바라보지요. 그 고통에서 피는 꽃, 그 상처에서 피는 꽃의 향기를 가끔 맡을 수 있을 때 ‘아, 내가 시인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향기의 근원은 눈물이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우리가 상처나 고통 때문에 흘리는 눈물은 우리의 육체가 흘리는 게 아니라 우리의 영혼이 흘리는 것이며, 그 눈물이 바로 시가 아닌가 싶습니다. 시는 어쩌면 눈물의 향기가 아닌지요. 눈물이 영혼이라는 말에 저는 공감합니다.

 

가족이란 사랑과 고통의 범벅 

 

안병률 평론가 김수이(金壽伊) 씨는 해설에서 “이번 시집에서 예외적으로 시인은 가족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고 짚어냈는데 가령 “낡고 텅 빈 노인들의 냉장고를 보면/ 인생의 모습이 꼭 저와 같다 싶어/ 나도 가끔 어머니를 따라 냉장고 속에 들어갔다가 나온다”(「노인들의 냉장고」)와 같은 시구는 깊은 울림을 줍니다. 선생님께서 이번 시집에서 그리고자 하신 가족은 과연 무엇인지 한번 여쭤보고 싶습니다.

 

정호승 요즘 팔순이 넘은 부모님의 집 방 하나를 작업실로 쓰고 있습니다. 매일 부모님 집을 직장인 양 출퇴근하는 셈인데, 나중에 그분들을 더이상 뵙지 못할 때 후회하지 않으려고 일부러 작업실을 그렇게 택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노인들의 고단하고 지루한 삶의 세부가 엿보이고, 그들이 반면교사가 되어 별볼일 없는 제 자신의 삶의 마지막 고샅길이 엿보였습니다.

 

가족이란 사랑과 고통의 범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범벅을 잘 요리해서 먹거나, 아니면 그대로 뒤집어쓰고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요. 가족이야말로 가장 먼저 사랑해야 할 가까운 이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기가 먼저 희생하기보다 서로 요구하고 서로 기대하는 게 너무 많으니까요. 저는 가끔 제가 이룬 가족이라는 감옥 혹은 지옥에 갇혀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우울할 때가 있습니다. 이번 시집에서는 가족간의 사랑을 노래하고 싶었으나 상처만 드러낸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돌부처님과 십자고상(十字苦像)이 나란히

 

 운주사 석불

운주사 석불

안병률 이번 시집에는 여러 종교에 관한 상징들이 뒤섞여 등장하는데요. 가령 ‘물고기가 지은 불국사'(「불국사」)라든지 ‘예수가 돌아오지 않는 영등포'(「영등포가 있는 골목」) 같은 경우들입니다. 어떻게 한 시인의 내면 속에 여러가지 종교적 상징이 스며들어 있을까, 궁금한데요.

 

정호승 저는 어머니에 의해 어릴 때 유년주일학교를 다닐 정도로 기독교 문화가 몸에 밴 가운데 자란 탓인지, 인간은 절대자를 향해 기도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생각을 늘 하곤 합니다. 그런 생각은 인간만큼 약한 존재도 없다는 것을 늘 긍정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저는 어느날 제가 엎드려 기도할 수 있는 대상이 기독교적 존재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약한 인간에게 기도할 수 있는 분들이 많다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닐까요. 8년 전이라고 기억되는데, 화순 운주사(雲住寺) 와불을 뵙고 내려오던 길에 지붕처럼 앞으로 툭 튀어나온 바위 아래, 두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눈은 영원을 향해 있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지극히 평화로워 보이는 석불을 보고 큰 위안과 감동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이후 저는 부처님의 고요한 미소를 한없이 바라보는 일이 마음에 퍽 좋았습니다.

 

지금 저의 책상 위에는 연화대(蓮花臺)에 앉아 있는 50대 중반쯤 돼 보이는, 온갖 풍상을 다 겪은 듯한 돌부처님과 십자고상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십자고상에 매달려 있는 예수의 고통을 통해서는 감사와 위안을 얻고, 그 돌부처님의 텅 비어 있으면서도 가득 차 있는 미소를 통해서는 평화와 평온을 얻습니다. 잘라도 잘라도 끊임없이 자라나는 저의 세속적인 욕망을 부처님을 바라보면서 잠깐 동안이나마 없앨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러한 종교적 관심이 신앙으로 승화할 힘이 모자라 시의 소재나 주제로 도용만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습니다. 아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모르니까 도용하는 것입니다.

 

새 시집의 변화들
사랑하다가죽어버려라

사랑하다가죽어버려라

눈물이나면기차를타라

눈물이나면기차를타라

안병률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두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1999)에서는 10행 안팎의 단형(短形) 서정시가 주를 이루었는데요. 이번 시집은 약간 시행이 길어져서 얼핏 『서울의 예수』(민음사 1982)를 연상하게 합니다. 형식에서의 이런 변화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요?

 

정호승 시행이 길어졌다는 것은 할 말이 조금 많아졌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가 되지 않고 공연히 말만 많아지면 안되겠지요. 사람이 나이가 들면 술을 마시거나 아니면 침묵하라고 했는데…… 그리고 시를 쓰다 보면 시를 쓰지 않고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게 되는데, 그런 일에서 조금 비껴나게 되었다고도 볼 수 있어요.

 

안병률 그렇다면 이번 시집 『이 짧은 시간 동안』에서 내용 면으로 이전 시집들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정호승 내용 면에서 크게 두드러질 정도로 달라진 점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네 삶의 비극적 모습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만 삶의 비극적 과정의 변화에 의해서 조금씩 그 내용이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시집에서는 지나치게 감상적인 작품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시들을 아예 제외했다는 점을 밝히고 싶습니다. 시를 쓰다보면 감상이 승한 작품도 쓰게 되는데(우리가 항상 긴장만 하고 살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가끔 밤하늘의 달과 별도 쳐다보고 술도 한잔하고 살지 않습니까), 그런 작품은 일부러 시집에서 제외해버렸습니다.

 

발표할 때와 달리 시집을 엮을 때는 한권의 시집 전체가 다 긴장을 요구하는 것보다는 한계를 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끔 감상적으로 풀어지는 작품도 있으면 좋기 때문에 그런 작품을 넣었는데, 소위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다수의 독자들은 그런 시들만 골라 시인 자체를 그런 감상적인 시인으로 한계지어버리는 오류를 가끔 범하곤 합니다. 그래서 이번 시집에서는 아예 그런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시들을 수록하지 않았습니다.

 

서정성이 고갈되고 외면당한 지난 시대

 

안병률 조금 어려운 질문을 하나 드리겠습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첫 시집에서부터 이번 시집까지 선생님께서는 어떤 일관된 정조를 유지해오셨습니다. 그런데 시대상황은 계속 바뀌어왔고 선생님의 시는 시대에 따라 매우 다른 평가를 받아온 것 같습니다. 지금 되돌이켜볼 때 선생님이 시를 쓰면서 느껴온 8,90년대의 시대상은 어떠하셨나요?

 

정호승 지난 시대는 인간 속에 있는 서정,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구체적인 서정성이 무시되거나 기피되거나 고갈되거나 외면당한 시대였다고 생각합니다.

 

안병률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서정성이 외면당한 시절에도 그것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일관된 서정성의 세계를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정호승 시는 한 시대만을 위해 씌어지는 것은 아니며, 한 인간의 일생만을 위해 씌어지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음, 또 다음 세대의 독자들도 감동과 위안을 받을 수 있도록 시에 영원성을 부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물기, 즉 서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제 시에 있는 일관된 서정성의 세계를 저는 늘 다음과 같이 쉽게 생각합니다. 봄에 꽃이 피지 않는다면 우리가 단 하루인들 살 수 있겠습니까.

 

나는 모든 인간에게서 시를 본다

 

정호승 시인과의 대화안병률「시인의 말」에서 선생님은 “마더 테레사 수녀가 모든 인간에게서 신을 본다”면 “나는 모든 인간에게서 시를 본다”고 말하셨습니다. 선생님이 인간을 통해 시를 보는 그 순간이 궁금합니다.

 

정호승 인간의 비극의 순간을 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비극을 시의 힘으로 위안하고 위안받고 싶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이번 시집에서라면「신발끈을 맬 때마다」의 경우, 어느 아는 분이 예전에 너무나 살기 힘이 들어 목을 매 자살하려고 끈으로 묶었던 넥타이 두 개를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장롱 속에 깊숙이 넣어놓고 있다고 얘기했을 때, 저는 그분한테서 시를 보았습니다. 또「국화빵을 굽는 사내」의 경우, 추운 겨울날 거리에 나와 처음으로 국화빵 장사를 하는 중년의 사내한테 국화빵 천원어치를 싸달라고 하자, 사내는 국화빵을 제대로 뒤집지도 봉지에 담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국화빵을 땅바닥에 자꾸 떨어뜨렸습니다. 저는 그때 국화빵만한 그 사내의 눈물이 땅바닥에 툭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는 어디까지나 이렇게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안병률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계획에 관해서 듣고 싶습니다. 앞으로 우리 시와 함께 걸어갈 계획이 있으시면 좀 들려주세요.

 

정호승 저는 시인이니까 시인의 본령, 즉 “이 짧은 시간 동안” 시를 쓰고 시집을 내고 하는 일에 이제 더이상 게으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길이 힘들고 험할지라도…… [창비 웹매거진/2004/6]

 

안병률, 정호승, 창비
0 comments0 trackbacks
댓글쓰기목록
https://www.changbi.com/archives/1280/trackback 트랙백 복사

댓글쓰기

*
*

취소

목록보기

  • 회사소개

  • Contact

  • 제휴 문의

  • 창비트위터

  • 창비페이스북

  • RSS

  • 에스크로
  • 이용약관
  • 개인정보처리방침
  • 사이트맵

Family Site

  • Changbi English
  • 季刊 『創作と批評』日本語版
  • 창비주간논평
  • 창비에듀닷컴
  • 창비 블로그
  • 미디어창비
  • 창비 공식 페이스북
  • 창비 공식 트위터
  • 인문까페 창비
  • 세교연구소
  • 창비학당
  • 창비서교빌딩 대관 서비스
창비

copyright (c) Changbi Publishers, Inc. All Rights Reserved.

10881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184 (413-756 경기도 파주시 문발동 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 513-11)
대표전화 031-955-3333(월~금 10시~17시) / 팩스 031-955-3399 / Webmaster@changbi.com
대표이사: 강일우 / 사업자등록번호: 105-81-63672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