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래는 다시 이어지고
밖에선 여름꽃들이 화사하게 피었다가 졌다”
오래된 기억의 더께를 걷어낸 자리에
다시 한번 생의 기운을 불어넣는 목소리
시간의 흐름 속에서 희미해진 향토적 정서를 살아 있는 현재로 만드는 성취를 보여주며 “우리 시대 백석 시인의 현현(顯現)”(천상병시문학상 심사평)이라는 평을 받아온 송진권 시인의 네번째 시집 『그림자놀이 하던 날은 가고』가 창비시선 532번으로 출간되었다. 박재삼문학상, 백석문학상 수상작 『원근법을 배우는 시간』(창비 2022) 이후 4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농경적 사유를 바탕으로 “현시대에 보기 드문 대서사시의 귀환을 예감”(김준현, 해설)케 하는 완미한 전통 서정의 세계를 펼치며 사람과 자연과 뭇 생명이 교감하는 시원(始原)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백석과 정지용의 구어(口語)와 리듬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토속어의 감칠맛과 구성진 가락이 생동하는 순박한 시편들이 “오랜만에 고향에 온 듯”(길상호, 추천사)한 잔잔한 여운을 남기며 뭉클한 감동을 자아낸다.
순하고 애틋한 언어로 되살려내는 지난날의 풍경
진실한 마음이 깃든 선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송진권의 시에는 자연의 정기와 사람의 온기가 서려 있다. 시인은 “시간의 적층으로 인해 납작하게 눌려 있는 말이 아니라 생생한 현장의 말과 현장의 감정”(해설)으로 “귀퉁이 깨진 호롱” “찢어진 털신” “귀뚜라미와 노래기와 지네 들” “숯검댕 묻은 몽당빗자루”(「마루 밑에 살던 것들에게」) 등 삶의 구석으로 밀려나 있는 존재들을 하나하나 불러낸다. 쉽게 스쳐 사라져간 이들에게 다정하게 안부를 물으며 이들의 내력과 “타고난 팔자”(「나의 어린 신」)의 ‘내림’을 꼼꼼히 새겨둔다. 그런가 하면 “안 죽으니께 살아지는 거”라며 “속에 태산 같은 짐을 쟁이구 사는”(「여이」) 물크러진 삶의 비애와 생의 덧없음을 때로는 슬픔을 담은 소리로, 때로는 해학적으로 전복하여 보여주기도 한다.
시인에게 유년의 기억은 단지 추억이나 회상이 아니라 “앞서간 사람들이 앉았던 흔적을 더듬어보는 일”(「기억해야 하는 감각」)이다. 시인은 고향 사람들의 질박한 삶을 진솔하게 복원해낸다. 특히 “독사같이 바랭이같이 대가리 쳐들고 살아나 밥 빌고 쌀 빌어”(「시인 한흑의 모(母)」) 자식들을 키워온 부모들의 헌신과 평생을 일로 살아온 노동의 숭고함을 뭉클한 필치로 그려내는 시인은 “손톱이 으등그러지고 손에 풀물 들어 갈라지고/지문도 다 지워”진 어머니의 “일 많이 한 손”(「피자두」)과 “무녀리라고 손가락질당하”면서도 “궂은일 다 당신이 하시”던 아버지의 “마디마디 못이 배긴 그 손”이 단순한 노동의 도구가 아니라 “식구들 건사”(「일 많이 한 손 1」)하고 삶을 지켜온 강인한 생명력의 원천이었음을 되새긴다.
“다시 또 어느 때 어느 곳으로 스밀지
골똘히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순환하는 계절처럼 이어지는 생의 돌림 노래
표제작 「그림자놀이 하던 날은 가고」에서 알 수 있듯 이번 시집에 수록된 많은 시편이 ‘그림자놀이’가 끝난 이후, 생이 사라지고 난 자리를 그려내고 있지만 시인은 죽음이나 소멸을 단순히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순환의 과정으로 받아들인다. 그렇기에 “곰팡이가 피고/정지엔 녹슨 가마솥이 굴러”다니는 빈집의 쓸쓸한 정경은 “오늘사 올라나 내일이나 올라나”(「못골 큰집」) 누군가를 애틋하게 기다리는 재회의 장소로 거듭나고, 화단의 꽃들이 말라가는 곳에서도 “이팝꽃도 고봉으로 피워놓고/꾀꼬리 울음도 개울물 소리랑 잇대어놓고/살자고 살자고/여기서 그냥 살자고”(「그윽한 밤에」) 속삭이는 생명의 기척을 느끼는 것이다. 시인은 가뭇없이 생의 뒤편으로 사라져간 것들을 지금-여기의 삶 한가운데로 다시 불러들이며, “내가 어디만큼 떠내려와 있는지” “내가 벗어놓은 허물들이 다 어디로 흘러갔을지”(「머나먼 골짜기」) 골똘히 생각해본다.
그러므로 ‘그림자놀이’의 시간은 가고 서늘한 현실이 당도해 있는 곳에서도 시인은 절망에 머물지 않고 다음을 그려낸다. 놀이는 끝났을지언정 “우리가 부르던 노래”(「그림자놀이 하던 날은 가고」)는 여전히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그 노래를 나침반 삼아 “옛날로 가는 지도”(「옛 노래의 도랑 가에서」)를 그려가며 “가도 가도 끝없는 행로(行路)”(「저 꽃밭」)를 묵묵히 걸어나간다. 가슴속에 쟁여둔 오래된 기억 속의 풍경들을 “아직도 잊지 않았다고” “아니 잊지 않으려고” “그래도 잊힐까 싶어서”(「물까마귀」) 시로 써나간다. 이처럼 모든 것이 사라진 자리에서도 다시 한번 꽃밭을 일궈내는 송진권의 시는 소멸 이후에도 결코 멈추지 않는 생의 끈질긴 맥박을 증명해 보이며 우리를 “여름꽃들이 화사하게”(「붉은 실」) 피고 있는 새로운 자리로 데려갈 것이다.
제1부
모란이, 그날처럼
옴팡골
산밑 집
옴팡골에 산밑 집에
저 꽃밭
그래도 저 꽃밭
붉은 실
시인 한흑의 모(母)
그윽한 밤에
그림자놀이 하던 날은 가고
고양이는 괜찮아
해바라기씨 이야기
제2부
찔레 덤불 속
나의 어린 신
도라지 꽃밭으로
용암사 해돋이
봄달, 자목련
장마
수묵
모란에게
호랑지빠귀
울고 가는 저 기러기
제3부
버들피리 꺾어 불던
마루 밑에 살던 것들에게
머나먼 골짜기
피자두
못골 큰집
삼세번
고들빼기 꽃이
동기간에
가시지 않는 비린내
일 많이 한 손 1
일 많이 한 손 2
노제(路祭)
2024 겨울, 못골
꾸구리가 앉았던 데
제4부
소 등가죽의 떨림같이
어디로 가는 배냐
물 먹는 논
믿을 만한 구석
방하착(放下着)
쇠죽 안칠 때
능이가 나는 곳
부부
노이히 삼촌을 생각함 3
신들의 황혼
늦게 온 손님
여이
봄나들이 사진 속
장날 3
물멀미
상봉(相逢)
여울목
제5부
물까마귀
여름은 어떻게 오는가
옛 노래의 도랑 가에서
기억해야 하는 감각
바랭이와 쇠비름은
소쩍새의 위장술
두릅 순은 몇번 꺾나
결대로
스무고개
밤눈 내리니
작약
무서운 기다림
먼 훗날
해설|김준현
시인의 말
길상호 시인
2026년 2월
송진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