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에 쓴 글자들을 툭툭 건드려
사람은 사랑이 되고 마을은 마음이 되고”
빗물의 리듬으로 써내려간 시
수평의 내면과 조응하는 고요한 희망의 언어
진득한 응시로 급변하는 시대상을 예리하게 포착해온 이도윤 시인의 신작 시집 『비가 시를 고치니 좋아라』가 출간되었다. 전작 『산을 옮기다』(도서출판 시인 2004)가 출간된 지 20여년 만에 긴 침묵을 깨고 펴내는 세번째 시집이다. 오랜 세월 언론계에 몸담으며 묵묵히 길어 올린 시편들은 그가 한시도 뜨거운 시심을 내려놓은 적 없음을 증명하듯 역사의 현장에 동참하는 예민한 감각과 자연에 깊이 조응하는 서정으로 빛을 발한다. 특히 비와 안개, 해와 구름과 같은 자연의 물성을 아우르는 사유가 판문점 선언에서 촛불혁명, 세월호 참사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말하는 결연한 언어와 절묘하게 맞닿아 폭넓은 시적 경험을 선사한다. 다사다난했던 2025년을 갈무리하고 2026년 새해를 맞이하는 길목에서, “암울했던 시대의 기록이자 그 시대를 온몸으로 버텨낸 이들의 피맺힌 고뇌와 희망의 언어”(정희성, 추천사)로서 당도한 이번 시집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단단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바람이 항상 그의 노래이듯
하늘은 우리에게 말을 전하고
새벽이면 별의 말을 물고 온 새들이 날아오른다”
이도윤의 시에는 안개와 구름, 그리고 비가 자주 등장한다. 시인에게 ‘비’는 단순한 기상 현상이 아니다. “비가 내리는 것을 잠시 바라보았을 뿐”인데 “기다림은 홀로 출렁이”고 “그리움도 차곡차곡 채워”(「약속」)진다. 이렇듯 비는 만물을 적시고 움직이게 할 뿐 아니라 시인의 내면에 스며들어 감정의 리듬을 일깨운다. 나아가 굳은 언어를 툭툭 건드려 “사람은 사랑이 되고 마을은 마음이 되고/동일은 통일이”(「비가 시를 고치니 좋아라」) 되게 하는 창조적 매개체가 된다. “삶은 호방한 물과 같”(「이별」)다며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끊임없이 순환하는 물에 생을 빗댄 시인의 비유는 사람의 일이 결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는 겸허한 통찰이자 묵직한 선언이기도 하다.
아픔을 위로하고 내일을 호명하는 결연한 사유
그리고 ‘지금 여기’의 개벽
시인은 이러한 물의 철학을 품고 판문점의 도보다리와 광화문 광장, 팽목항으로 나아간다. 그의 사유는 자연이 선사하는 고요한 풍경에 안주하는 대신 기울어진 세상의 한복판으로 향한다. 세월호 참사를 다룬 시 「천사의 나팔꽃」에서 시인은 “어느 곳에 담긴 물이든 그는 항상 수평일 뿐/세상이 기울어서 물이 차오를 뿐”이라고 일갈하며, 물의 수평성을 통해 비틀린 사회구조를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 비판은 선동적인 구호에 머무는 대신 “삼백사개의 노오란 꽃이 나팔을 불며/세상을 마지막으로 보려는 듯 거꾸로 매달”리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미지로 맺혀 애잔한 울림을 남긴다.
이도윤의 시선은 과거의 아픔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2018년 남북 정상의 만남을 “남북 팔천만/나무다리 위를 동시에 걸었다”(「도보다리」)는 시적 상상력으로 확장하며 남북의 두 정상이 분단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적 같은 순간을 온 겨레의 체험으로 승화한다. 이는 “아기가 첫발을 내디딜 때”의 “마땅한 그 일”(「판문점」)처럼 당연한 평화가 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으로 이어진다. 또한 시인은 12‧3 계엄 사태를 마주하여 쓴 시 「다시 부르는 광장의 노래」에서 “혁명이란 저절로 솟아나 한꺼번에 밀고 가는 것”이라 정의하고, “개벽이 개벽을 무너뜨릴 때까지/지금 다시 개벽”이라는 다짐으로 혁명이 과거에 머물지 않고 ‘지금 여기’에도 여전히 유효해야 함을 일깨운다. 혼란스러운 시국에도 결국 세상은 순리대로 흐를 것이며, 무너진 상식이 다시 제자리를 찾으리라는 굳건한 믿음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내가 걸어다니는 땅
여기에 새순이 돋아나고 여기에 해가 뜬다”
생활에서 길어 올린 고요한 성찰과 위로
격정적인 역사의 파고를 넘은 시인은 이제 소박한 일상과 존재의 내면으로 깊이 침잠한다. 그는 “지는 꽃도 아름답다는 걸/늙어버렸을 너에게 배운다”(「향기가 꽃을 만든다」)며 소멸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불러야 할 이름이/저녁 빛처럼 늘어난다”(「호명」)며 그리운 존재들을 호명한다. 나아가 “한 팔자 필경 한송이 꽃 피우는 일”(「오늘의 운세」)임을 깨닫고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생의 본질을 담담히 긍정하는 성숙한 사유로 나아가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세계를 밀어 올”리고 “보이는 것은 어둠 속 씨앗을 틔”(시인의 말)우듯,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의 장면들은 이도윤의 세계에 당도해 비로소 희망을 끊임없이 길어 올리는 원천이 된다. 속도와 효율만이 강조되는 세상에서 20년의 긴 침묵을 뚫고 우리에게 당도한 이 빗줄기 같은 시편들은, 거친 풍랑에 흔들리는 이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위로이자 어둠 속에서 다시 피어날 내일을 염원하는 단단한 희망으로 새겨질 것이다.
제1부 방에 들어온 음악
향기가 꽃을 만든다
당신
가계부
방에 들어온 음악
새순
눈
가족
비가 시를 고치니 좋아라
풍선
입관
안과 밖
약속
마음
날마다
동백꽃
근사한 가을
제2부 광장의 노래
그물
명화 극장의 눈물
사람의 모습
수배
판결
눈물
구두를 신으며
광장의 노래
촛불 일기
볕
파리에 분개하는 아침
도보다리
여기
천사의 나팔꽃
판문점
다시 부르는 광장의 노래
제3부 바다의 액자
바다의 액자
강가에서
개화
섬
봄날은 간다
돌탑
달력
오늘의 운세
훈수
다림질하며
안개
헌책
제4부 한지에 누운 마음
한지에 누운 마음
좋은 시
청려장
진화
이별
어린이 시인
당신
벽
화가의 술잔
거룩한 손
통화
천국의 사진
에어로빅
화가의 붓
시인의 발
친구
군인의 칼
마음
기도
호명
해설|구중서
시인의 말
정희성 시인
속도가 빨라질수록 세대의 그림자는 짧아지고 늙음의 호흡은 거칠어진다. 나는 지금 빠른 빛처럼 소멸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세계를 밀어 올리고 보이는 것은 어둠 속 씨앗을 틔운다. 이 순환을 바라보다보면 사라진 것들이 새로운 빛으로 돌아와 우리의 풍경을 흔든다.
세계는 각자의 우주를 품고 끝없이 갈라지지만 흩어진 지성이 서로의 불빛을 건너다볼 때 하나의 기준이 태어나고 그 위로 비로소 우리의 상식이 눕는다. 비록 그 상식마저 흔들려도 보이지 않는 사유의 힘으로 우리는 끝내 나아갈 것이다. 문학은 그 길목에 머무르며 서늘한 어둠을 태우는 작은 불씨다.
나의 시 또한 누군가의 마음에 닿는 순간 이미 나를 떠나 그의 목소리로 다시 피어날 것이다. 그러니 당신은 나에게서 시작해 나보다 멀리 자라난 존재다.
20년 만에 내는 시집이라 걱정이 앞서는데 위로해주시며 졸시를 엮어 시집을 만들어주신 창비와 추천사를 써주신 정희성 선생님, 그리고 구순의 연세에도 해설을 써주신 구중서 선생님께 감사와 존경의 말씀을 올린다.
아직 시인이라는 것이 고맙다.
2025년 12월
이도윤