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상·하
신국판/상권 332면, 하권 320면/각권 7,500원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황석영의 신작 장편소설이 출간되었다. 방북사건 이후의 독일 체류와 귀국 후 옥중생활 속에서 구상된 이 작품은 지난 1년 2개월간 일간지에 연재되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출간에 앞서 작가의 세심하고 대폭적인 수정 정리를 거쳤다. 80년대 이후 격동했던 한국사회와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근간으로 하는 세계사적 변화를 배경으로 젊은 두 남녀의 파란많은 삶과 사랑을 감동적으로 그려낸 이 작품은 작가가 『무기의 그늘』(1988) 이후 12년 만에 내놓는 역작으로서 그 미학적 성취와 튼실한 사회성을 통해 한국 소설문학의 새 자산으로 기록될 것이다.
이 작품은 기본 서사구조에서 회상과 편지글, 비망록과 기록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으로 두 주인공 오현우와 한윤희의 교차적 서술방식을 통해 박진감 넘치면서도 서정적으로 전개된다.
70년대말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지하조직 활동을 한 오현우는 광주항쟁 이후 수배가 되자 기약없는 도피생활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은거를 도와준 시골학교 미술교사 한윤희와 사랑에 빠진다. 그들은 한적한 시골 갈뫼의 외딴 마을에서 3개월여 둘만의 따뜻하고 오붓한 시간을 갖지만, 오현우는 다시 동지들을 규합하여 투쟁의 길로 나서는 과정에서 검거되고 만다. 그는 지하조직의 수괴로 몰려 무기형을 선고받고 18년이란 오랜 세월을 장기수로 지내며 옥중의 투쟁을 거듭하는 한편 신산한 여러 인생사와 맞물리며 내면적으로 성숙해간다.
만기출옥 이후 전해진 한윤희의 편지를 통해서 오현우는 그녀가 불치의 병에 걸려 세상을 떠났음을 알게 된다. 오현우는 한윤희에 대한 추억을 찾아 과거에 둘이 함께 지냈던 갈뫼의 `오래된 정원`을 찾아가고, 그곳에서 한윤희가 남긴 기록을 통해 험난했던 80년대 이후를 뜨겁게 살아온 그녀의 삶과 죽음을 마주하게 된다. 오현우와 헤어진 후 미술대학원에 진학한 한윤희는 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한 채 송영태라는 학생운동가가 주도하는 반정부운동을 음양으로 돕다가 독일로 유학을 떠나 그림공부를 계속한다. 한윤희는 그곳에서 또다른 인물 이희수를 만나 그의 환경친화적인 생각에 공감하고 결국 뜻하지 않은 사랑에 빠지지만 그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다. 다시 실의에 빠진 그녀는 작품활동을 하다가 귀국한다. 한편, 오현우는 한윤희의 기록에서 그녀가 자신의 딸아이를 낳고 키워왔음을 알게 된다. 오현우는 갈뫼에서의 여정을 정리하고 새로운 삶의 시작을 준비하면서 딸과 만나게 될 설렘을 간직하며 서울로 올라온다.
`오래된 정원`은 한편으로는 오현우와 한윤희가 달콤한 사랑을 나누며 함께 지냈던 갈뫼의 시골집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토피아를 꿈꾸는 혁명가들의 이상향인 동시에 남성 위주의 물량적 혁명주의 대신 모성의 따뜻한 인간애가 넘치는 새로운 가치가 잉태 발현하는 모태이기도 하다. 오현우가 이곳에 내려와 자기 반평생의 역정을 돌아보며 새출발의 실마리를 발견하는 것은 한윤희의 자취를 더듬는 과정에서 이러한 새로운 각성을 얻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8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변혁을 꿈꾸고 투쟁해왔던 이들의 삶과 사랑을 진지하게 다루면서도 황석영 특유의 세련되고 힘있는 문장이 뿜어내는 재미를 갖추고 있다. 특히 헌신적인 운동가들의 정서 심층에 잠재된 사랑의 음영, 계절과 시각에 따른 자연풍광의 미묘한 변화를 이처럼 절묘하게 포착한 소설도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며, 작가의 체험이 녹아 있는 감옥생활이나 한윤희가 독일 유학중에 체험하는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대한 묘사는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살아 있다. 진중하고도 묵직한 주제를 깔면서도 세월을 뛰어넘는 두 남녀의 애절하고 순수한 사랑이 잘 그려진 이 작품은 거대한 역사의 물결을 헤엄쳐가는 가냘픈 개인의 눈을 통해 시대의 영광과 상처를 조명함으로써 앞으로 새롭게 전개될 황석영 문학의 방향을 가늠하게 해준다.
이 작품은 누구보다 치열하게 이 시대를 헤쳐온 작가 황석영이 다양한 기법과 섬세한 문체로 작성한 지난 20년간의 문학적 연대기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북한방문과 해외망명 등을 통해 더욱 넓어진 시야와 옥중생활 동안 예민하게 다듬어진 감각,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사색적 깊이가 녹아들어 있다. 「객지」「삼포 가는 길」「한씨연대기」『장길산』『무기의 그늘』에서 맛본 감동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이 작품을 통해서, 잊어서는 안될 한 시대의 진실을 작가 황석영의 녹슬지 않은 솜씨와 함께 만나는 보람은 한층 각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