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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커뮤니티

대화] 우리시대의 시집읽기 『호랑이 발자국』 / 손택수 이시영 홍용희

2004.05.01커뮤니티 > 창비웹진 > 대화對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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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주최하는 강좌「금요일의 문학이야기」(시인 이시영과 함께 하는 “우리 시대의 시집 읽기”)의 제2강 ‘손택수 시인편’을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및 이시영ㆍ손택수ㆍ홍용희 세 분 참가자 모두의 허가하에 전재한 것입니다.

 

시인 이시영과 함께 하는 “우리 시대의 시집 읽기”

 

손택수 시인편 『호랑이 발자국』(창비 2003)
강연일시 : 2004년 4월 9일(금) 19:00 ∼ 20:30

 

 

 

우리시대의 시집읽기 『호랑이 발자국이시영(사회)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부산에서 귀한 손님이 오셨습니다. 젊은 시인 손택수 시인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손택수 시인은 1970년에 태어나서 1998년에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데뷔를 하셨고 2003년 1월에 『호랑이 발자국』이라고 하는 시집을 출간해서 굉장히 호평을 받은 바 있습니다. 또한 여기에 수록된 작품들로 작년도 ‘현대시동인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한 분의 초대 손님이신 경희사이버대학의 비평가 홍용희 교수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먼저 홍용희 교수께서 손 시인의 시집을 읽고 느낀 소감을 이야기해주시죠.

 

호랑이의 존재성

 

홍용희 손택수 시인은 지금 우리 시단의 비교적 가장 젊은 신예 그룹에 해당하는 시인입니다. 98년에 데뷔한 이후에 매우 개성적인 시세계를 펼쳐가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물로 지난해에 가장 주목받은 시집 중 하나인 『호랑이 발자국』이 간행되었습니다. 저는 손택수 시인의 가장 큰 시적 체형이랄까, 특성은 이 시집 제목에서 어느 정도 시사되고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 시집을 처음 대했을 때 제목이 퍽 낯익으면서도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오래된 새로움이라고나 할까요. 우리는 호랑이를 일상 속에서 만난 적은 없지만 그러나 자주 보았던 것처럼 낯익습니다. 호랑이와 관련된 얘기 한 자락쯤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없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서 호랑이의 존재성은 설화의 공간 속에 살고 있는, 지나간 기억의 시간과 직접 연관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로 이야기를 통해서 호랑이는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죠. 이러한 호랑이가 오늘날 도시문명의 현란한 이미지와 소요의 불빛 아래에 출현했다는 것은 한편 친숙하지만 돌발적이고 낯설고 새롭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 시집 전반을 관류하는 기본 형식과 정조도 ‘호랑이’ 이미지가 환기시키는 의미소(意味素)에서 찾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해 손택수 시인의 시세계는 지난 삶의 기억의 지층이 설화적 화법을 통해서 소생하는 특징을 보입니다. 그의 시적 삶은 깊은 시간의 층위를 호흡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인의 시간 의식에는 할아버지(「감나무 낚시에 관하여」「할아버지의 송곳니」)ㆍ외할머니(「외할머니의 숟가락」)ㆍ아버지(「아버지 등을 밀며」)ㆍ어머니(「나의 팔만대장경」「닭과 어머니와 나」) 등의 그늘 깊은 삶의 굴곡진 내력이 곡진하게 내장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시편에서 기억의 서사들은 아련한 그리움의 빛으로 반짝거리는, 미적 거리를 통해 객체화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체로 시인들이 과거를 회상하는 기억의 언어는 아름답고 아련한 어떤 반짝거림을 갖는 것이 특징인데 이 시집에서는 그런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다시 말해 그의 시세계에서 기억의 역사는 ‘추억의 사진첩’이나 화석화된 유적이 아니라 ‘경험된 현재’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욱신거리는 상처”(「탱자나무 울타리 속의 설법」)처럼 현재의 시간 속에 작용하여 “내 안에 누군가 다른 이가 들어와 산다는 생각을”(「송장뼈 이야기」)하기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손택수 시인의 시적 삶은 젊지만은 않은 것이기도 하죠. 최소한도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유사한 연륜입니다.

 

몸의 언어

 

손택수 시인의 시세계에서 설화적 화법으로 전언되고 있는 가족사의 내력은 우리들에게 그야말로 호랑이 화소(話素)의 얘기처럼 때로는 처연하고 때로는 간곡하고 때로는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손택수의 시세계는 우리들에게 전통적이고 토속적인 미감(味感)이 전해주는 평안함으로 가깝게 다가오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시적 특성은 다른 어법으로 표현하면, 그의 시 제목으로도 등장하는 「腸으로 생각한다」에 해당하는 몸의 언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몸의 언어란 이미지, 관념, 이데올로기, 개념적 사유 등으로 열거되는 머리의 언어와는 대칭적인 것으로서 생활 체험, 내면적 진정성, 삶의 습관과 연관됩니다. 즉 그에게 과거의 역사는 몸의 기억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한편, 손택수 시인의 시적 삶의 시간 지평을 이루는 가족사의 두터운 굴곡들은 기본적으로 농경적인 상상력의 토대를 이룹니다. “거름냄새와 소죽냄새가 한시도 가시질 않던”(「할아버지의 송곳니」)할아버지의 생활이 시적 원형질을 이루고 있는 것이지요. 그는 직접 “농부들의 그 무심함으로 잠시/ 저문 들판을 바라보”(「저문 들판이 새들을 불러 모은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농경적 상상력은 자연스럽게 인간과 자연, 인간과 우주의 존재론적 근원과 이치에 대한 관심을 향한 가능성으로 열어놓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 시집에서 가장 빼어난 시편 중의 하나인 「곡비」같은 경우를 보면, 새들에게 모이를 주는 함평쌀집 할머니의 죽음과 새들의 곡비 장면으로 표상되는 우주적 동기감응(同氣感應)의 현장을 그리고 있습니다.

 

또 「十月, 내 몸속엔 열 개의 달이 뜬다」와 같은 시편에서는 “달이 뜨고 지는 리듬을 따라가”는 자신의 본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손택수의 시세계가 이와 같은 우주적 자아에 대한 천착으로 집중되길 기대합니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그의 기억의 시간 지층이 좀더 깊고 큰 범주의 깨달음과 터득의 자양으로 존재해주길 바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손택수의 시세계는 좀더 명징하고 탄력적인 역동성과 시적 활력을 획득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이시영 고맙습니다. 이어서 손택수 시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릴적 고향에 대한 기억

 

우리시대의 시집읽기 『호랑이 발자국손택수: 오늘 부산에서 서울까지 고속전철을 타고 올라왔습니다. 오면서 느낀 게 바깥 풍경을 보는 사람들이 예전에 비해서 굉장히 줄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체로 눈을 감고 있거나 신문을 보고 있거나 혹은 휴대폰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쓸쓸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차안에서 창밖을 보는데 풍경들이 예전처럼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예전에는 여물을 먹는 소처럼 느긋하게 왔던 것 같은데 오늘은 속도가 너무 빨라서 음미를 하고 말고 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서글픈 생각들이 들었고 동시에 여러가지 생각들을 갖게 했습니다. 기차가 지나가면 손을 흔들어주던 아이들, 일을 하다가 잠시 허리를 펴고 자기와는 관계가 없는 기차를 향해서 손을 흔들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그 사람들을 향해서 열차 안에서 마치 두고 온 자식들, 혹은 두고 온 사람을 보듯이 같이 답례처럼 손을 흔들던 승객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속전철 첫 개통한 날 신문을 봤는데 어느 할머니가 사고를 당하셨더라구요. 그걸 보면서 저에게는 마치 어떤 징조처럼 다가오면서 제가 고향을 떠나서 처음 도시에 왔을 때 느꼈던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저는 다섯살 때 전남 담양에서 부산으로 왔습니다. 영산강이 출발하는 곳에 용소라는 연못이 있는데 바로 그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고향에 살았던 기억이 5년밖에 안되지만 거의 제 인생 전부를 지배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강물 속에서 헤엄을 칠 때 가랑이 사이로 섬뜩하게 지나가는 물고기들, 뱀장어들의 그 미끈미끈한 감각들 있지 않습니까, 그게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또는 집안 어른들이 들일을 나가실 때 저를 감나무 밑에 새끼줄로 묶어놓고 나가시곤 했습니다. 그러면 감꽃 주워 먹고 흙도 주워 먹곤 했습니다. 흙을 먹어본 기억이 저는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나무하고 제가 탯줄처럼 이어져 있었던 것 같아요. 그 나무를 빙글빙글 돌면서 어머니 아버지가 오시기를 기다리곤 했던 기억들이 대지와의 근원적인 일체감으로 저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한글을 배울 때 할아버지한테 익혔는데요. 들일하러 지게 지고 따라가다가, 할아버지께서 징용 가기 전에 마을 사랑방에서 새끼를 꼬면서 익혔다는 우리나라 자모음을 가르쳐주시곤 했습니다. 지게 작대기로 땅에 ‘기역’, 쓰고 읽으라고 하시면 소리 내어 읽곤 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저에게는 굉장히 중요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기역, 할 때 그냥 활자만 쓴 게 아니라 따라 읽으라고 했거든요. 침을 튀기면서 따라 읽는 거죠. 그랬을 때의 활자는 거의 언문일체죠. 그렇게 고향에서의 추억들은 말과 글의 일치로서 저에게 다가왔고 자연과 내 자신과의 일체감으로 작용했던 것이죠. 처음 부산에 왔을 때 이층짜리 건물을 보는데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습니다. 우람한 것들이 내려다보는데 마치 거인처럼 느껴졌거든요. 그런데 도시에서 자라면서 일치했던 말과 글마저 저에게는 분리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옛날에는 책을 읽더라도 소리 내면서 읽고 자연과 호흡하면서 독서를 했는데 도시에서의 책읽기는 굉장히 폐쇄적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서 도시로 왔을 때의 정서는 저에게 균열작용을 일으켰다고나 할까요. 말의 경우는 심지어 말의 갈등으로까지 이어졌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 모국어로서 작용하는 남도 사투리와 부산 사투리가 뒤섞여서 혼란스럽게 사춘기를 보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갈등이 문명과 자연과의 틈을 보게 하였고 내가 잃어버린 고향과 내가 몸담고 있는 현실과의 괴리감을 똑똑히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좋은 시인들은 자기 신화를 갖고 산다고 합니다. 제게는 고향에서의 추억이 도시에서 갈등하면서 내 신화로서 저와 함께 성장해온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고향에서의 추억에 대해 더 말씀드린다면 땅을 딛고 선 자의 구체적 실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대지가 저에게는 확장된 자아로서 다가왔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것이 도시에서는 쉽게 허락되지 않았는데 이 균열, 이 갈등을 어떻게 할까 계속 고민을 하면서 제가 시를 쓰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상상력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벌어진 틈을 계속해서 시간을 두고 바라볼 때 비로소 상상력으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인간은 소용돌이치는 존재이다

 

저는 근본적으로, 인간은 소용돌이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발바닥에서 가마 꼭지까지 한번 찬찬히 살펴보십시오. 아마도 소용돌이 무늬가 회오리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소용돌이 무늬는 일상에 얽매인 삶 속에서 점점 더 굳어갑니다. 그 굳어져가는 각질을 끊임없이 반성하면서 최초의 사물들, 혹은 최초의 자연과 만났던 그 떨림을 향해 역류해 들어가는 것이 시의 한 면모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시영 홍용희 선생님 질문 있으시면 해주시죠.

 

우리시대의 시집읽기 『호랑이 발자국홍용희 저는 이 시집을 읽으면서 호흡이 상당히 다른 시가 두 편 정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十月, 내 몸속엔 열 개의 달이 뜬다」라는 시와 「월내역」이라는 시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시들은 아주 호흡이 빠르고 열망과 갈등과도 같은 팽팽한 긴장들이 드러나 보이는 것 같아요. 묘한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 이것에 관해서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손택수 제가 좋아하는 외국 시인 중에 뽈 엘뤼아르(Paul Eluard)라는 사람이 있는데요. 엘뤼아르가 그의 시 「한순간의 거울」 속에서 “파악된 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뭔가 한 시집 안에서도 제가 다음에 해야 될 작업에 대한 열림의 여지는 좀 남겨둬야 되지 않을까 싶어서 아마도 색다른 두 작품이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달의 상징성’은 저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양력에 대비되는 ‘음력의 질서’를 따라가고자 하는 것, 그것이 현실적으로는 모순적이지만 분명히 의미하는 바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죠. 달의 상징성은 또한 모성의 세계와도 이어지죠. 「骨窟寺」라는 작품에서 “달 속의 분화구처럼 구멍 숭숭 골다공증을 앓는 골굴사”라는 표현을 하기도 했는데 그런 어머니의 세계와 제가 떠나왔던 고향의 농경문화적인 세계와 이어져 있는 거죠. 이어져 있되 반복적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변주된 모습으로 이어져 있고, 그것은 앞으로 제가 천착해나가야 될 세계 중에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릴케(Rainer Maria Rilke)의 시 구절 중에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시는 가장 많이 흔들리는 돌들로 음악의 신전을 짓는다”고 했습니다. 저는 낯익은 세계를 시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젊지만 늙은 시인으로 낙인 찍힐 가능성이 높은 사람입니다. 그 낯익은 세계를 다루고 뻔한 세계를 다루면서도 제가 깨어 있으려면 끝없이 흔들려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불어 제 밖에 대한 의심뿐만 아니라 제 자신에 대한 의심도 동시적으로 진행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하죠.

 

이시영 홍용희 선생께서 앞에서 손택수 시인의 시에 대해 ‘오래된 새로움’이라는 말씀을 해주셨는데 손택수 시가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면모를 아주 적확하게 짚어내신 것 같습니다. 어딘가 친숙하지만 읽어보면 또한 낯선 세계라는 뜻이거든요. 대지와 일체화된 삶을 살고 있는 라다크 지역의 전통적인 농경문화적인 삶의 양식을 다룬 헬레나 노르베리-호지(Helena Norberg-Hodge)의『오래된 미래』라는 저서도 있듯이 손택수 시인의 시세계가 대지적 상상력을 발판으로 한 기억을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환기시켜주는 ‘오래된 새로움의 세계다’는 말은 그야말로 집약적인 표현인 것 같습니다.

 

탁월한 언어운영 능력

 

호랑이 발자국

호랑이 발자국

1966년에 젊은 이성부 시인은 「서울式 海女」를 썼습니다. 이성부 시인의 시들이 가장 발랄한 때 나온 작품입니다.

 

“도시의 옆구리, 관광객을 부르고/ 케이블 카는 머리 위로 기어갔다./ 옥상에 앉아 지껄이는 취객들이 서너 군데,/ 위스키를 따르는 내 찬 손을/ 꼬옥 쥐면서, 젊은 여자가 거듭 말했다./ 과학이란 우리에게 있어요./ 남해바다/ 밑의 무중력, 그 생리를 연구해보셨나요?/ 전복을 따는 손의 면밀성,/ 호흡기 장애, 혹은 유방의 화려,/ 올해 스물여섯, 고향은 서귀포/ 몸집이 크고 퉁명스러운, 여학교를 다닌 여자랍니다” (이성부 시선『우리들의 糧食』민음사 1974).

 

그런데 약 40여년의 간격을 두고 21세기의 젊은 시인 손택수는 「방어진 해녀」를 발표합니다. “방어진 몽돌밭에 앉아/ 술안주로 멍게를 청했더니/ 파도가 어루만진 몽돌처럼 둥실둥실한 아낙 하나/ 바다를 향해 손나팔을 분다/ (멍기 있나, 멍기―)/ 한여름 원두막에서 참외밭을 향해 소리라도 치듯/ 갯내음 물씬한 사투리가/ 휘둥그래진 시선을 끌고 물능선을 넘어가는데/ 저렇게 소리만 치면 멍게가 스스로 알아듣고/ 찾아오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하마터면 실성한 여잔가 했더니/ 파도소리 그저 심드렁/ 갈매기 울음도 다만 무덤덤/ 그 사투리 저 혼자 자맥질하다 잠잠해진 바다/ 속에서 무엇인가 불쑥 솟구쳐올랐다/ 하아, 하아 – 파도를 끌고/ 손 흔들며 숨차게 헤엄쳐 나오는 해녀,”

 

앞의 시는 케이블 카가 지나가는 걸로 보아 지금의 남산타워가 들어선 서울의 어느 위락 바였다면 손택수 시의 무대는 드넓은 몽돌 바닷가입니다. 그리고 두 시를 매개하는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언어의 능숙한 숙련공들이라는 것. 그리고 적확한 언어 구사로 대상을 장악하는 시적 솜씨가 대단하다는 것. 신경림 시인은 어느 심사평 자리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우선 이 시집에서 간과해선 안 될 것은 활력에 넘치는 언어로서, 말에 대한 시인의 빼어난 감각이 그의 시를 활기차게 만드는 또 하나의 동력이 되고 있다”(『창작과비평』2003년 겨울호).

 

위의 시에서 말에 대한 “빼어난 감각”을 과시하는 대목은 많지만 특히 “파도소리 그저 심드렁/ 갈매기 울음도 다만 무덤덤/ 그 사투리 저 혼자 자맥질하다 잠잠해진 바다” 다음에 “하아, 하아- 파도를 끌고/ 손 흔들며 숨차게 헤엄쳐 나오는 해녀”를 묘사하는 부분일 것입니다. 제가 손택수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첫번째 이유는 그의 언어 운영 능력이 이처럼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불과 24행으로 구성된 「방어진 해녀」는 살아있는 바닷가 풍경을 실제보다 더욱 살아있게 합니다. 로런스(D.H. Lawrence)가 “쎄잔느(Paul Cezanne) 가 말하자면 사과를 그 자신으로부터 밀어버려서 그것 스스로 살게 놓아두도록 했다”고 한 바 있는데 뛰어난 시 한 편은 현실을 재현하되 이처럼 전혀 다른 풍경으로 “그 살아있는 순간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시를 읽는 이유는 “인간과 그를 둘러싼 우주 사이의 관계를 그 살아있는 순간에 드러내는 일”에 부딪치고 싶어서인 것이지요.

 

정확한 묘사, 그리고 ‘아버지의 계승’

 

손택수 시인은 또한 묘사에 능한 시인입니다. 「墨竹」이라는 시의 1연을 읽어보겠습니다. “습자지처럼 얇게 쌓인 숫눈 위로/ 소쿠리 장수 할머니가 담양 오일장을 가면// 할머니가 걸어간 길만 녹아/ 읍내 장터까지 긴 墨竹을 친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소쿠리 장수 할머니”의 발자국이 “묵죽”이 되어 소년 화자의 시선에 “짙은 농담”을 이루고 있습니다.

 

「외딴 산 등불 하나」도 아무런 설명없이 너무나 아름다운 시입니다. “저 깊은 산속에 누가 혼자 들었나/ 밤이면 어김없이 불이 켜진다/ 불을 켜고 잠들지 못하는 나를/ 빤히 쳐다본다// 누군가의 불빛 때문에 눈을 뜨고/ 누군가의 불빛 때문에 외눈으로/ 하염없이 글썽이는 산,// 그 옆에 가서 가만히 등불 하나를 내걸고/ 감고 있는 산의 한쪽 눈을 마저 떠주고 싶다”

 

바로 그 옆의 「斷指」도 묘사가 적확하게 선명한 시입니다. “못물 속에 잠긴 버들가지/ 손가락 하나가/ 얼음 속에 끼여 있다”

 

그러나 이 시집의 가장 손택수다운 시적 특성은 아무래도 농경적 생활의 짙은 기억이 담겨 있는「옻닭」 「소가죽북」 「지장」 「아버지의 등을 밀며」 「아버지와 느티나무」등에 있을 것 같습니다.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깨는가」(1980) 이후 우리 젊은 시인들의 시적 탐구는 주로 ‘아버지의 부정’에 초점을 맞추어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곤 하는 것이 주류를 이루어왔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 시인은 정반대로 ‘아버지의 계승’ 쪽에 자신의 시적 정체성을 세우려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고 있는 시가 「아버지와 느티나무」입니다. “아버지의 스무살”적 “구겨진 흑백사진 속의 구겨진 느티나무”에서 촉발된 시적 정서는 아버지의 굽은 등처럼 “한쪽으로 비스듬히 누운 느티” 곁에 나도 언제 돌아가 “당신을 쏙 빼닮았다는 등허리를 둥치에 지그시 기대어보”며 “그가 꾸다 만 꿈과 슬픔까지를” 꿈꾸고 노래하게 될 것이라는 ‘시인의 운명’을 조용히 수락합니다.

 

그리고 손택수는 아버지의 못다 꾼 꿈을, 흑백사진 속에서 그가 못다 부른 노래를 계승하는 쪽에 “나의 남은 생은 온전히 바쳐져도 좋을는지 모른다”는 서슴없는 고백으로까지 나아가고 맙니다. 모든 자연적인 것들을 인위적인 것으로 가공해야 시가 된다고 여기는 이 21세기의 한국 젊은 시단에서 그래서 손택수는 의외의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손택수는, 말하자면 신경림의 『농무』로부터 시작된 저 계몽의 70년대 한국 민중시를 한 세대를 격해서 계승하고 있는 셈이지요. 효자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낡은 새로움’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러나 70년대의 신경림이 하늘에서 뚝 떨어져 나온 시인이 아니라 30년대의 이용악, 백석 등을 독창적으로 갱신하며 계승했듯이 손택수 또한 70년대 이래의 한국 민중시를 전혀 새롭게 갱신하며 계승하고 있다 해야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신경림 선생의 그에 관한 독후감을 인용하는 것으로 저의 소감을 끝맺고자 합니다.

 

『호랑이 발자국』은 우선 집요하고 치열한 한편 자유롭고 분방한 상상과 표현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어찌 보면 시의 내용은 평생 일만 하면서 산 아버지, 그 아버지 밑에서 큰 소리 한번 못 치고 산 어머니 등 아주 낯선 것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상상력의 폭이 넓고 깊을뿐더러 문법이 아주 새로워서, 시 한편 한편이 엄청난 탄력을 가지고 압도한다. 아버지와 옻닭을 먹으면서 옻닭의 모습과 아버지의 일생 그리고 나의 삶을 연결시키거나(「옻닭」), 당나귀를 가지고 시와 사람 사는 일을 통틀어 야유하는 (「당나귀는 시를 쓴다」)일은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못될 터이다(『창작과비평』2003년 겨울호).

 

질의ㆍ응답

 

문 『호랑이 발자국』을 보니 등단작이 실려 있지 않던데 특별한 이유라도 있으신지요. 그리고 「쌍계사 되새떼」라는 아주 특별한 새에 관한 시를 쓰셨던데 그 시를 쓰셨을 때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답 등단작에 물론 남다른 애정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싣지 않은 이유는 시집을 묶을 때 제 나이는 서른 셋, 넷인데 그 시를 쓸 때의 나이는 이십대 초반이었거든요. 좀 낯뜨거워보였고 많이 달라보였습니다. 그래서 나중에 묶어도 되겠다 싶어서 싣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쌍계사 되새떼」라는 작품은 제가 쌍계사를 자주 가곤 하는데 90년대 초에 쌍계사에 갔을 때 어느 스님에게서 되새떼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잡지를 보니까 윤무부 선생이 쓴 새 이야기 중에 되새떼 이야기가 나오더라구요. 또 이철수 선생 판화를 보니까 「쌍계사 되새떼」라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이런 문화적인 습득과 제가 직접 갔을 때의 경험과 이런 것들이 함께 어우러져 나온 작품입니다. 제가 직접 되새떼를 보고 쓴 것은 아니지만 시에서 언어의 비틀기라든지 언어의 물질성을 따라간 부분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문 선생님께서는 과거, 현재, 미래 중 어떤 시간을 더 좋아하시는지요? 그리고 통시적(通 時的) 언어와 공시적(共時的) 언어 중에서 어떤 언어를 더 좋아하시며 시를 쓰실 때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시고 쓰시는지요.

 

답 저의 시적 상상력의 근간 중에 하나가 과거에 토대를 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데 저는 과거 현재 미래가 나선형적으로 이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과거라는 시간대가 현재와 이어지기도 하고 바로 미래로 뛰어오를 수도 있죠. 하여튼 나선형적인 시간 속에서 제가 살고 있고 그것이 시의 한 면모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시는 순간의 양식이고 순간의 불꽃인데, 그 찰나를 통해서 우주적인 것들과 현세적인 것들을 모두 포함하여 뚫고나오는 것이 아닐까요.

그리고 통시적 언어와 공시적 언어에 대해 말씀하셨는데요. 저는 시인의 언어는 생물이기 때문에 생물성을 토대로 하는 시는 통시적인 면모와 공시적인 면모를 다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존재 자체가 그렇지 않습니까?

 

문 문학을 하게끔 영향을 준 책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궁금하고 문학도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어떤 시인을 좋아하시는지도 말씀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답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가 지구는 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현상학자 후썰(Edmund Husserl) 은 지구는 돌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후썰에게는 지구가 돌지 않는다고 느끼는 그것이 자기에게는 실감이고 구체성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저는 추상적인 지식들보다는 구체적인 무지에 속해 있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현실에 보다 뿌리박으려 노력하고 제 시적 공간을 가능하면 넓히지 않고 제 주위로 좁혀서 그 한계 상황에서 시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죠.

부끄럽게도 책을 많이 읽지는 않았습니다. 좋아하는 시인을 꼽는 것처럼 곤혹스러운 일도 없을 것 같은데요. 저는 모든 시인들, 작가들에게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중에서도 저는 특히 백석을 읽었고 서정주를 읽었고 김수영을 읽었습니다. 백석의 시는 뒤늦게 읽었지만 읽고 또 읽어도 공부할 것이 있고 거듭 새로운 것 같습니다.

 

문 시를 쓰다보면 제일 당황하게 되는 것이 과연 시의 언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인데, 손 시인님 나름대로의 시의 구성과 배열 방법 등을 알고 싶습니다.

 

답 로트렉(Toulouse Lautrec) 같은 화가는 자기 전시장에서도 고쳤다고 하지 않습니까? 저의 경우는 단 한편의 시도 발표 당시의 모습을 하고 있는 시는 없습니다. 발표한 작품들도 조사 하나라도 다 고쳤습니다. 저는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까지 많이 고치는 편입니다. 끝없이 고치는 과정에서 자기 나름대로의 ‘시법’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누구도 가르쳐줄 수 없는, 누구에게도 배울 수 없는 자기만의 시법을 터득해가는 것 같습니다. 시는 끊임없는 과정중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비 웹매거진/2004/5]

 

손택수, 이시영, 창비, 호랑이발자국, 홍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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