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자 가자 감나무

옛 아이들 노래 2

편해문  지음  ,  박향미  그림
출간일: 1998.11.30.
정가: 13,800원
분야: 어린이, 문학
일상의 힘, 유장한 시의 여운

 

 

 

 

평범하고 일상적인 소재에서 삶에 대한 빛나는 성찰을 길어내는 이선영 시인의 다섯번째 시집이 출간되었다. 6년 만에 펴내는 신작시집은 그 세월의 두께만큼이나 더 깊어진 내면으로 일상의 누추와 소멸의 무상함을 견디며 절절하고 유장한 울림을 만들어낸다.

 

 

 

시인은 벌써 20년 가까이 시를 써왔다. 당연하지만, 시인은 시인으로서만 살지는 않는다. 시인인 동시에 누군가의 아내이고 어머니이고 생활인으로 그만한 시간을 살아왔다. 그는 평범한 일상의 시간을 견디는 동안 천천히 나이 들어가고, 그 평범과의 불화를 시의 재료로 삼아 삶에 대한 비범한 인식을 벼려왔다. 잘 알려져 있듯, 일상의 시간과 그 속에서 서서히 늙어가는 몸에 대해 그만큼 분명한 자의식을 지닌 시인도 드물지만, 그 자의식은 이번 시집에서 한층 짙고 정제되어 있다. “제 몸에 숨어들어온 바구미떼에 오래도록 갉아먹히는 채로 / 대추야자나무는 심어진 그 자리를 지탱하고 서 있을 뿐이다, 속을 다 털리고서도 / 바구미떼가 새로운 열매를 찾아 우르르 떠날 때까지 / 대추야자의 건재(健在) 속에 숨겨진 부재(不在)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벌레 먹은 대추야자나무」). 사막의 신산한 불모를 견디며 제 속에 키워온 과육을 통째로 털리면서도 대추야자나무가 그 자리에 가만히 붙박여 있듯, 이제 시인은 소멸과 상실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보다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오히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는 듯 보인다.

 

 

 

 

 

 

 

가을 지나도 따지 않은 묵은 감이 / 눈 내린 한겨울 / 굶주린 직박구리들의 좋은 먹이가 되듯이, // (…) // 가수는 늙도록 노래한다 / 눈앞에서 멀어졌다가도 불쑥 되돌아오고 / 홀연 잊혀졌다가도 기어이 되살아나고 / 한동안 들리지 않다가도 노래와 함께 다시 귓전을 울린다 / 가수는 뒤늦게 노래하고 / 뒤늦은 노래가 더 뼈저린 노래임을 / 나는 한겨울 배고픈 직박구리의 귀로 듣는다

 

―「직박구리의 귀」 부분

 

 

 

 

 

 

 

시인은 묵은 감이 아니라 굶주린 직박구리의 자리에, 뒤늦게 노래하는 가수가 아니라 그 노래를 듣는 이의 자리에 떨어져 있다. 그러나 세월과 일상과 불화하는 시인에게 그 거리는 안온한 관조의 거리는 아니다. 시인이 짐짓 “유리창 뒤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얼마나 평화로운가”라고 말할 때조차, 동시에 그는 “그럼에도 내가 질질 끌려가고 있는 저 바깥의 힘”을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삶의 투박하고 거친 손들이여 제발 / 나를 밖으로 꺼내려 들지 말라”는 진술도 실은 진심이기보다는 체념에 가까운 반성으로 다가온다(「유리창」). 그런 진술은 자주 자조적인 기색을 띠기도 해서, 시인은 “길가에, 방바닥에, 의자에, 읽던 책 위에, 스쳐온 누군가의 어깨에, 내려앉은 나의 머리카락들”을 보며 “내가 하고 다니는 일이란 고작 머리카락으로 길을 삼는 일”(「머리카락을 남기다」)이라고 씁쓸하게 내뱉기도 하고, 한때는 “불후의 시인이기를 꿈꿨”지만 “불멸이 아니라 멸렬함으로 줄기차게 이어지는 생활” 속에서 “불멸의 두 글자를 새겨넣을 만한 로망은 사라진 지 오래”라고 탄식하기도 한다(「더이상 로망은 없다」). 그러나 자조(自嘲)는 또 자조(自照)이기도 하니, 시인은 지나간 청춘과 지리멸렬한 일상을 자조하는 형식으로 스스로를 깊이 비추어보고 있는 것이다. 이선영 시의 언뜻 익숙하고 평이해 보이는 산문투에서 순간순간 깊은 울림과 리듬이 느껴지는 것은 그런 되돌아봄에서 오는 떨림이 시 전체에 짙게 배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대상과의 거리와 자신에 대한 내성이 절절한 긴장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그렇다.

 

 

 

 

 

 

 

당신이 낑낑대며 감나무에 올라가 가지를 베면서 감을 따듯 / 생을 따고 시를 따는 사람이라면 / 나는 당신과 당신의 감나무가 함께 겪는 노고를 더러는 안타깝게, 더러는 무료하게 바라보며 / 햇빛 받아 빛나는 은사시나무의 평화와 고요와 무료함이 생이자 시이기를 바라는 사람

 

―「감 따는 사람」 부분

 

 

 

 

 

 

 

청춘은 흘러갔고, 세월을 견디는 일이 “죽음의 아가리가 조금씩 삶의 한귀퉁이를 먹어들어가”(「샤갈의 꿈」)는 일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시인이 모든 죽어가는, 죽은, 고통받는, 고통받을 이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시인은 이라크의 어느 가족과, 부모가 맞벌이하는 사이 화재로 죽은 삼남매, 목매 죽은 노점상, 깜보디아에 추락한 한국 관광객들, 어린 딸을 남겨두고 자살한 대학강사에게 연민을 느낀다. 위암 걸린 할아버지, 허리 구부러진 할머니, 딸에게 돈을 꾸던 아버지, 종종 아버지 노릇을 해야 했던 어머니, 순두부찌개를 먹던 남자가 불쌍하고, 자신보다 더 오래 이 지구에 살아야 할 아이들이 불쌍하다. “손가락을 쥐락펴락하는 모래알갱이 같은 돈과 / 종잇장같이 구겨지는 자존심과 / 반짝했다 꺼지는 공명심과 / 자기식 헤게모니를 위해 동가식서가숙하는 무리, 우리들”까지도 불쌍하다. 그렇게 시인은 “평생을 나는 불쌍한 사람들하고만 살아왔다”고 단언하고(「불쌍하고, 불쌍하다」), 그 연민으로 또 스스로를 반성하고 자조한다. 그것이 시를 이끌어내는 힘이기 때문이다.

 

 

 

 

 

 

 

내 시가 아름답지 못해서 / 새끼 고양이가 거리 한복판에 버려졌다 / 내 시가 힘주어 말하지 못해서 / 한 소녀가 거리에서 싸늘하게 발견되었다 / (…) / 이 세상에서 흉흉한 마음의 얼룩들이 가시지 않는 한 / 내 시는 계속 씌어지리라, 오래, 씌어져서 / 삶의 거친 나뭇결을 문지르는 사포가 되고 / 그 사포의 리듬을 따라 읊조리는 / 나직하지만 끊이지 않는 허밍이 되리라

 

―「21세기 시론」 부분

 

 

 

 

 

 

 

그처럼 그의 시는 나직하지만 끈질기다. 성급히 밀어붙이거나 손쉽게 안주하는 대신, 주저하고 자조하기를 되풀이하면서도 삶의 누추를 손에서 놓지 않고 쉼없이 걸어간다. 밝게 빛나지는 않지만 단단하게 응집된 그 정직한 의지가 시인에게 불모와 부조리의 삶을 견디게 하고, 그의 시에 낮지만 깊은 울림을 준다. 그리고 그 울림이 웅변하는 바는, 화려하고 매끈한 기교보다 진정성을 품은 정직한 내성이 진짜 시적인 것이라는 당연한 진실이다. 모든 것이 사라지더라도 무너질 수 없는 결심처럼 붙들고 있어야만 하는 것, 그것이 끝내 자신의 미래이고 시일 것이라는 시인의 목소리는 그래서 더 역설적인 빛남으로 다가온다.

 

 

 

 

 

 

 

이 물컹한 포도알 속에도 / 무너질 수 없는 어떤 결심인 양 씨가 들어 있다 // (…) // 포도알은 껍질이 벗겨지는 순간 깊고 아득한 목구멍 속으로 사라지지만 / 결코 그게 다가 아니라며 제 생의 응집들을 뱉어놓는다 // 포도알은 포도씨를 꼭 물고 있었다 / 포도씨는 포도알이 남기는 미래다

 

―「포도알 속에도 씨가 있다」 부분

 

 

목차

가자 가자 감나무

옛 아이들 노래

 

제5부. 재미있는 말놀이

별헤는 노래

한글 뒤풀이 노래

말 연습 하며 부르는 노래

말꼬리를 따거나 말머리를 이으며 부르는 노래

나무 노래

한숨에 외는 노래

묻고 답하기

 

제6부 무언가 바라며

흙탕물 가라앉기 바라며

비, 바람, 추위에게 바라며

연기나 눈에게 무언가 바라며

새나 쥐에게 바라며

파랑새에게 무언가 바라며

꽃이나 풀에게 무언가를 바라며

나무에게 바라며

까치에게 빌며

누에 잘 되기를 빌며

달팽이, 메뚜기에게 무언가를 시키며

가재 불러내며

헤엄치다가 밖으로 나와

겁나는 일과 맞닥뜨렸을 때

 

제7부 어린 동생을 재우며

 

제8부 재미있는 이야기 마당

꼬부랑 할머니

오시오 자시오 가시오

녹두 영감 죽었네

이야기 뙈기 밭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