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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커뮤니티

자비로운 살인, 안락사 / 이필렬

2004.01.01커뮤니티 > 창비웹진 > 과학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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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로운 살인, 안락사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에는 두개의 인상적인 죽음의 장면이 나온다. 하나는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 여인이 사막의 동굴에서 연인을 기다리며 죽어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전신에 화상을 입은 주인공이 모르핀 주사를 맞고 서서히 숨을 거두는 것이다. 영화에서 이들의 죽음은 꽤나 낭만적인 터치로 묘사되고 있지만, 법의학적 용어로 건조하게 표현하면 여인의 죽음은 사고 후의 자연사이고 남자의 죽음은 안락사(euthanasia, mercy killing)이다.

 

사고사나 안락사 모두 우리에게는 그다지 익숙한 죽음은 아니다. 특히 안락사는 살인까지 연상시키는 오싹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안락사가 통증이나 죽음 자체를 견디기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어느 순간 고통 없는 죽음을 안겨주는 ‘자비로운’ 행동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것이 살인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자비를 베푼다는 명목으로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산 사람에게 독극물을 주입하는 장면을 상상하면 보통의 죽음을 생각할 때보다 더 소름이 끼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안락사는 이제 유럽이나 미국에서 서서히 일반적인 죽음의 방식으로 받아들여져가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안락사를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법이 절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제정되었고, 다른 유럽국가들에서도 안락사를 합법화하는 문제가 시끄러운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 글에서 나의 주된 관심은 안락사에 대해 좋다거나 나쁘다는 판정을 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안락사가 ‘자비로운 살인’으로 살인의 범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지만, 「잉글리쉬 페이션트」의 주인공처럼 모두 떠난 뒤 굶주림과 외로움 속에서 죽어가는 것보다는 간호사가 들려주는 『연인』의 마지막 모습을 회상하면서 죽는 것이 더 편안하고 위엄 있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내가 주의 깊게 보려는 것은 네덜란드에서 번져나가는 안락사의 일상화 뒤에 깔린 문화적 배경 같은 것이다.

 

나는 안락사의 일상화를 근대 이래 형성되어온 인간의 죽음에 대한 태도, 근대의 중요한 가치로서 끊임없이 추구되어온 개인의 해방, 그리고 근대 이래 모든 질병 치료에서 점차 관철되어온 공학적 치료기술의 결과로 본다. 근대 의료기술이 확립된 이래 인간의 수명은 점차 늘었고, 이와 더불어 인간이 죽음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져왔다. 근대 이전, 아니 20세기 초까지도 죽음은 삶과 함께 동거하는 것이었다. 죽음은 살아가는 동안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만큼 사람들은 죽음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발달로 죽음을 가져오는 질병의 원인이 하나하나 밝혀지고 이들 질병이 극복될 수 있게 됨에 따라 죽음은 점차 부자연스러운 것으로 변화되었다. 죽음은 이제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멀리 쫓아버려야 할 것, 거론해서는 안 되는 것, 자연스럽지 않은 것으로 된 것이다. 이렇게 죽음이 사람들에게 공포스러운 것, 극복과 금기의 대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사람들은 두가지 방식으로 죽음에 반응한다. 하나는 갖가지 기술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죽는 시점을 가능한 한 멀리 밀어놓는 것이고, 또 하나는 스스로 죽음과 맞닥뜨려 그것을 수용하기를 회피해버리는 것이다. 안락사는 금기시된 죽음, 공포로 다가오는 죽음을 회피하는 가장 적절한 수단이다.

 

근대의 성립과 더불어 형성된 개인주의는 많은 사회문화적 관계를 변화시켰다. 개인은 사회의 존립 자체에 위협을 가하지 않는 한 거의 모든 권리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여성해방, 성해방, 이혼과 동거의 일상화, 가족의 약화, 동성애의 인정 등이 모두 개인의 권리가 극도로 추구된 결과이다. 개인의 권리라는 측면에서 볼 때 동성애는 더 이상 불순한 것이 되지 않는다. 동성애는 단지 애정을 쏟을 대상을 개인이 자유롭게 선택하여 행복하게 살아갈 권리에 속하는 것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안락사도 스스로 죽음의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개인의 권리, 자기자신에 대한 결정권으로 간주된다. 고통으로 몸부림치다 죽어가기보다는, 또는 몇년 동안 누운 상태에서 의미없이 살다가 죽기보다는 모르핀 주사를 맞고 한 순간에 편안하게 죽겠다고 하는 선택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자비로운 살인, 안락사네덜란드에서는 이미 안락사가 합법화되기 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편안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행사해왔다. 1995년에는 전체 사망인구의 2.4%에 달하는 3,200명이 안락사를 선택했고, 40,000명 가량이 고통감소 치료를 통해 이른 죽음을 선택했다. 이들이 자연사보다 안락사를 택한 것에 대해 죽음의 순간에도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사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선택은 적극적인 권리행사를 통한 개인의 해방이 아니라, 한편으로는 “스스로 선택한 길에의 굴종”이라는 성격과 다른 한편으로는 극도의 개인주의 문화 속에서 죽는 순간을 감당하지 못해 떠밀려진 일종의 강제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인정되는 최고 덕목 중의 하나는 개인이 자신의 삶에 관한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고 덕목이란 것도 억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데,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 강박이 되어버린다면 안락사란 자신이 택한 길에 ‘속박’되는 길일 뿐이다.

 

자비로운 살인, 안락사안락사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떠밀려서 이루어진 강요의 성격을 지니게 되는 것은 개인주의 문화가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이다. 죽음의 과정이 길면 길수록 그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에게는 자신의 남은 삶과 죽음을 옆에서 돌봐줄 손길이 절실히 필요해진다. 그러나 가족관계마저도 개인주의에 의해 흐트러져버린 서구에서 죽음이란 이제 혼자서 겪어야만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어떤 사람에게 갑자기 말기암 진단이 내려지자 친구들과 애인이 일시에 떠나버리거나 자식들이 연락을 끊는 일은 흔한 일이 되었고,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요양소에서 간호사들의 기계적인 처치를 받으며 죽어가는 것도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말기암과 같은 중병을 앓는 사람, 요양소에 들어간 노인들은 모두 혼자 고독하게 죽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 된 것이다. 이때 이들에게 남은 삶이 얼마나 의미있는 것일까?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통해 정리하면서 위안받을 기회도 박탈당한 채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에 의해 마치 물건처럼 취급당하다가 죽어가는 것을 상상해보라. 그럴 바에는 무의미하게 몇년 더 사는 것보다 편안하고 위엄있는 안락사를 선택하는 것이 불가피하지 않을까? 물론 이 선택은 떠밀려서 이루어진 강제적 성격을 지니기 때문에, 상황이 달라지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유럽에서 호스피스에게 맡겨진 시한부 환자들은 모두 안락사보다는 자연사를 선호한다고 한다. 물론 호스피스에서도 환자들은 가끔 이제 더이상 살기 싫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건 일시적인 기분의 표출이지 호스피스 봉사자들의 따뜻한 보살핌 아래에서는 아무도 진정으로 안락사를 원하지는 않는다. 너무 고통스러울 때는 고통을 줄여주는 처치를 받고, 죽음에 대한 공포로 견디기 어려울 때면 호스피스 봉사자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조금씩 죽음을 맞이하는 법을 배워가다가 자연사하는 것이다. 네덜란드에서는 국민의 90%, 독일에서는 70% 가까이 안락사에 찬성한다지만, 이는 이들이 나중에 혼자 고통스럽게 죽어가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병상에 꼼짝못하고 누워서 호흡기계와 약물의 도움으로 생명을 연장받게 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은 안락사를 합법화함으로써 아무도 자신을 돌보지 않는 끔찍한 상황, 온갖 기계에 둘러싸여 강제로 생명이 연장되는 상황을 면해보려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서른다섯살 난 어느 여인은 다발성 경화증(multiple sclerosis)에 걸린 후 열한살 난 딸과 남편을 남겨두고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를 들으며 안락사했다고 한다. 그녀는 아직 꽤 오래 더 살 수도 있었지만 요양소에서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기보다 ‘위엄있게’ 죽는 쪽을 택했다. 남편도 물론 아내의 안락사에 찬성이었는데, 그는 “내 아내는 다시 건강해질 수 없고 시간이 흐를수록 마비가 심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삶은 신이 뜻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 아내의 안락사를 정당화했다. 그녀는 자신의 병이 좀더 진행되면 남편이 아이와 함께 떠나버리고 자신은 요양소로 보내지는 수순을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삶이란 자기실현이 가능할 때, 스스로 자기 길을 결정해가며 살 때에만 의미있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녀에게 요양소에서 혼자 죽음을 기다리며 사는 삶, 밖으로부터 결정지어진 삶, 자기실현이 불가능한 삶은 당연히 무의미할 터이니, 남은 것은 안락사밖에 없었으리라.

 

안락사를 선택하는 것과 공학적 치료기술이 중환자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상황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병원의 중환자실에 처음 가본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인간과 기계가 공존하는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인간은 호흡조절기, 영양제 공급기, 심장박동 측정기, 심전도 측정기 등의 기계에 둘러싸여 생명을 연장받는다. 여기서 기계와 인간은 일체가 되어서 움직인다. 아니 기계가 정지하면 인간도 정지하기 때문에, 인간이 기계의 통제를 받으며 움직인다는 말이 정확하리라. 건강한 사람 가운데 누가 자신이 더이상 살아가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을 때 그러한 기계의 도움을 받아서 생명을 연장받기를 원하겠는가? 이들은 차라리 기계에 둘러싸여서 조금 더 살 바에는 그렇게 되기 전에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중환자 담당의사들은 기계에 의존한 집중적인 치료가 환자를 회복시키는 경우도 있다고 말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끔찍한 고문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계로 생명연장을 하는 것보다 ‘자비로운 살인’을 통해서 죽는 것을 더 편안하고 위엄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자비로운 살인, 안락사기계를 통한 생명연장은 흔히 환자가 의식을 잃은 상태에서 환자의 선택이 배제된 채 이루어진다. 그러나 환자에게 의식이 있고 스스로 자신의 상태를 자각하고 있는 경우라면 환자가 기계를 거부할 수도 있지 않을까? 또는 보호자가 여러 사정을 고려해서 기계사용 중단을 요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환자는 거부하지만 보호자는 계속 치료할 것을 주장하거나 환자는 원하지만 보호자가 치료 중단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이들 모두 기계를 거부하는 것이 죽음을 앞당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해도 말이다. 여기서 환자, 의사, 보호자들 사이에 갈등과 딜레마가 발생한다. 이러한 갈등과 딜레마야말로 고도로 발달한 공학적 의료기술, 인간의 과도한 기술의존이 사회적으로 어떤 문제를 초래할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기술에 의존하면 좀더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다. 그러나 기술을 거부하고 죽었을 경우 단순한 자연사로 인정되는 것일까? 환자로부터 며칠 또는 몇달의 삶을 빼앗은 것이기 때문에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을 저질렀다는 혐의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환자는 기계를 달고서라도 좀더 살고 싶은데 보호자는 여러 사정 때문에 기계사용을 중단시키려 한다거나, 보호자가 환자의 사정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기계를 통해서 생명을 연장시키려 한다면? 의사도 비슷한 딜레마를 겪는다. 보호자나 환자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소생의 희망이 없는데도 기계를 계속 들이대는 것이 옳은지 자연사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바람직한지 갈피를 잡기가 어렵다. 이렇게 단지 기술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로 인해 심각한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자비로운 살인, 안락사한국의 의사협회에서는 기계를 통한 생명연장의 중단을 소극적 안락사라고 표현한다. 그리고 이로부터 발생하는 법적인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소극적 안락사의 합법화를 주장한다. 의사나 보호자가 환자의 치료가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기계를 떼어냈을 때, 이들이 법정에 서게 될 위험을 없애주자는 것이다. 환자가 거부하는 것은 법적으로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스스로 치료를 거부하고 죽음을 택한 사람에 대해 법적인 책임을 물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기계를 떼어내고 자연사하는 것을 소극적 안락사라고 표현한다면 처음부터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죽는 것은 어떤 죽음이라고 말해야 할까? 진정한 자연사라고 표현하는 것이 타당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위의 소극적 안락사도 자연사에 포함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소극적 안락사라는 표현은 ‘적극적’ 안락사를 예비하는 함정으로 작용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이 기계에 의한 생명연장을 반대한다. 이에 대해서 의사협회에서는 아마 국민다수가 소극적 안락사를 찬성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기계사용을 반대하는 다수의 국민이 원하는 것은 안락사가 아니라 자연사할 수 있는 권리의 보장이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죽을 권리까지 박탈하면서 강제로 생명을 연장하는 의료행위에 대해 반대하는 것이다. 안락사란 ‘자비로운 살인'(mercy killing)을 의미한다.

 

살인은 자비롭든 무자비하든 모두 적극적인 행위이다. 고의가 없었더라도 어떤 행위가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낳았으면 그것도 살인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소극적인 ‘자비로운 살인’, 소극적 안락사란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소극적 안락사란 표현을 계속 사용한다면 이는 안락사의 일상화를 꾀함으로써 별 저항 없이 ‘적극적’ 안락사를 받아들이게 하려는 의도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의사협회, 의료보험 관계자, 보건정책 담당자들은 은근히 네덜란드식의 안락사 도입을 바랄지 모른다. 이들은 희망 없는 환자는 안락사시키는 것이 국민경제에도 이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극적 안락사라는 표현이 이들의 드러나지 않은 소망 충족에 기여할 수 있다면 더더욱 그 표현을 쓰지 말아야 한다. 소극적 안락사라는 말보다 의미전달을 훨씬 명확하게 하는 자연사할 권리의 보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해야 마땅할 것이다.

 

안락사가 합법화되면 시한부 환자, 중증 장애인, 의식불명으로 장기간 누워 있는 사람, 요양소의 노약자에 대한 사회의 대우가 어떻게 바뀔까? 이들에게 말기암 진단이나 다발성 경화증 진단을 받고 별 머뭇거림 없이 안락사를 선택한 네덜란드 사람들의 예를 따르라는 압력이 밀려오지는 않을까? 이들을 치료하거나 돌보는 데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투입되는 것을 안락사로 해소해야 한다는 소리 없는 주장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치료비용을 부담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재정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 큰 압력이 가해질 수 있다. 사회 속의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더욱 더 경제적인 계산에 의해 지배받게 되고, 생명의 귀중함에 대한 의식이 줄어들어서 사회 속의 삶이 점점 더 거칠어질지 모르다. 사회적으로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거친 취급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안락사를 논할 때 우리는 나치독일에서 자행된 장애인들에 대한 안락사가 바로 그러한 배경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신경숙의 소설 「감자 먹는 사람들」에는 위암 수술을 받고 몇년 째 누워만 지냈던 남자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화자가 언니라고 부르는 아내에게 자신을 끝까지 버리지 말아달라고 간청하고, 언니는 시어머니까지 포기해버린 남편을 끝까지 놓지 않는다. 남편이 살아 있던 동안 언니는 남편이 자신을 의지하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가 죽은 후 언니는 그동안 남편이 자기를 붙들어주었음을 깨닫는다. 누워만 있었어도 남편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언니에게는 큰 위안이었던 것이다.

 

다발성 경화증에 걸려 안락사를 택한 네덜란드 여인은 더 살 수 있었는데도 어린 딸과 남편을 두고 자기 길을 갔다. 남편과 딸은 그 여인이 당당하게 죽어갔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이들은 자기도 나중에 그런 처지가 되면 여인처럼 하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들의 관계와 신경숙 소설의 언니와 남편의 관계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한 것일까? 네덜란드 여인은 요양소에 들어가지도 않고 남편과 딸에게 부담도 주지 않고 ‘깨끗하게’ 삶을 마감한다. 언니의 남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사회에 많은 비용을 부담시키고 아내를 고생시키면서 삶을 오년간이나 질질 끌어간다. 그런 가운데도 이들의 애정은 식지 않고 죽는 순간까지도 서로 의지와 위로가 된다. 안락사를 찬성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관계는 단순한 참고사항 정도밖에 안되는 것일까?

 

 <참고할 싸이트>

 

타임지 기사(22-Apr-2001)

 

타임지 기사(11-Feb-2001)

안락사, 이필렬,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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